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가포르는 경제문제보다 정치·사회적 낙후가 더 큰 문제다. 아직도 인민행동당은 국회 전체의석을 차지하고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실질적인 야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치러진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거의 전 의석을 석권했다.
고촉통(吳作棟) 총리는 신년사에서 싱가포르 경제의 실적부진을 세계경제의 침체, 즉 미국 테러사태와 미국 및 일본경기의 부진 탓으로 돌리기는 했지만, 2001년이 싱가포르에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고 정의하고 경제를 구조조정하고 새로운 생존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투자와 효율주도의 경제에 혁신 엔진을 장착해서, 기업가정신이 살아 있는 지식경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세계와 운영환경을 변화시켜 싱가포르와 해외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기회를 창출해야 합니다.”
지난해의 경제실적을 보면 싱가포르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2001년 4·4분기 경제성장률은 전년동기대비 -7%였는데, 2·4분기 -0.5%, 3·4분기 -5.6%에 이어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다. 1997∼98년 동남아를 휩쓸었던 외환위기 속에서도 싱가포르는 다른 동남아 국가와는 달리 무너지지 않았다. 비록 1998년 성장률이 0.1%에 그쳤지만 인도네시아의 -13%, 말레이시아의 -7.4%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해는 다른 국가들이 모두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싱가포르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외환시장에서 싱가포르 달러 가치는 급격히 하락해 싱가포르달러(싱달러)/달러 환율이 12월말에는 1.85까지 치솟아 외환위기가 가장 고조됐던 1998년 8월의 1.78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2001년의 우울한 경제성적 경제침체로 주식시장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1997년 초 스트레이트타임스지수(STI)는 2000을 상회했으나 1998년 중반에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급락해 1000 이하로 떨어졌다. 동아시아 경제가 1999년부터 급속히 회복되면서 STI는 2000년 1월에 2500선까지 회복했지만 지난해에는 경기하락과 함께 지속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해 연말에 1600 수준으로 하락했다. 한국이나 다른 국가들의 주가가 미 테러 사태의 여파를 털고 연말에 대폭 반등했지만 싱가포르 시장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경기침체의 주범은 재화 부문 그것도 제조업 부문이다. 싱가포르 GDP의 26% 이상을 차지하는 제조업은 2000년 4·4분기에 18.8%나 성장했으나 2001년 3·4분기에는 -19.1%로 부진했다. 싱가포르의 주요 제조업은 전자산업, 석유화학산업 등이며, 특히 반도체 하드디스크 등 컴퓨터 주변기기산업이 핵심인 전자산업의 경우 수출주도 산업일 뿐만 아니라 비중도 커서 싱가포르 경기를 좌우하고 있다. 전자산업의 생산은 급속도로 감소했는데 10월의 생산은 2000년 10월에 비해 34.8%, 11월에도 전년 동기 대비 29.8%가 감소했다.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등을 생산하는 다국적기업(MNC)들이 생산을 축소했기 때문이다.
제조업 분야의 생산감소는 수출부진에 기인한다. 싱가포르의 수출의존도(수출/GDP)는 150%로 극히 이례적으로 높다. 중계무역항 기능을 하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수출은 중계수출과 내국인에 의한 수출로 구분되는데, 내국인에 의한 수출(국내수출)은 2000년 총 수출의 약 57%였다.
또한 이 국내수출에는 싱가포르를 통하는 원유 및 원유제품의 수출이 포함돼 있어 싱가포르 경제상황을 설명하는 바로미터로는 원유를 제외한 비석유 국내수출(NODX)이 이용된다. 2000년 NODX는 1131억 싱달러로 총수출 2378억 싱달러의 47%에 불과하지만 GDP 대비 71%에 이르러 이것만으로도 대만, 한국 등의 수출의존도보다 오히려 높다.
이 NODX는 2000년 11.8%가 증가했고, 2001년 1·4분기에도 3.6% 증가했지만 2·4분기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 -9.4%를 기록했고, 3·4분기에는 무려 24.4%가 감소했다.
