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토미 아마커 하버드대 농구팀 감독

꼴찌 하버드 최고팀 만든 뚝심의 지도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10-23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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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학농구에서 만년 하위 팀이던 하버드대 농구팀이 올해 3월 그간 꿈으로만 여기던 미국 대학농구(NCAA)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지난 66년간 한번도 이루지 못하던 NCAA 챔피언십 토너먼트 진출을 이끈 이는 3년 전 사령탑을 맡은 흑인 감독 토미 아마커다. 농구 명문으로 유명한 미국 듀크대의 포인트가드 출신인 그는 하버드대 농구팀을 맡아 원칙주의와 고강도 훈련으로 꼴찌 팀의 체질을 싹 바꿔놓았다. 아마커 감독은 올해 미국 프로농구(NBA)에 황색 돌풍을 일으킨 대만계 미국인 제레미 린을 휘하에 두고 그의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토미 아마커 하버드대 농구팀 감독

    만년 약체였던 하버드대 농구팀의 돌풍을 이끌고 있는 토미 아마커(왼쪽) 감독이 경기 중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하버드대와 꼴찌라는 단어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뭐래도 하버드대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대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포츠 세계에서는 다르다. 스탠퍼드대, 듀크대 등 미국 내 다른 명문대와 달리 하버드대에는 스포츠 장학금이 없다. 당연히 스포츠팀 선수들의 기량도 다른 대학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일부 운동 유망주가 바늘귀보다 좁은 입학 관문을 뚫고 하버드대에 들어가더라도 하버드대의 까다로운 학사 과정을 밟아가며 엘리트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하버드대는 오랫동안 미국 대학농구(NCAA·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에서 꼴찌 팀이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올해 3월 세계 농구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하버드대가 1946년 이후 무려 66년 만에 ‘3월의 광란’으로 불리는 미국 대학농구 ‘NCAA 챔피언십’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NCAA에는 65개 팀이 출전할 수 있다. 언뜻 대단치 않아 보이는 성과지만 다른 대학의 농구 팀이 사실상 프로 입단을 앞둔 선수로 이뤄져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아마추어가 프로팀과 겨루는 무대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골프로 치자면 퀄리파잉 스쿨을 통과하지도 못한 아마추어 골퍼가 PGA 투어 대회에서 톱10의 성적을 낸 것과 마찬가지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버드대는 올해 미국 동부지역의 8개 명문대학을 지칭하는 ‘아이비리그’ 농구팀 대전에서 지난해 공동 우승에 이어 올해는 단독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까지 달성했다. 하버드대가 남자농구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하버드의 34개 운동종목 중 유일하게 남자농구팀만 아이비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 운동선수 장학금제도가 없어 사실상 아마추어 팀이나 다름없는 하버드대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뭘까. 바로 ‘하버드대의 공부벌레’들이 코트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독려한 명장이자 이 학교 최초의 흑인 감독인 토미 아마커(48)가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아이비리그에서 흑인 감독인 그가 일궈낸 성공 비결을 분석해보자.

    어릴 때부터 농구 재능이 남달랐던 토미 아마커는 1965년 미국의 행정수도 워싱턴 DC와 가까운 버지니아 주의 폴스처치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 고등학교의 영어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농구에 두각을 나타낸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아마커는 1988년 듀크대 졸업 후 프로 진출 대신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택했다. 그는 모교인 듀크대에서 자신을 키운 은사(恩師) 마이크 슈셉스키(Mike Krzyzewski) 듀크대 감독 밑에서 코치를 맡기로 했다. 슈셉스키 감독은 1980년부터 무려 32년간 듀크대 감독으로 재임하며 듀크대를 미국 대학농구의 최고봉으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슈셉스키 밑에서 차근차근 지도자 수업을 받은 그는 1997년 뉴저지 주 시튼홀대학의 감독으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시튼홀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아마커는 2001년 농구 명문인 미시간대 감독으로 뽑혀 미국 농구계의 명장으로 도약할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2007년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의한 곳이 바로 하버드대였다.

