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수전 요원(UDT) 훈련, 공동묘지 담력 키우기, 번지점프, 뱀 소굴 탐방, 낙하 훈련…. 영화 ‘실미도’에 등장하는 북파 간첩 전문 훈련 프로그램이 아니다.
-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무려 28년간 세계 최정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 양궁 대표팀의 독특한 훈련 프로그램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타고난 카리스마로 선수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독한 훈련을 시켜 한국 양궁의 오늘을 있게 한 주인공이 다름 아닌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다.
한국 양궁이 처음 금메달을 딴 것은 대표팀을 올림픽 무대에 첫 출전시킨 1984년 LA 올림픽에서다. 당시 서향순 선수가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딴 후 이제까지 양궁 대표팀은 무려 19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여자양궁 대표팀은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올림픽 여자 단체전을 무려 7연패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는 오진혁 선수가 남자양궁 개인전에서 우승하며 28년 ‘노 골드(No Gold)’의 한도 풀었다.
한국 양궁이 세계 정상의 위치를 무려 30년 동안 굳건히 지키면서 다른 나라의 견제도 날로 심해지고 있다. 런던 올림픽의 개인전 방식이 점수 총합산제에서 세트제로 바뀌었듯 세계양궁협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경기 규칙을 개정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양궁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자 각국 양궁 팀에서는 ‘한국인 지도자 모시기’ 붐이 일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 출신 양궁 지도자가 한국 양궁의 최대 적수가 되는 기현상도 빚어졌다.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40개국 중 12개국의 감독이 한국인이라는 점,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기보배 선수와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멕시코 아이다 로만 선수를 조련한 사람이 한국 출신의 이웅 감독이라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 대표팀은 이에 굴하지 않고 런던 올림픽에서 다시 3개의 금메달을 가져오며 ‘양궁 강국’임을 다시금 입증했다. 날로 심해지는 견제,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규칙, 전 세계 선수의 상향평준화 속에서 딴 금메달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값지다.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기에 한국 양궁은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30년간 세계 정상의 위치를 지키고 있을까.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 뒤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현재까지 대표팀 코치, 감독, 대한양궁협회 임원 등으로 일하며 “독종 중 독종” “곁에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는 평가를 들어온 서거원(56)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 겸 계양구청 양궁팀 감독이 있다.
서 전무는 일각에서 한국 양궁의 성공을 타고난 기질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 민족이 동이족(東夷族), 즉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서 양궁에서 승승장구하는 게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과 치밀한 전략의 결과 오늘날의 성공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넘치는 카리스마와 불같은 추진력으로 ‘서칼’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서 전무의 리더십 비결을 탐구해보자.
축구선수, 19세에 처음 활 잡다
서 전무는 1956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각종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내던 그였지만 정작 그가 활을 잡은 것은 만 열아홉 살이던 1975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양궁은 전문적인 스포츠라는 평가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정신 수양을 위한 취미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선수층도 매우 얇았다. 당연히 국제대회에서 특출한 성적을 거두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양궁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젊을 적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그는 활만 잡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양궁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바로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늦깎이 양궁선수였지만 1977년 처음 출전한 전국 대학부 종별 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준우승의 주역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1978년 국내 최초의 양궁 실업팀인 삼익악기 양궁팀에 무난히 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궁선수로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국산 활이 아닌 외제 활만 사용하던 시절이라 장비도 고가였고, 그나마 몇 달씩 기다려야만 새 장비를 만질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인기 종목도 아니라서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양궁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의 귀에 반대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1985년 그는 선수 생활을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운동선수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존재하는 요즘에는 만 스물아홉 살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에게 서른이란 환갑이나 다름없는 나이였다. 