NODX 중 사무용기기, 통신장비, 전기기기 및 부품 등 전자 관련제품의 수출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IT산업의 경기사이클이 하강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자 전자제품의 수출이 감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3·4분기에 전자제품의 수출은 35.5%가 하락했는데 IC, 디스크드라이브, PC부품, 통신장치 등 전자산업 모든 분야의 수출이 감소했다.
지역별로는 대부분의 국가에 대한 수출이 감소했다. 10월 대미 NODX는 39.2%가 감소했고, EU에 대한 수출은 26.1%, 말레이시아 및 일본에 대한 수출은 각각 30.2%와 26.3%가 감소했다. 대만에 대한 수출은 40%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재화부문에 비해 둔화폭이 낮았지만 서비스산업 역시 부진을 면치 못했다. 3·4분기 도소매 판매부문의 부가가치는 8% 이상 감소했고, 음식숙박업도 불경기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배경에는 동남아 다른 주변국의 경기침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인구 400만명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769만명의 관광객이 싱가포르를 방문했으나 2001년에는 관광객이 감소했던 것이다.
싱가포르 경제는 올해 상반기까지는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2001년 10월에 실시한 기업인에 대한 경기조사에 따르면 향후 6개월(2002년 3월말까지) 내에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대답한 기업인들은 7%에 불과했고, 경기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36%에 이르러 그 차이는 무려 29%에 이르렀다. 이는 전분기 조사 당시 경기회복에 대해 악화될 것이라고 한 응답자가 22%였다는 점에서 기업인들의 경기회복에 대한 신뢰도가 더 낮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기가 하락하자 정부는 해외수요의 침체를 국내 경제활동 자극과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7월 1차로 22억 싱달러에 이르는 경기부양정책을 시행했다. 싱가포르는 경제의 개방도가 높아 금융정책이나 재정정책의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경기부양책은 예산과 직접 관계 없는 재정분야의 정책으로 나타났는데 상업용이나 공업용 부동산에 대한 재산세를25% 감면하는 등의 안이 포함돼 있었다. 이때만 해도 정부는 미래의 경기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조치로서 경기부양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차 부양책 이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미국 테러사태로 싱가포르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더 커지자 정부는 곧 위기 탈출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0월12일 정부는 GDP의 7%인 총 113억 싱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기업이나 개인에게 조세 및 수수료환급과 감면, 국내기업 지원, 부동산 시장 조치, 인프라건설 촉진, 고용지원, 저소득층과 실업자 대책, 신싱가포르(New Singapore Share) 국민주 분배, 임금비용 관련 조치 등이 그것이다. 예컨대 2001년 법인세의 경우 2만5000 싱달러까지는 50%를 인하하고, 그 이상의 조세에 대해서는 5%를 인하하기로 했다. 2002년의 경우 법인세에 대해 5%를 감하기로 했고, 개인소득세에 대해서도 10% 줄여주기로 했다. 유류에 부과하던 세금도 40%에서 35%로 인하했다. 또한 항공기 착륙비용도 10% 인하했다. 이들은 모두 기업과 개인의 거래비용을 줄여줌으로써 경제활동을 자극하자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부동산 대책으로는 부동산시장의 침체에 직면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정부가 토지매각을 중단하기로 했는데 2001년과 2002년의 매각프로그램을 재검토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부동산 투기금지조치에 따라 보유 3년 이내의 부동산 양도차익에 부과하던 양도소득세를 폐지하기로 했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확대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내국인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내국기업금융제도(Local Enter prise Finance Scheme:LEFS)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제도를 통해 중소기업에 대한 금리를 1% 인하하고, 은행의 LEFS 프로그램에 의한 신규대출에 대해서는 정부의 위험분담률을 70%에서 80%로 올려 은행의 대출을 촉진하기도 했다. 특히 흥미로운 정책은 국민주 형태로 국민 전체에게 27억 싱가포르달러 상당의 신싱가포르주식을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이 국민주는 몇 년간 배당을 보장한 것으로서 11월의 총선을 앞두고 국민에게 선심정책으로 사용한 측면이 짙다. 1996년 말 총선을 앞둔 당시에도 정부는 싱가포르 전 인구에게 국민주 형태로 우량기업의 주식을 분배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기부양책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져올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싱가포르 경제의 위기 상황을 불러온 근인(近因)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 경기의 침체에 있다는 점에서 해외경기가 성장세로 전환돼야 본격적인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경제가 회복될 경우 싱가포르의 위기상황이 해소될 것인가. 싱가포르 경제를 위기상황으로 보는 근본적인 이유는 싱가포르가 안고 있는 문제가 단기적으로 세계경기의 회복에 따라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싱가포르 경제의 근본 문제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싱가포르 경제가 다국적기업 위주의 전자산업 일변도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했다. 