    공부와 농구, 두 마리 토끼 잡기

    아마커가 처음 하버드대로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이 모두 말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듀크대나 미시간대와 달리 하버드대 농구팀은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은 “하버드대에도 농구팀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실상은 더 나빴다. 아마커가 하버드대에 부임했을 때 선수들의 실력은 들쑥날쑥했고 고참 선수들은 사실상 태업에 가까운 불성실한 훈련 태도를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실력 있는 유망주가 들어온다 해도 주전으로 뽑히기가 어려웠다. 아마커는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를 기용하는 원칙주의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농구팀을 대대적으로 쇄신하기 위해 고학년 대신 저학년 중심으로 팀을 꾸렸다. 고학년 선수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농구를 못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유례없이 강도 높은 훈련 프로그램도 실행했다. 훈련시간을 2배로 늘려 선수들의 입에서 저절로 단내가 나도록 했다. 가능성 있는 선수를 찾아나서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포츠 장학금이 없는 하버드대에서 그가 홀로 유망주를 발굴하려고 몸을 사리지 않다보니 문제까지 발생했다. 아마커는 2008년 NCAA의 선수 스카우트 관련 규칙 위반으로 구설에 휘말렸다가 무혐의 처분을 받는 곤욕도 치렀다. 부임 초 학업 부담을 느끼며 반발했던 선수들도 ‘공부와 농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며 독려하는 아마커 감독의 말에 자신감을 얻으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꼴찌 팀의 반란

    토미 아마커 하버드대 농구팀 감독
    변화의 결과물은 곧 나타났다. 아마커가 부임하기 직전인 2006년 하버드대는 NCAA에서 아이비리그 8개 대학 농구팀 중 6위를 차지했다. 부임한 첫해인 2007년에는 2006년보다 성적이 더 떨어져 7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7년 첫해에도 하버드대 농구팀은 강팀을 연파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아마커는 하버드대 감독 부임 후 8번째 경기에서 자신이 6년간 몸담았던 미국 대학농구계의 강팀 미시간대를 격파하며 가능성을 입증했다. 고된 훈련과 공정한 선수 선발의 효과가 더해지자 하버드대 농구팀의 성공 속도는 더 빨라졌다. 2008년에 14승14패로 첫 5할 승부를 달성한 뒤, 2009년에는 13승3패로 아이비리그 3위에 올랐다. 당시 하버드 농구팀에서 ‘공격의 핵’으로 활동한 선수가 2011~2012시즌 미국 프로농구(NBA)에 혜성같이 등장한 포인트가드 제레미 린(24)이다. 린은 아마커 감독에 대해 “아마커 감독은 진정한 리더”라며 “하버드대의 모든 선수가 감독을 믿고 따랐다”고 평가한 바 있다. 2011년에는 그 여세를 몰아 프린스턴대와 아이비리그 대전 공동 우승까지 차지했다. 당시 NCAA 챔피언십 진출권을 놓고 벌인 단판 승부에서 프린스턴대에 비록 아깝게 패했지만 하버드대팀 창단 이후 최초의 우승컵을 안았다는 점에서 지도자 아마커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올해 꿈에 그리던 하버드대팀의 아이비리그 대전 단독 우승 및 NCAA 챔피언십 진출까지 이뤄냈다. 하버드대의 선전은 스타 선수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땀으로 우승을 일궈냈다는 점에서 더 값지다. 하버드대 농구팀 선수는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게다가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세계 최고 공부벌레’들인 하버드대 동급생들과의 학업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올해 초 하버드대가 NCAA 챔피언십 진출을 확정짓던 날 하버드대 농구팀 주장인 올리버 맥날리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쓰느라 밤을 새워야 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다.

    제레미 린의 프로 입문 지원

    하버드대 출신의 대만계 미국인인 제레미 린은 2011~2012시즌 뉴욕 닉스에서 포인트가드로 활동하다 최근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했다. 그는 시즌 중반 주전 선수의 대체 선수로 출전했다가 폭발적인 득점 능력과 다채로운 개인기를 선보이며 린 신드롬을 일으켰다. 하버드대의 공부벌레가 일약 NBA의 슈퍼스타로 떠오른 셈이다.

