2001년 12월호

‘태권도 황제’ 김운용 날개 꺾인 30년 신화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16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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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운용 회장이 마침내 태권도계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세계연맹 총재직에만 전념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0년간 절대권력을 행사해온 김운용 회장의 퇴진은 태권도는 물론 한국 스포츠 전반에 걸쳐 거센 ‘세대교체’ 바람을 물고올 듯하다.
    대한체육회장, 한국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 회장, 대한태권도협회장(대태협), 국기원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김운용 회장을 빼놓고는 한국스포츠를 말할 수 없다. 1971년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시작으로 체육계와 인연을 맺은 김회장은 지난 30년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쌓았다. 다소 이견이 있겠지만, 김회장의 최대 업적이 태권도의 세계화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또한 2001년 IOC위원장 낙선이 김회장의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김회장이 IOC위원장 자리에 욕심을 보인 시점부터 확실한 ‘텃밭’이었던 태권도계에서 ‘반(反)김운용’을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는 점이다.

    11월11일 저녁.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미륵산 기슭에 나이가 지긋한 태권도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범태권도 바로세우기 운동연합(운동연합)’ 회원들이었다. ‘운동연합’은 2001년 10월 태권도계의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하며 결성된 단체로 교수, 학생은 물론 일선 관장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10여 명이 모이자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주요 안건은 11월15일로 예정된 국기원 시위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진행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참석자들은 집회 프로그램과 항의방문 일정을 확정지은 뒤 저마다 김운용 회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먼저 용인대학교 동문회 김원삼 고문이 말문을 열었다(용인대는 경희대와 함께 국내 태권도계의 양대산맥으로 ‘운동연합’에 가장 적극적이다. 이것은 두 학교 출신 선수들이 지난 4월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승부조작의 희생양이 됐다는 세간의 주장과 관련이 깊다).



    “김운용 회장이 현재 태권도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보고받으면서, 치밀하게 조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조직에 문제가 있을 경우 최종 책임은 리더가 지는 거잖아요. 지금 한줌도 안 되는 모리배들이 특정 학교를 죽이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김회장이 그들을 비호한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김회장도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서울지역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관장들은 ‘운동연합’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부터 전했다. 더 일찍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서울시태권도협회(서태협·회장 송봉섭)와 국기원의 눈치를 보느라 뒤늦게 동참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서태협이나 국기원에 잘못 보이면 도장은 끝장이거든요. 한번 찍힌 도장의 학생들은 승단심사에서 줄줄이 떨어져요. 심사에서 보통 95% 이상이 붙는데, 눈밖에 나버리면 30%가 탈락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학부형들 사이에서 능력없는 관장이라고 소문나고, 도장은 문닫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젠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태권도를 살리기 위해 싸우겠다는 관장이 많아졌습니다. 화가 치밀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죠.”

    일선 관장들이 이처럼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10월22일 있었던 김회장의 기자간담회 때문이다(이날 김회장은 “나는 무(無)였던 태권도에서 유(有)를 만들어냈다. 밥 먹고 살게 해주고 태권도과를 만들어 교수도 시켜주었다. 사재를 털어서 국기원을 지었다”는 발언을 했다).

    “솔직히 그날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태권도인에게 감사한다. 다소 오해가 있지만 대화를 통해서 태권도가 바로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했으면, 다 잊어버릴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마치 자기가 밥을 먹여주었다는 식으로 태권도인을 모욕하니까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거죠. 지금 누가 누구 덕에 호강하고 있는데…. 물론 김회장이 고생 많이 했다는 거 압니다. 그거 모르는 태권도인도 없고요. 하지만 김회장보다 더 애쓴 사람은 전 세계에서 땀을 흘린 태권도 사범들입니다.”

    경희대 태권도과 전익기 교수가 말을 받았다.