자원이 없는 싱가포르로서는 생존의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집약적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67년 제조업 투자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확대인센티브법(Economic Expansion Incentive Act)을 제정해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했다. 그 해에 미국의 반도체업체인 텍사스 인스투르먼트가 싱가포르에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한국과 타이완이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있어 미국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싱가포르를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당시 싱가포르 GNP의 약 15%를 차지하며 4만명의 노동력을 고용하던 영국군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실업 해소를 위해서도 외국인 투자 유치가 절실했다. 싱가포르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위해 인센티브 확대, 임금안정, 노사안정 등의 조치를 취해나갔다. 이후 싱가포르는 국제적인 전자부품 제조기지로 발돋움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 서비스, 무역 등의 다국적기업이 진출해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나라로 인정됐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다국적기업의 천국이 됐는데 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매출액 기준 싱가포르 기업순위다. 2000년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은 석유무역을 하는 칼텍스(Caltex Trading)였다. 20대 기업 가운데 순수 싱가포르 기업은 6개로 58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싱가포르항공(Singapore Airlines)이 전체순위 7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은 해운회사 넵튠오리엔트(Neptune Orient Lines)로 매출 47억달러로 전체 순위 11위에 올랐다.
20대 기업에 든 6개사는 모두 항공, 해운, 전력, 통신, 인프라 건설 등을 영위하는 정부계 기업이다. 제조업체로서 최대 기업은 1980년대 초반 싱가포르에 진출한 미국계 기업 플렉스트로닉스로 매출액이 121억달러였다. 그 다음은 역시 미국의 컴퓨터업체인 휴렛패커드로서 매출은 79억달러였다. 그 다음은 또 다른 미국 반도체업체인 에스티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였다.
이와 같이 제조업을 다국적기업의 하청생산에 맡긴 상태에서 싱가포르 기업인들이 발전할 수 없었고, 다국적기업들이 본사 중심의 의사결정을 하면서 싱가포르는 독립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하기 어렵게 됐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우수한 젊은이들은 다국적기업으로 진출한다. 일반 근로자들은, 리콴유 수상이 한때 말한 바와 같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다국적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떠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올해 1월에는 일본계 화학업체인 미쓰이페놀과 테이진폴리카본네이트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年?
둘째, 싱가포르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독과점적 정부연계기업(Government Linked Corporates: GLC)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재무부 산하의 지주회사를 통해 많은 GLC를 운영하고 있다. GLC는 수리조선업, 항공, 교통, 해운, 부동산개발, 공단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GLC 경영자들은 정부 고위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싱가포르는 정부 부처까지도 수익사업을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GLC는 적어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 싱가포르 항공은 서비스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수익성도 높은 기업이다. 싱가포르 텔레콤의 시가총액은 한국통신보다 크다는 평가도 있다. GLC는 대부분 독점으로 운영되고 있고 정부의 위임사항을 충실히 수행한다. 동시에 GLC들은 외국의 다국적기업들과는 경쟁하지 않고 국내기업과 경쟁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GLC는 창조와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경제를 성장시키는 기업가의 생성과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즉 경제의 활력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내국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도 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셋째, 싱가포르 경제가 갖고 있는 문제 중 하나로 투자의 비효율성을 들 수 있다. 외양으로 보면 싱가포르는 가장 효율적인 국가로 보이고, 이는 세계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싱가포르 공항이나 항만의 효율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 거리에서 교통체증이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싱가포르 관료들의 효율성에 놀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미시적인 효율성과 달리 싱가포르 경제는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생산에 투입되는 생산요소와 산출과의 관계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생산이란 노동이나 자본 등 생산요소를 기술로 결합해 생산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 전환과정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생산성(총요소생산성)이다.