    린이 가세하기 전 올해 뉴욕 닉스의 성적은 8승15패로 매우 부진했다. 연봉 1800만 달러 이상을 받는 두 명의 슈퍼스타 카멜로 앤서니, 아마리 스타더마이어를 확보하고도 거두지 못했던 성적이다. 하지만 2월 초 린이 가세한 후 뉴욕 닉스는 8승2패의 성적을 거뒀다. 린은 주전으로 출장한 경기에서 평균 20점이 넘는 득점을 올리고, 10점에 가까운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의 인기가 워낙 대단했기에 그의 이름 린(Lin)과 광기(Insanity)를 합친 ‘린새니티(Linsanity)’, 린과 신데렐라(Cinderella)의 합성어인 ‘린데렐라(Linderella)’ 같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하는 선수인 린이 왜 2011~2012시즌 개막이 아닌 20경기를 치른 뒤에야 등장할 수 있었을까. 아시아계 선수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다. 즉 ‘아시아계 선수가 농구를 잘해봐야 얼마나 하겠어’라는 선입관이 프로팀 지도자로 하여금 린의 잠재된 능력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런 린의 성공을 뒷받침한 사람이 바로 아마커 감독이다. 프로팀의 관점에서 보면 하버드대 농구팀 선수들은 아마추어나 다름없다. 당연히 하버드 출신으로 NBA에 진출한 선수도 극히 드물다. 하버드대는 무려 5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이 학교 출신 NBA 선수는 린을 포함해도 고작 4명뿐이다. 게다가 린 이전에 NBA에 진출한 마지막 선수는 무려 60년 전인 1954년에 졸업한 에드 스미스였다.

    이런 분위기 탓에 린 역시 2010년 여름 하버드대를 졸업했을 때 NBA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이에 아마커 감독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 위치한 프로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팀 코치진에게 린을 적극 추천했다. 오클랜드가 린의 고향인 팔로알토의 바로 옆에 위치한 도시이므로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그 누구보다 성실한 선수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록 린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뉴욕 닉스로 옮긴 후 대박을 터뜨리긴 했지만 아마커 감독의 강력 추천이 없었다면 프로팀에 입단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커 리더십의 교훈

    ① 고정관념 버려야 보석 찾는다


    “비바람이 거센 밤에 당신이 마차를 몰고 길을 지나가고 있다. 비를 맞으며 길가에 서 있는 세 사람은 당신이 그들을 하루속히 마차에 태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사람은 목숨이 위중한 노인, 다른 한 사람은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은인, 마지막 한 사람은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여인이다. 마차에 단 한 명만 태울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를 태우겠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의 천하통일을 이뤄낸 조조가 천하의 인재를 선발하면서 지원자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지원자 대다수는 한 가지 답만 했다. 노인을 고른 사람들은 ‘그대로 두면 노인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귀중한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명의 은인을 택한 지원자는 ‘은인에게 보답할 기회를 놓친다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태우겠다는 사람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조조가 이들의 대답에 모두 실망하고 있을 때 볼품없이 생긴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생명의 은인으로 하여금 마차를 몰게 해 어서 노인을 의사에게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여인과 여기 남아 마차가 돌아오기를 가다리겠습니다.” 조조는 그제야 탄복하며 “나보다 더 똑똑한 참모를 만났다”고 기뻐한다. 이 젊은이가 바로 조조가 가장 아낀 일급참모 곽가(郭嘉)다. 이후 곽가는 조조 곁에서 그의 수족으로 활동하며 천하통일의 기틀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일화는 리더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는 흑백논리나 양자택일의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대부분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 경직된 사고만 하다보면 결코 남을 뛰어넘는 성과를 낼 수 없다. 남이 모두 ‘누구를 마차에 태울 것인가’를 고민할 때 청년 곽가는 ‘자신이 차에서 내린다’는 새롭고 신선한 발상으로 고정관념의 틀을 깼다.

    만약 아마커 감독이 다른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아시아계 선수라는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린을 평가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올해 초 전 세계를 강타했던 린 돌풍이나 꼴찌 하버드팀의 기적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리더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다.