    “김회장이 태권도과를 만들었다고요? 소가 웃을 일입니다. 태권도과를 교육부가 만들었지 김회장이 했나요? 사재를 털어서 국기원을 지었다고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김회장이 태권도를 위해 힘써온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김회장 때문에 태권도가 갈수록 망가지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용인대 태권도과 양진방 교수도 김회장의 기자회견 내용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태권도는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태권도인의 것이죠. 수십억원에 달하는 국기원, 대태협, 서태협의 예산이 어디서 나옵니까? 100% 승단심사 비용입니다. 그렇게 받은 돈을 가지고 자기들 멋대로 집행하고 태권도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집행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김회장의 리더십으로는 더 이상 태권도계의 병폐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김회장의 퇴진을 포함한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밤 11시. 무섭게 타오르던 모닥불도 꺼지고 4시간이 넘게 이어진 회의도 모두 끝났다. 참석자들은 15일 국기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하나둘씩 미륵산을 빠져나왔다. 참석자들은 작별인사를 하면서 서로에게 “틀림없이 이깁니다. 힘을 냅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 태권도가 살기 위해서는 김운용 회장의 퇴진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박정희에 비유되는 김운용

    태권도계에서 김회장은 종종 박정희 전대통령에 비유되곤 한다. 박 전대통령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이중적이듯이 김회장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시각이 공존한다. 김회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박 전대통령이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았던 것처럼 김회장은 태권도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국기원 설립, 세계연맹 창립,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등은 김회장이 아니면 해내기 힘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회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박 전대통령이 18년간 독재를 하면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억압했듯이 김회장도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태권도계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논리를 편다. 지난 30년 동안 태권도가 외형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으로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단이다.

    두 가지 상반된 주장 가운데 김회장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단계에서 분명한 것은 김회장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최근 들어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전까지 김회장의 노선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규모로 강력하게 김회장을 공격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한가지는 확실해진 셈이다. 김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에 뭔가 ‘이상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김회장을 태권도계에 끌어들인 사람은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까지 태권도계는 ‘청도관’ ‘무덕관’ ‘지도관’ ‘송무관’ 등 10개 파벌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당시 지도관 관장이었던 이부원장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던 김회장의 정치력을 활용해 태권도계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청도관 관장은 엄운규 현 국기원 부원장으로, 그는 이부원장과 함께 김회장이 연출한 ‘태권도신화’의 쌍두마차로 불린다.

    이부원장은 일본의 ‘국기관’을 본딴 국기원 설립을 추진했다. 이것은 파벌시대를 끝내고 협회 산하에 태권도 조직을 한데 묶으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 즉 국기원이다. 이부원장에 따르면 국기원을 설립하는 데는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박실장에게 부탁하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는 것.

    “김회장은 국기원을 지으면서 자기 돈을 쓴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김용채씨가 대태협 회장으로 있을 때 JP가 국무총리를 했어요. 그래서 3000만원의 예산을 따낼 수 있었죠. 양택식 서울시장이 역삼공원 터에 국기원 부지를 내주었고, 여러 업체에서 건설자재를 무상으로 지원했어요. 물론 김회장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기부금도 많이 얻어왔죠. 아마 박종규 실장이 아니었으면 국기원을 지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1972년 11월 국기원은 착공 1년여 만에 완공됐다. 초대 국기원장은 물론 김운용 회장.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국기원의 설립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태권도를 범 국민운동화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권도의 정신과 기술을 전세계에 보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기원이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태권도인은 별로 없다. 현재 국기원이 담당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승단심사다. 그래서 국기원을 ‘단증공장’이라고 부르는 태권도인들이 적지 않다.

    김회장은 태권도계에 들어온 직후 매우 정열적으로 일했다고 한다. 김회장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일 욕심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초창기부터 김회장은 누구에게 일을 맡기기보다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종우 부원장은 며칠씩 밤을 꼬박 새우는 김회장을 보고 놀란 적이 많다고 회고했다.

    이부원장이 김회장을 수행해 GAISF 총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회의는 며칠 동안 계속됐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은 김회장이 유일했다. 김회장은 잠깐이라도 틈이 생기면 일일이 외국 임원들을 찾아가 악수하고 태권도에 대한 지원을 당부했다. 김회장의 이런 노력 덕분에 회의 초반에는 태권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도 막판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김회장이 아니었으면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에 들어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누구나 꿈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하잖아요. 김회장은 누구에게 부탁하면 일이 풀리는지, 또 어떤 방법을 쓰면 성공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에요.”

    김운용 아니면 못 한다?

    원로 태권도인들에 따르면 김회장은 스포츠계의 실력자로 성장하면서 초창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참모들을 불러서 의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싫은 소리를 하면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는 것이다. 이부원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태권도인들은 능력이 없으니까 자기가 나서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다보니까 ‘너희가 무엇을 했느냐? 내가 다 했지 않느냐’는 식으로 발전한 거죠. 그러다보니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포진하고, 태권도계가 조금씩 곪아가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김회장의 이러한 태도에도 드러내놓고 김회장을 비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회장이 워낙 열심히 뛰어다닌 데다가 나름대로 많은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또한 김회장이 정치권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것도 태권도인들을 주눅들게 한 요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김회장은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고 자신이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결국 김회장은 1973년을 기점으로 대태협, 국기원, 세계연맹 등 태권도계의 주요 3단체를 완전히 장악한 셈이다.