그 역시 선수 생활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선수를 하느냐”는 주변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한 지도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직후 국가대표팀 코치가 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처음 남자양궁 대표팀 감독에 올랐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며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여자선수들이 1984년 LA올림픽에서 이미 금메달을 획득하고 정상에 올랐던 것과 달리 남자선수들의 성적은 여자선수들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양궁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지 못한다면 향후 남자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끊길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스포츠 심리학에 심취하다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한국 남자양궁의 미래는 물론 자신의 지도자 인생도 끝날 수 있는 위기상황은 역설적으로 서 전무의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그는 선수들이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일일이 기록하며 엄청난 훈련을 시켰다. 선수들은 물론 그 자신도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힘든 훈련을 거듭하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에서 남자양궁 대표팀은 단체전 금메달을 땄고, 개인전에서도 아쉽게 금메달은 놓쳤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휩쓴 여자대표팀에 뒤지지 않는 성적이었다. 이때부터 한국 양궁이라면 항상 여자 양궁만 거론되던 분위기도 달라져 남녀 대표팀 모두 세계 정상임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 서 전무는 올림픽에서 우승한 초보 감독이라는 유명세 외에 또 다른 유명세를 탔다. 바로 그가 스포츠심리학을 양궁에 접목한 최초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정신건강 관리나 스포츠심리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았던 1980년대 당시 서 전무는 사람들 눈에 꽤나 기이한 지도자로 비쳤다. 선수들과 같이 양궁 연습장에서만 살아도 모자랄 판에 태릉선수촌 스포츠과학연구소 건물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286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서 전무는 사비로 컴퓨터를 장만했다. 동료 지도자들 대부분은 운동 감독이 왜 비싼 돈을 들여 컴퓨터를 장만하느냐며 그를 만류했다. 그는 컴퓨터를 배울 곳이 없어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연구원이 많은 태릉선수촌 스포츠과학연구소를 처음 찾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스포츠심리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연구원들을 괴롭히면서 컴퓨터 다루는 법을 익힌 서 전무가 286컴퓨터로 한 일은 선수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었다. 개별 선수의 성적, 특성, 훈련 일지 및 결과, 그에 따른 통계 등 선수관리를 위한 모든 것을 컴퓨터에 입력해 데이터베이스(DB)로 만들었다. 대다수의 지도자가 관련 기록을 일일이 종이에 손으로 쓰고 그리던 시절, 서 전무의 이런 시도는 혁명에 가까웠다.
서 전무가 스포츠과학연구소를 드나들기 시작할 때 연구소와 태릉선수촌 사람들 모두 그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연구소 쪽 사람들은 “운동선수가 심리학의 ‘심’자를 알겠느냐”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태릉선수촌 쪽 사람들은 “양궁이나 잘할 것이지 먹물 냄새나는 샌님들하고 어울려서 뭘 하겠느냐”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연구소를 줄기차게 찾았다. 스포츠심리학의 기본을 배우고, 단계별 심리 훈련을 도입했다. 그 덕에 선수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됐음은 물론 지도자로서 그 자신의 시야도 훨씬 넓어졌다.
기약 없는 실업자 생활
서울올림픽에서 선전한 이후 서 전무는 승승장구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남자대표팀 감독을 맡아 보란 듯이 금메달을 따냈다. 특히 히로시마에서 한국 양궁팀은 전 종목 금메달 석권 및 세계 최고기록 수립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시아 경기대회가 끝나자마자 당시 그가 실업팀 감독으로 있던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 작업에 들어가 1994년 12월 말 정식으로 해체됐기 때문이다. 1978년 선수로 입사해 16년간 선수 겸 감독으로 있던 팀이 해체된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삼익악기 소속 선수는 총 6명으로 이 중 2명이 국가대표팀 선수일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이 때문에 서 전무는 새로운 실업팀 창단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무모하게도 국가대표 감독직을 반납하기로 했다. 자신은 삼익악기 팀이 해체돼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월급이 끊기고 졸지에 오갈 곳이 없어진 선수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던 선수들을 저버리느니 당분간 힘들더라도 실업팀을 다시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비인기 종목인 양궁 실업팀을 창단하려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기업을 찾아다녔지만 선뜻 팀을 만들겠다는 기업은 없었고, 그간 모아뒀던 돈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세 명의 자녀를 둔 서 전무 가족의 기본 생활비, 팀 창단 섭외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은 예상외로 엄청났다.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되면서 받은 퇴직금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약간의 저축과 유산,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받은 포상금으로 샀던 땅까지 다 팔아야만 했다. 이것도 모자라 당시 거주하던 넓은 아파트를 팔고 다섯 식구가 6500만 원짜리 작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신용카드 돌려막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가 이어졌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와 선수들은 동지애와 의리 하나로 버텼다. 팀이 없어졌다고 활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선수들은 계속 대회에 출전해야만 했다. 숙소가 없어 다른 팀 숙소를 임시로 빌려 쓰고, 때로는 샤워장도 없는 중고교생의 숙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된 지 1년 반 만인 1996년 5월 인천 계양구청이 양궁팀 창단을 발표했다. 만 1년 반 동안 서 전무와 함께 고생하던 선수 6명이 그대로 계양구청 선수가 됐다. 국가대표 선수가 2명이나 포함되어 있는 팀이 1년 반 동안 월급 한 푼 받지 못하고 고생했지만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새 팀을 꾸린 것이다.