    ② 공부와 운동 모두 잘할 수 있다

    대학팀 운동선수에게 학업에 소홀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은 미국식 대학 교육만이 가진 장점이다. 운동 특기생에게 스포츠 장학금을 주지 않는 하버드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장학금을 주는 상당수 다른 대학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특히 프로팀 입단이 예정됐거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의 표적이 된 선수들은 사실상 대학 때부터 프로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커 감독은 스포츠 장학금을 주는 듀크대를 나왔지만 학생 때부터 공부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듀크대 경제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듀크대 코치로 활동할 때는 세계적인 명문 비즈니스스쿨인 듀크대 후쿠아 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하버드대 감독으로 부임한 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버드대 법대 교수나 유명 기업인들과 사회 현상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모임에 열심히 참가했다. 이런 아마커 감독이기에 올해 초 그의 휘하에서 하버드대 농구팀의 우승을 이끈 주장 올리버 맥날리가 ‘시합 때도 리포트를 쓰느라 바빴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아마커 감독이 갈고닦은 ‘공부하는 운동선수’의 길은 ‘한국에서는 왜 제레미 린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제레미 린의 키는 불과 191cm다. 요즘에는 어지간한 한국 농구 선수들의 키가 이보다 더 크다. 키가 무려 221cm인 하승진 선수도 압도적인 신장을 갖췄음에도 NBA 도전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 한국계 제레미 린은 없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은 어려서부터 오직 운동에만 사로잡혀 산다. 농구 선수는 농구장에서나 존재감이 있을 뿐, 코트 밖을 나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실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게다가 항상 맞고 혼나면서 운동을 하다보니 주눅만 들어 있고 여유나 융통성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부상이라도 당해서 선수 생명이 갑자기 끝나면 그 다음부터 살길조차 막막하다.

    다른 선수들보다 체격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지 않은 린이 올해 돌풍을 일으킨 것은 그가 영리한 플레이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자기 혼자 공을 끄는 데만 급급한 흑인 선수들과는 달리 린은 공을 빼줄 줄도, 다른 선수들에게 넘길 줄도 안다. 영리한 플레이가 매우 인상 깊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말 그대로 뛰어난 두뇌와 오랫동안의 학습 및 고등교육이 뒷받침된 결과다.

    린이 성공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아시아계임에도 백인 상류사회로부터 강한 동질감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뉴욕 닉스의 열광적인 팬들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아이비리그 출신 백인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하버드대를 나온 린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며 각종 기념품을 사들였다.

    각각 감독과 선수로서 대성공을 이뤄낸 아마커와 린의 사례는 공부하는 운동선수가 왜 필요한지, 이들이 왜 다른 일반 감독이나 선수보다 더 우수한 성과를 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③ 리더는 돈보다 사명감 중시하라

    아마커가 더 돋보이는 점은 2011년 프린스턴대와 아이비리그 대전 공동우승을 차지한 이후 다른 농구 명문대학들로부터 줄기차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하버드대에 잔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플로리다 주에 있는 마이애미대가 하버드대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하지만 아마커 감독은 “지금은 하버드에 있어야 할 때다. 아직 하버드대 농구팀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지 못했다”며 돈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커의 이런 모습은 그의 은사(恩師)이자 미국 농구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대 감독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1980년부터 듀크대 감독을 맡고 있는 슈셉스키는 듀크대 농구팀을 이끌고 무려 세 차례나 NCA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미국 국가대표팀을 맡아 올림픽 금메달까지 땄다.

    ‘출전만 해도 우승’이라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미국 남자농구팀은 충격의 동메달에 그쳤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미국은 세계 최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베이징올림픽에서 마이크 슈셉스키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고,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을 따고 나서 감독 슈셉스키의 몸값은 더욱 치솟았다. 특히 프로농구의 명문 LA 레이커스로부터 무려 460억 원의 연봉을 제시받기도 했다. 하지만 슈셉스키 감독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25년 동안 사랑하고 인생을 같이한 학교를 떠날 수 없다. 듀크대 감독직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자리”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열성 팬들은 슈셉스키 감독에게 그의 성을 뜻하는 영어 대문자 K를 사용해 ‘코치 K(Coach K)’라는 애칭을 선사했다. 듀크대 역시 교내 실내 체육관의 이름을 ‘코치 K 체육관’이라고 붙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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