    1986년 10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91차 총회에서 김회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여섯 번째 IOC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때까지 IOC위원이었던 박종규씨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노리고 권력 핵심부에 줄을 댔다. 이때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김운용씨가 아니라면 한국은 IOC위원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올림픽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얘기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IOC위원으로서 김회장이 남긴 최대의 성과는 역시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에 포함시킨 것이다. 태권도는 88서울올림픽과 92바르셀로나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다. 시범종목은 언제라도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정식종목과 차이가 크다. 1994년 9월5일 파리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결정됐다. 김회장은 사석에서 이날의 쾌거에 대해 “일생일대 최대의 영광”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김회장은 1991년부터 7년간 대태협 회장에서 물러난 일이 있다. 이때 김회장을 대신해 대태협 회장을 지낸 사람은 최세창 전국방부장관과 이필곤 전삼성그룹 부회장이다. 두 사람 모두 김회장의 추천으로 회장에 취임할 수 있었는데, 모두 중도에 퇴진했다. 최 전국방장관은 5·18재판, 이 전부회장은 1997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대태협 회장에서 물러났다.

    이필곤 회장 시절 대태협 상임부회장은 이흥주씨였다. 그는 이회창 현 한나라당 총재가 국무총리로 재직했을 때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 이런 까닭에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태권도계는 조직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밀고 있다는 파문에 휩싸였다. 대통령선거가 끝나자마자 태권도인들 사이에서 “삼성은 물러가야 한다. 태권도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이필곤 회장이 사임한 뒤 많은 태권도인들이 김회장을 찾아가 대태협 회장에 복귀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적인 모임에서는 김회장 시대가 끝나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김회장의 컴백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그랬을까?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은 ‘대안부재론’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태권도계가 생각보다 아주 복잡해요. 뭘 좀 해보려고 하면 투서가 들어가고 시비가 생기고…. 김운용 회장 때문에 문제도 많이 생겼지만, 아마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바닥에서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태권도인 중에 김회장처럼 일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게 비극이죠.”

    1990년대는 김회장이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후계자로 급부상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무렵 김회장은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도덕성에 큰 흠집을 남겼다.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뇌물 스캔들은 하마터면 그를 매장시킬 수도 있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또한 친딸인 김해정씨가 김회장의 지원으로 올림픽 개최도시에서 피아노독주회를 열었다는 사실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김회장은 “사실이 아니다.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했다. 실제로 조사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스캔들의 후유증은 컸다. 국내 체육인들은 김회장의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국제사회에서는 김회장이 추진하던 ‘포스트 사마란치’ 구상에 제동이 걸렸다. 2001년 IOC위원장 선거에서도 상대 후보들은 김후보를 공격하면서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2001년 2월. 김회장은 장차 태권도계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올 인사를 단행했다. 문제의 인물은 두 사람. 대태협 전무로 기용된 임윤택 전서태협 전무와 대태협 부회장에 선임된 송봉섭 서태협 회장이다. 임전무는 ‘특정학교 출신을 편애한다’는 소문으로, 송회장은 ‘업무상 공금횡령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다. 두 사람은 태권도계에서 이른바 ‘엄운규(국기원 부원장) 인맥’의 핵심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2001년 4월.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태권도계의 문제점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은 세계대회보다도 치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권도의 경우 한국챔피언은 세계챔피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용인대와 경희대가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4월16일 대회 첫날부터 불공정 판정이 계속되자 용인대 학생 250여명은 태권도 사상 최초로 국기원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태권도계에서는 이것을 4·16사태라고 부른다).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탈락하는 선수가 속출하자 대회는 파행에 휩싸였고, 한 실업팀 감독이 실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태권도의 판정은 애매하기로 유명하다. 판정규정에는 ‘강하고 정확하게 가격할 때는 득점’이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심판이 보기에 따라서 득점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장면에서 특정 학교선수만 연속해서 불이익을 보았다면 그건 다른 문제일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심판진의 구성이다. 관례로 볼 때 국가대표 선발전의 심판진을 짜는 데는 대태협 전무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게다가 심판진에 임윤택 전무의 친인척 2명이 포함돼 있었으며, 16명의 심판 가운데 10명은 전국대회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임전무가 편파판정을 조종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임전무는 “기존의 관례를 깨고 원칙에 따라 배정했다”며 ‘판정오더설’을 부인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은 끝났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학생들이 집단 농성에 들어가자 대태협 임원들이 중재에 나섰다. 당시 김회장은 IOC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조기에 매듭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논란 끝에 대태협측과 교수·학생 대표들이 합의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합의문에는 ‘임윤택 전무 등을 문책하며, 사퇴하는 집행부는 향후 5년 안에 (협회에) 복귀할 수 없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김회장은 IOC위원장 선거에서 낙선한 뒤 임전무를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차장으로 재기용했다.