그런데 다수의 학자들은 싱가포르의 생산성증가율이 극히 낮거나 마이너스라고 보고하고 있다. 생산성증가율이 마이너스라는 것은 노동과 자본 투입을 한 단위 증가시켰을 때 산출물이 한 단위 증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연구는 앨윈 영(Alwyn Young)이라는 학자의 연구인데 그는 1966∼90년 사이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생산성 상승률을 구한 결과 싱가포르는 0.2%로 한국 1.7%, 대만 2.1%, 그리고 홍콩의 2.3%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앨윈 영의 연구를 바탕으로 폴 크루그만은 동아시아 경제의 위기를 예측한 유명한 논문 ‘아시아 성장의 신화(The Myth of Asia’s Miracle)’에서 싱가포르의 성장이 기적적인 것으로 보이나 영감이 아닌 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싱가포르의 고용인구 비율은 1966년에서 1990년 사이에 27%에서 51%로 증가했다. 1966년엔 절반 이상의 노동력이 공적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1990년엔 3분의 2가 중등교육을 마쳤다. 그리고 투자율이 11%에서 40%로 증가했다. 이러한 자원투입은 한 번이나 가능한 것이지 반복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51%로 증가한 고용인구 비율을 다시 두 배로 올릴 수는 없는 것이고, 대부분의 노동력이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다음 한 세대 내에 싱가포르인들을 박사(Ph.D)로 만들 수는 없으며, 따라서 40%의 투자율을 70%로 올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저효율성의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정부가 계획에 의해서 자원배분을 하기 때문에 경제 전체가 경쟁으로 창출할 수 있는 효율성을 얻을 수 없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싱가포르 정부의 지나친 엘리트 의식, 국민의 상당수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 보호하고 돌봐야 한다는 의식구조를 통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위험기피자로서 존재하는 까닭이다.
크루그만의 주장 이후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분노해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들은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경제학용어 총요소생산성을 언급하면서 싱가포르 경제의 효율성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변해도 싱가포르 경제는 저생산성 경제임에 분명하고 이는 향후 싱가포르 경제를 어둡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GDP의 40% 남짓에 불과한 소비를 계속 줄이면서 투자를 얼마나 더 확대할 수 있겠는가. 어린이, 노인, 주부 모두 일을 함으로써 노동참가율을 60%, 70%로 올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경제의 또 다른 문제는 경제 전체가 잉여경제 체질로 굳어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우수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중앙연금기금(CPF) 등 강제저축을 통한 고투자로 성장을 했다. 이 강제저축은 국가적인 잉여로 남아 있다. 2001년 12월말 현재 인구 400만명의 싱가포르가 가진 외환보유고는 758억달러에 이르고 싱가포르가 해외에서 투자한 주식 규모도 588억 싱달러에 이르고 있다. 2000년 경상수지 흑자는 200억달러에 이르렀다.
싱가포르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990년대 후반기에 평균적으로 GDP의 약 4분의 1 규모에 달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경상수지 흑자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과도한 적자가 나쁘듯이 과도한 흑자도 좋은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의 발원지였던 태국의 1996년 경상수지 적자규모는 GDP의 약 8%였다. 말레이시아, 한국 등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적자규모도 GDP의 5% 정도였다. 적자규모가 GDP의 5% 이상에 이르는 국민경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역시 5% 이상 흑자를 기록하는 국가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국민소득상 경상수지 흑자는 저축과 투자의 차이, 즉 잉여저축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싱가포르는 투자를 적게 하는 나라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연 그렇지 않다. 싱가포르의 투자율은 1990년대 전반기 약 40%를 유지했고 외환위기 이후 다소 감소했지만 여전히 30%대 후반이다. 이러한 투자율은 세계적으로 드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잉여가 나는가. 바로 소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비는 GDP의 60%선에 이르고 있으나 싱가포르의 민간소비율은 40% 정도로 투자율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더 많은 수준이다. 싱가포르의 잉여경제는 싱가포르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일 뿐이다. 즉 싱가포르 정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재산을 남겨주되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지나치게 위험회피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이는 싱가포르 기업인의 부족으로 연결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엘리트들은 싱가포르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해야 한다. 농업기반이 없기 때문에 식량을 수입하는 것은 당연하고, 식수까지 수입해야 할 정도로 자원은 없다.