서 전무는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맛본 시절이었지만 지도자로서 나 자신을 한 단계 올려놓은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이 선수들을 믿고, 선수들이 자신을 믿지 못했다면 폭풍우를 만나고서도 모두 함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당시 서 전무와 동고동락한 선수들은 이제 한국 양궁을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번 런던 올림픽 남자대표팀을 맡은 박성수 코치. 1988년 서울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및 개인전 은메달을 딴 박 코치는 서 전무와 20년 넘게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선수 시절부터 다른 팀에서 “더 많은 돈을 줄 테니 우리 팀으로 오라”는 스카우트 제의가 빗발쳤지만 이를 거부하고 서 전무 옆에 남았다.
번지점프로 따낸 아테네 신화
서 전무에게 지도자 인생의 황금기를 가져다준 올림픽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다. 서 전무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녀 선수단을 총괄하는 대표팀 총감독을 맡아 남녀 단체전 금메달, 여자 개인전 금·은메달을 휩쓰는 좋은 성적을 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올림픽을 앞두고 서 전무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팀의 성적을 모두 신경 써야 했기에 남자대표팀만 맡았던 과거보다 성적에 대한 압박이 훨씬 심했다. 이에 아테네 올림픽을 두 달 앞두고 그는 다른 감독 및 코치진까지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든 놀라운 일을 감행했다.
올림픽 두 달 전 그리스를 찾은 서 전무는 한국 남녀 대표팀 6명을 아테네 근처 코린트 운하로 데려갔다. 코린트 운하는 폭 45m, 깊이 120m에 길이가 6km가 넘는 좁고 긴 운하다. 폭이 좁아서 운하 벽이 상할까봐 배들은 모두 무동력으로 운행하며 예인선이 배를 끌고 간다. 에게 해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거센 이곳에는 절벽과 절벽을 잇는 조그마한 다리가 있다. 바로 이곳에 번지점프대가 있다. 줄 길이가 무려 95m로 다리 위에서 절벽을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다.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서거원 전무.
당연히 선수들은 기절초풍했다. 까마득한 높이, 조금만 삐끗해도 절벽에 부딪혀 온몸이 산산조각날 것 같은 좁은 너비, 서 있기도 힘든 거센 바람과 직면한 선수들은 벌벌 떨었다. 이에 굴할 서 전무가 아니었다. 그는 “너희만 번지점프를 시키려고 이 먼 곳까지 너희를 데려온 줄 아느냐. 나부터 뛰어내리겠다”며 95m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그 역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지만 ‘지도자인 내가 핑계를 대고 뛰어내리지 않으면 어떤 선수가 나를 믿고 따라오겠느냐’는 생각에 죽기를 작정하고 뛰어내렸다.
다음은 선수들 차례. 순서를 정해주지 않고 남녀 선수를 통틀어 먼저 뛰고 싶은 사람부터 뛰게 했다. 서 전무가 “누가 먼저 뛸래?”라고 물었을 때 1번으로 나선 건 여자 대표팀의 박성현 선수였다. 박성현 선수는 “감독님. 저요. 잠시 후 뵙겠습니다”라는 씩씩한 말을 남긴 채 순식간에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지켜보던 다른 선수들이 더 놀랐다. 이후 이성진 선수가 두 번째, 세 번째가 바로 윤미진 선수였다. 남자 선수들은 여자 선수들에 이어 번지점프를 했다.
공교롭게도 뛰어내린 순서대로 성적이 나왔다. 가장 먼저 뛴 박성현은 여자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땄고, 두 번째로 뛴 이성진은 은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시드니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였던 윤미진은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여자 선수들보다 뒤늦게 번지 점프를 한 남자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 선수 3명은 단 한 명도 개인전 메달을 따지 못하고, 단체전에서만 금메달을 땄다. 후일 박성현 선수는 “절벽을 쳐다보기만 해도 무서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먼저 뛰어내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좋은 성적이 나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 전무는 절벽 번지점프의 순서가 실제 올림픽 성적과 일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95m 높이의 절벽에서 남자 선수보다 먼저 뛰어내린 여자 양궁 대표팀 선수들의 성적이 그간 남자 대표팀의 성적을 압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주어진 과제와 목표를 대할 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하는 사람과 부정적이고 수동적으로 임하는 사람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는 것.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고 적극적으로 하는 게 성과 향상과 직결된다는 의미다.