    이에 대해 엄운규 부원장은 “나는 합의문에 대해 보고받은 적이 없다. 9월3일에서야 합의문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김회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김회장은 ‘합의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김회장이 합의문을 보고받고도 그런 인사를 했다면 잘못이다. 하지만 김회장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임윤택 사무차장도 “합의문은 모른다. 11월 세계대회를 준비하려다 보니 실무자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경험이 많으니까 불러들인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이때부터 태권도계에서는 임윤택 사무차장과 김회장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으며, 여기에 김회장의 아들 정훈씨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았다. 정훈씨는 김회장이 곤욕을 치른 솔트레이크시티 추문의 당사자이기도 해서 태권도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정훈씨가 실질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E-TKD사는 2001년 3월 세계태권도연맹, 대태협, 국기원 등 김회장이 이끌고 있는 3개 단체의 인터넷 홈페이지 사업권을 따낸 일도 있다. 또한 국기원 직원들 사이에서는 정훈씨가 김회장의 지원으로 국기원 이사에 임명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정훈씨와 관련된 루머들은 김회장의 도덕성에 또 하나의 상처를 남겼다.

    2001년 10월21일. ‘운동연합’은 국기원에서 첫 집회를 열고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임윤택 사무차장은 100여 명의 젊은이를 동원해 시위대와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운동연합측이 “태권도를 망친 김운용 엄운규 임윤택 송봉섭을 처단하라”고 외치면, 정장차림의 청년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집행부를 장악하기 위해 교수나 학생들을 선동하는 특정인은 물러가라”고 맞섰다.

    10월22일. 태권도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김회장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많은 태권도인들은 이날을 계기로 태권도계의 내분이 진정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김회장은 또 한번 결정적인 패착을 두고 말았다. 태권도인들의 정서와 크게 어긋나는 발언들을 쏟아낸 것이다. 11월5일자 ‘태권도신문’은 기자회견 내용을 대서특필하면서 김회장의 ‘돌출발언’을 제목으로 올렸다.

    “다 밥먹고 살게 해주고 태권도과를 만들어 교수도 시켜주고”

    “내실을 구상중인데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똥물이 튀는 바람에”

    “임윤택씨는 죄인도 아닌데 사무직원 쓰는 것까지 궁시렁거려”

    한마디로 태권도인들의 문제제기를 무시해버린 셈이다. 다함께 잘해보자고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 문제가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대꾸한 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태권도계의 반발은 커지고, 1주일 뒤 김회장은 생애 최대의 치욕을 겪게 된다.