결국 성장을 위해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택했으나 기술과 기업인이 없는 상황에서 다국적기업과 GLC에 의존하게 됐다. 다국적기업의 주류는 원천기술이 없는 전자산업에 치중하고 있고, 이들의 높은 해외의존도 때문에 싱가포르 경제는 해외여건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싱가포르 정부는 안전하고 지속적인 수익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중앙연금기금의 돈이나 국가자산의 상당부분을 해외 증권에 투자하고 있는 정부는 실물부문에 투자를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지역화전략을 통해 싱가포르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장려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해외진출은 우리와 같은 국제화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아시아지역에 자원을 집중 투자하는 것이었다. 좁은 국토면적, 지나친 수출의존도, 제조업 생산비용 상승, 노동력과 시장의 제한 등을 고려할 때 해외에서 안정된 수익처를 찾되, 자원은 한정돼 있으니 힘을 분산하지 말고 아시아 지역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지역화전략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말레이시아의 조호르주, 인도네시아의 바탐섬, 그리고 싱가포르를 연결하는 성장의 삼각지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자본과 기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저렴한 노동력과 토지를 활용해 역내협력을 증진한다는 구상이다.
먼저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GLC인 싱가포르 테크놀로지그룹은 인도네시아의 바탐섬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건설, 투자를 진행했다. 동시에 싱가포르 기업들은 말레이시아 조호르로 옮겨갔다. 이외에도 GLC들은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인도, 미얀마, 베트남 등이 주요 진출지역이었는데 나중에는 중국에까지 진출했다 특히 중국의 쑤저우(蘇州)타운 건설은 리콴유 전수상의 실질적인 진두지휘로 진행됐다.
이와 같은 지역화전략은 외환위기 이후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신규투자로 공장을 건설하고 부동산을 개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위험이 따랐다. 저가의 해외자산이 넘쳐나는 상황에 구태여 시간을 들여 새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보다는 나와 있는 매물을 매입하는 방향이 더 옳다고 본 것이다.
1997년 이후 싱가포르 GLC들은 아시아와 세계의 탐욕스러운 자산매입자가 됐다. 싱가포르 발전은행(GLC)은 1997년 말 이미 태국의 민간은행인 타이 다누은행을 매입했고, 2001년 중반에는 홍콩에 있는 말레이시아 화인계은행인 다오헹은행(Dao Heng Bank)까지 매입했다.
2001년 3월 싱가포르텔레콤은 호주의 한 통신회사를 70억달러에 매입했다. 이때 싱가포르텔레콤의 주가는 하락했다. 또 인도네시아 최대 자동차회사인 아스트라도 싱가포르로 넘어갔다. 뉴질랜드 항공의 최대주주 역시 싱가포르 정부 지주회사다.
싱가포르 정부는 자산 매입을 아시아에 한정하지 않았다. 외환위기로 인해 자산운용의 지역별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해외 자산매입은 1980년대 일본 기업이 미국의 자산을 대량 매입했던 것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싱가포르가 가치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고가로 사들이는 현상을 ‘싱가포르 프리미엄’이라고 불렀다.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어 만든 자산은 수익성과 관계 없이 정부 주도로 외국기업이나 자산의 매입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또 정부 차원에서 주요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다른 동남아 국가와 아세안자유무역지대를 창설했다. 동남아에 큰 지분을 갖고 있는 일본과 지난 1년 동안 협상을 해왔는데, 곧 자유무역지대를 포함하는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호주 및 뉴질랜드와 이미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했고 미국, 한국 등에도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요청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가진 해외여건의 변화에 따른 파급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싱가포르가 가진 더 큰 문제는 정치적, 사회적 낙후다. 아직도 인민행동당은 국회 전체의석을 차지하고 실질적인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야당이 출마 후보조차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실질적인 야당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가운데 2001년 11월의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거의 전 의석을 석권했다.
