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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강제 징집당하던 그 날, 지팡이 짚고 배웅하던 마지막 모습|김영현

  • 글: 김영현 소설가·실천문학사 대표

강제 징집당하던 그 날, 지팡이 짚고 배웅하던 마지막 모습|김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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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나는 김구 선생처럼 둥근 안경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던 꿋꿋한 아버지의 모습에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유년시절부터 나의 든든한 바람벽이었다.
강제 징집당하던 그 날, 지팡이 짚고 배웅하던 마지막 모습|김영현

멋진 콧수염을 기른 아버지는 한약재 냄새 짙은 사랑방에서 손꼽히는 이야기꾼이었다.

1980년 겨울에는 눈이 많이도 내렸다. 그때 나는 강원도 최전방에 있는 포병부대에서 일등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날이 살벌한 조처로 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할 무렵이었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학내 사건으로 일 년 반 동안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왔던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5·18이 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에 있는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몇날 며칠 고문을 받으며 밤을 지새웠다. 짐승과도 같은 시절이었다.

그해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밤 전기가 나가서 어두컴컴한 벙커에 초를 밝혀두고 혼자 앉아 있는데 누군가 행정반에서 올라와 쪽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전보였다.

“김 일병, 안됐구먼.”

그의 말투 때문에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에 싸인 채로 전보를 열어보았다.



부고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나는 갑자기 막막한 공간으로 붕 떨어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잠겼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텅 빈 상태로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살벌한 감옥과 군대를 거치면서 나는 나의 감정들, 이를테면 슬픔이니 그리움이니 사랑이니 하는 모든 부드러운 감정을 호두처럼 단단한 껍데기 속에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었다. 출구 없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그러한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아버지의 訃告

나는 부고를 들고 벙커 밖 언덕으로 내려왔다. 검은 하늘에서는 쉴새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짐승처럼 거멓게 앉아 있는 강원도의 산이 보였다. 나는 방한모를 벗고 하염없이 어둠 속에 서서 눈을 맞았다. 그대로 얼어버린 채 눈사람이라도 되어버릴 생각이었다. 이윽고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한 틈새를 뚫고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아, 아버지!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엔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신과 관계된 주관적인 요소가 더 많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던 나로서는 더욱더 주관적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사십대 중반이 넘은 늦은 나이에 나를 보신 아버지는 내가 웬만큼 나이를 먹을 때까지 한시도 당신의 무릎에서 나를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이마에 움푹한 흉터가 있고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아버지는 경남 창녕 읍내에서 한의원을 하셨다. 담배 연기 자욱하고 한약재 냄새 짙은 사랑방은 언제나 뜨내기 손님, 동네의 할일 없는 늙은이, 이야기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좀 허풍기가 있고 목소리가 우랑우랑한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이야기꾼이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는 법이 없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튀어나오는 침이 온통 내 얼굴로 쏟아지고는 했다.

전쟁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사람 이야기로 넘쳐나던 그 속에서 나는 유년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의 친구인 풍수 영감에게서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의 중년에서 노년까지 느지막한 시기다. 아버지의 소년기와 청년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나중에 조금씩 들은 내용을 종합해 추론해보자면 대충 이러하다.

아버지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합병하던 1910년 경상남도 창원 땅에서 태어나셨다. 결코 부유하달 수 없는 시골 토반의 5남1녀 중 넷째였다.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서당을 다닌 덕분에 사람들은 아버지를 ‘서당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아버지(나는 얼굴도 모른다)가 빚 보증을 잘못 선 탓에 일가가 몽땅 야반도주를 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그때 아버지는 창녕읍에서 10리쯤 떨어진, 지금은 우포늪으로 유명한 합천 가는 길가 직교리라는 마을 한쪽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궁벽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다섯 남매를 남겨놓은 채로 첫부인이 돌아가셨다. 아마도 당시 유행했던 결핵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나서 한 해가 지난 뒤에 아버지는 열 살 아래인 새 아내를 얻으셨는데 그이가 우리 어머니시다. 어머니는 딸형제가 많은 시골 농가의 맏이로 무척 생활력이 강했고, 허풍쟁이인 아버지와는 달리 모든 일에 철저하고 민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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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영현 소설가·실천문학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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