    10월29일 오전 11시. 서울 올림픽파크텔 3층 회의실에서 대태협 전체 이사회가 열렸다. 김회장이 입장하기 전부터 설전이 벌어질 만큼 분위기는 긴장돼 있었다. 다급해진 김총재가 이사회 진행을 포기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일부 사범들은 김회장의 차량을 에워싸고 태권도계에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김회장은 10월31일 제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연맹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재에 재추대됐다. 하지만 이번 총회는 다른 때와 달랐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무엇보다 차기 세계대회 장소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나타난 유럽세의 결집현상을 주시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연맹 김철오 사무차장은 “김회장이 안팎으로 고전하는 것을 보고, 유럽 국가들이 자신감을 갖는 듯했다. ‘한국에는 ‘포스트 김운용’이 없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대로 가면 주도권이 유럽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제주도 총회 직후 김회장은 조심스럽게 대태협 회장직에서 물러날 뜻을 내비쳤다. 김회장은 이종우 엄운규 부원장, 이금홍 세계연맹 사무총장 등과 함께한 자리에서 “내년 1월에 총회가 있으니까 그때까지 이부원장과 엄부원장이 잘 맡아달라. 총회 때까지 좋은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부원장은 거부의 뜻을 밝히고 오히려 세계연맹 부총재직까지 사임했다. 엄부원장도 “나는 지금 퇴진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맡을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이것으로 미루어 김회장은 당시 대태협 회장에서 물러나더라도 누군가를 ‘대타’로 내세우고 싶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1월1일부터 7일까지 열린 제15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 태권도의 위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여자는 금메달 6개를 휩쓸며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켰지만, 남자는 2명이 우승하는 데 그쳤다. 임윤택 사무차장은 “세계적으로 전력이 평준화된 결과”라고 지적했지만, 김철오 사무차장은 “외국 코치들이 ‘한국 태권도인들의 감정싸움에 왜 한국선수가 희생돼야 하느냐?’고 묻더라”며 판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내비쳤다. 국가대표 선발전부터 심판판정에 불만을 터뜨려온 용인대와 경희대측도 승부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두 대학에서는 이번에 5명이 출전했는데, 금메달을 따낸 선수는 단 1명이었다.

    김운용은 물러나지만…

    김회장의 30년 아성에 도전하는 세력이 단지 태권도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1년 7월 IOC위원장 선거를 계기로 김회장의 국제 스포츠계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선거에서 완패했을 뿐만 아니라,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시비와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매너 등은 김회장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정치권에서도 김회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사롭지 않다. 일부에서는 박정희정권 때부터 정치권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온 김회장의 ‘줄타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또 김회장의 나이가 71세이니 만큼 이제 은퇴할 때도 됐지 않았냐는 얘기도 있다. 이와 관련 11월6일 남궁진 문화관광부 장관이 체육단체의 구조개편을 시사한 부분은 주목할만하다.

    11월15일 오전 11시. 국기원에서는 제10회 태권도 한마당이 열렸다. 태권도 한마당의 본래 취지는 국민들에게 태권도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데 있다. 하지만 즐거워야 할 잔치판의 분위기는 살벌하기만 했다. 국기원 앞쪽에는 노란 점퍼 차림의 태권도 사범들이, 뒷마당에는 붉은 머리띠를 두른 ‘운동연합’ 회원들이 진을 쳤다. 11시20분 ‘운동연합’ 대표자들이 엄운규 부원장실로 몰려가면서 국기원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운동연합’은 국기원 복도를 점거했고, 임윤택 사무차장은 태권도 사범들을 투입해 ‘운동연합’ 회원들을 끌어내려 했다. 몸싸움을 벌이던 검정색 양복 차림의 청년들은 운동연합 소속 대학생 2명의 목덜미를 잡아챈 뒤 체육관 바닥에 쓰러뜨려놓고 “이 놈들이 경기장에 들어왔다. 빨리 사진 찍고 경찰에 연락하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양측의 세(勢)대결이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을 즈음, 사태를 반전시키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김운용 회장이 국기원 측에 대태협 회장과 국기원장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혀온 것이다. 곧이어 “물러나는 것은 내 마음”이라고 버티던 엄운규 부원장도 “국기원 이사직 사표를 썼다. 일주일에서 열흘쯤 신변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운동연합’측의 퇴진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인 셈이다.

    ‘운동연합’이 퇴진을 요구했던 인사는 모두 네 명. 김회장과 엄부원장이 사퇴함으로써 임윤택 사무차장과 송봉섭 회장만 남게 됐다. 이와 관련 ‘운동연합’ 양진방 교수는 “두 사람은 워낙 비리가 많은 사람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미 검찰고발을 해놓았다. 더 추악해지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길 바랄 뿐이다. 태권도 개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임사무차장과 송회장은 ‘운동연합’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임사무차장은 “순수한 학생들을 강제동원해 태권도계를 말아먹으려는 자들의 불순한 음모다.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에 대해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밝혔다. 송회장도 “나는 절차에 따라 선출된 사람이다. ‘운동연합’이 무슨 자격으로 서태협 일에 관여하느냐?”고 주장했다.

    2월부터 시작된 태권도계의 분쟁은 결국 30년간 절대권력을 행사해온 김운용 회장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태권도가 시련을 딛고 ‘국기’로서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는 좀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1년 가까이 계속된 싸움은 많은 태권도인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김운용 없는 한국 태권도’. 그것은 태권도인들에게 하나의 실험이며 새로운 도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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