엘리트들로 충원되는 정부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정부는 우수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대졸자들의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고, 교육 수준에 따라 2세 생산을 장려하거나 억제하기도 한다. 심지어 남녀간 성생활에까지 개입해 이런 형태의 섹스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정해놓았다.
언론은 통제돼 일사불란한 국가운영, 가부장적인 질서를 주장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홍보지 역할을 한다. 이런 속에서 국민들은 순치(馴致)되었다.
싱가포르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기간에 정치적 안정과 공업화, 그리고 복지사회를 이룩한 것은 제3세계국가 중에서는 이변이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민주적 가치는 희생됐다. 이제 이들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민을 꿈꾸는 싱가포르인들이 늘고 있고, 사회의 활력은 살아나지 않고 있으며, 정보화사회에서 가장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음에도 경제성장률은 급락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적 가치의 희생에 대해서 싱가포르 엘리트들의 논리는 확고하다. 리콴유는 문화는 운명이라고 주장하고 싱가포르가 속한 아시아의 고도성장은 서구식 시스템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아시아식 시스템인 유교적 전통, 선공후사 등의 가치가 경제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리콴유씨가 특히 강조하는 아시아적 가치가 실제로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다. 개인을 다소 희생시키고 전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체제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 그 누구도 정확한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싱가포르가 지식사회, 정보화사회를 주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통제된 사회, 개인의 창의력이 억압된 사회에서 지식기반 경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정부의 투자를 일정부분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다. 정부는 수년 동안 투자해 싱가포르의 모든 가정과 사무실을 연결한다는 광대역초고속인터넷망 싱가포르 원(Singapore One)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싱가포르의 광대역 인터넷 사용비율은 한국에 비해 떨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초고속인터넷을 쓰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개인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정부는 창의력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효과는 미미하다.
이와 같이 본다면 올해 세계경제가 회복된다고 해도 싱가포르가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릴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다시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위해서 싱가포르 국민들이 희생해야 하는 삶의 질적 수준 저하는 훨씬 더 클 것이다.
또한 단기적으로 싱가포르가 완전히 위기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 같다.
도시국가로서 의사결정의 신속성, 정부 정책집행의 효율성은 싱가포르가 갖는 장점이고, 동시에 지리적으로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축적됐든 간에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다. 또한 정치적 비민주화는 도시국가 구성원들을 손쉽게 동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촉통 수상이 신년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싱가포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기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필요하다. 싱가포르 경제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난 시기에 고착된 대외의존형 고저축, 고투자 대신 소비를 촉진하고 내수산업을 균형있게 발전시켜야 하며 민주화와 개방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먼저 싱가포르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경제철학이 변해야 한다. 중앙연금기금제도를 통한 고저축과 이를 통한 고투자와 대외지향적 경제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고저축을 통한 막대한 재정흑자, GLC의 자본과잉, 100%의 주택소유로 싱가포르 사회는 위험보다 안정을 택하고 있다.
저축을 이용한 해외자산의 축적이 싱가포르의 미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GLC는 주주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수익성을 올릴 수 있을 때 해외자산을 매입하도록 해야지, 정부가 준 임무를 완수한다는 차원에서 해외자산 매입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검약과 절제가 아닌 소비를 촉진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의 더 나은 균형, 투자와 소비의 더 나은 균형, 그리고 다국적기업과 국내기업의 더 나은 균형을 이룬 그러한 경제로 이전해야 한다.
또한 내국인 기업인을 육성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싱가포르 정부도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시적 제도는 사회분위기나 다국적기업 의존도의 기술, GLC 중심의 국내 사업구조 때문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국내 민간 기업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잉여를 해외의 저금리 상품에 투자하거나 가치 평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해외자산을 매입하는 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민간 기업인이 위험자본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GLC의 민영화도 고려해 민간기업인들이 경영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민간기업인을 육성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인의 창의력이 살아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직접 관리하기보다는 관찰자로서 떨어져 지원하는 정도에 그칠 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