서거원 리더십이 경영자에게 주는 교훈
① 발상 전환하면 못 오를 산 없다
해발 8848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를 인류 최초로 등정한 사람은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卿)이다. 그는 1953년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한국인 최초로 등정에 성공한 사람은 고(故) 고상돈 씨로 힐러리 경이 성공한 뒤 24년 만인 1977년 세계에서 58번째로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24년 동안 58번째라면 1년에 약 2명꼴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계산악연맹은 2005년부터 정상 정복자의 숫자를 세지 않고 있다. 한 해에도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정상을 밟는 바람에 집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유다. 과거 24년간 1년에 2명꼴에 불과하던 정상 정복자가 왜 이렇게 늘어났을까? 최첨단의 혁신 장비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덕도 있지만 발상의 전환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즉 힐러리 경이나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던 시절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해발 20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꾸렸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무려 7000m에 가까운 먼 거리를 엄청난 고난을 극복해가며 등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발 67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모든 장비를 그곳에 갖다놓은 뒤 정상 정복을 시도한다. 즉 마지막 2000m만 올라갔다 오면 끝나기 때문에 그 어렵다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수많은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
서 전무는 지도자라면 산악인들이 실시한 이 발상의 전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새로운 훈련 방식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최초로 스포츠심리학을 적용하고, 공동묘지 산행, 유격훈련, 번지점프 등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훈련방법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아무리 새로운 훈련방식을 개발해 극비리에 시행한다 해도 외국 지도자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내 바로 따라 한다. 결국 5개월쯤 지나면 다른 나라가 한국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훈련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 5개월간 한국 대표팀은 전과 다른 새로운 훈련 방식을 개발해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정상에 서길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 전무는 발상의 전환을 이뤄내면 양궁이 비인기 종목이라는 고정관념도 탈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양궁이 비인기 종목인 이유에는 양궁 경기장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있어, 관중이 양궁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양궁장을 하나 만들려면 최소 2만 평(약 6만 6000㎡) 정도의 공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양궁장이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서 전무는 대중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원망하기 전에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지방이 아닌 시내에서 양궁 경기를 치러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그가 몇 년간 줄기차게 주장한 끝에 2008년 7월 베이징 올림픽을 2주 앞두고 서울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앞에서는 사상 최초로 양궁 경기가 치러졌다. 시내 한복판에서 경기가 열린 덕분에 많은 관중이 모였고, 이들은 선수들이 활을 쏠 때마다 탄성을 지르며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선수들 역시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치렀기에 굳이 소음 대비 훈련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일각에서는 양궁 대표팀의 훈련이 이벤트에 치우친 것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 전무는 마지막 한 발에 메달이 왔다갔다 하는 양궁의 특성상 결정적 순간에 실수를 줄이고, 선수 기량의 120%를 발휘하게 만들어주는 창의적 훈련, 그런 발상의 전환을 끊임없이 시도하지 않았다면 한국 양궁의 신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의문을 제기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는 지도자가 진정한 리더라고 말하는 이유다.
② 철저한 공정성만이 인재 살린다
흔히 한국 양궁대표팀 선발전을 통과하기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사실 스포츠계에서는 파벌 때문에 종종 문제가 일어난다. 쇼트트랙 등 일부 종목에서는 파벌 문제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 때부터 잡음이 이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양궁은 다르다. 한국의 모든 스포츠 종목 중 거의 유일하게 파벌이 없으며, 선수 선발전에서 잡음이 없는 종목이 바로 양궁이다. 서 전무는 이런 시스템의 공정성이 조직원에게 꿈을 부여하고, 평범한 조직원도 인재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강조한다.
올림픽 대표팀은 보통 열 달 동안 열 번 정도 경기를 치러 남자 3명, 여자 3명의 대표팀 선수를 선발한다. 이 3명 안에 들어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양궁협회는 먼저 대표선발전에 참가할 선수 100명을 선발한다.
이때 전형적인 다면평가가 이뤄진다. 1차전은 체력훈련을 열심히 한 사람이 합격하도록 만들고, 2차전은 정신력, 3차전은 담력, 4차전은 집중력, 5차전은 승부근성, 6차전은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 7차전은 극기력, 8~10차전은 실제 현장에 투입됐을 때 국제대회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검증하는 식이다. 때로는 기상대에 전화를 걸어 태풍이 올 가능성이 높은 날짜에 일부러 경기 일정을 잡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이 10번의 평가가 매 차전이 끝날 때마다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차전에서 36명이 떨어지고 64명을 선발하면 2차전에서는 1차전 기록이 완전히 무시된다. 살아남은 64명을 32명으로 추리고, 이 32명을 16명으로 추릴 때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체력은 좋지만 담력이 약한 선수,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뛰어나지만 극기력이 부족한 선수 등 어느 한 부분이 부족한 선수는 절대 좁디좁은 대표팀 선발 문턱을 통과할 수 없다.
서 전무는 “기존 성적을 누진해서 최종 평가에 반영하면 공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과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우선권을 주면 나머지 선수들이 ‘나도 얼마든지 실력만 갖추면 된다’는 식의 동기부여를 하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선수 선발전에서는 과거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한 선수가 막판에 탈락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여름날 실시된 경기에서 이 선수는 마지막 발을 쏘지 못해 0점을 얻었다. 천둥번개가 “콰쾅”하고 몰아치는 시점에 활을 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은 천재지변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냐, 다른 선수도 아니고 한국 양궁의 간판선수인데 한 번 더 발사하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양궁대표팀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서 전무는 “한국 양궁이 30년간 세계를 제패하는 동안 제아무리 뛰어난 금메달리스트라 해도 개인전 2연패를 한 적이 없다. 고정된 한 두 명의 스타에 의존하지 않고 비슷비슷한 실력을 갖춘 선수 중 최고만을 뽑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양궁이 늘 정상을 놓치지 않지만 매번 새로운 얼굴을 통해 정상을 정복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1위를 차지하기 어렵지만,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1위를 할 수 있는 시스템, 그가 “실력과 원칙에 의한 공정한 선수 선발이 오늘날의 한국 양궁을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③ 10년 후 내다봐야 진짜 리더
앞서 언급한 대로 세계양궁협회는 30년간 독주하는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 방식을 수시로 바꾸고 있다. 특히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 모두 한 발에 승패가 엇갈리는 세트제로 바뀐 런던 올림픽에서는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못 딸 수도 있다는 전망이 많았다.
그럼에도 한국이 오랫동안 독주한 이유는 뭘까. 바로 서 전무를 비롯한 양궁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변화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양궁협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4년 뒤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경기 규칙을 여러 개 연구했고, 단체전 경기가 세트제로 바뀔 것이라는 예상도 여기 포함돼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 8개월을 앞둔 2007년 12월 세계양궁연맹이 베이징 올림픽 경기방식을 발표했다. 당시 바뀐 4가지 방식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직후 대한양궁협회가 예측했던 내용과 동일했다. 서 전무는 “외국 선수들은 불과 8개월 동안 바뀐 경기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 하지만, 우리는 4년 전부터 새로운 경기 방식을 준비해왔다. 리더에게 통찰력과 예측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서 전무는 이렇듯 치밀한 준비와 예측도 실전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표적 예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단식 결승전이다. 박성현 선수와 중국 장쥐안쥐안 선수가 맞붙은 결승전 당시 중국 관중은 우리 선수가 활을 쏠 때마다 호루라기를 불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비신사적인 행위를 거듭했다.
스포츠 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서 전무는 이것까지 예측하지 못한 게 지도자 인생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고 밝혔다. 소음 훈련을 수없이 거듭 해왔지만 발사 순간에 일어나는 소음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박성현 선수가 불과 1점 차이로 중국 선수에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책하는 서 전무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어떻게 한국 양궁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았는지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서 전무는 “흔히 일본을 가리켜 디테일(detail)에 강한 나라라고 하지만 양궁에서만큼은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의 디테일’을 갖추고 있다. 다른 나라는 상상도 못하는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게 한국 양궁의 장점인데 이 ‘한국 양궁=디테일’의 공식이 베이징에서 무너져 한이 맺혔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없어야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따뜻한 독종 : 세계 양궁 1등을 지킨 서거원의 승부 전략’(서거원, 2008,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