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아버지의 따귀…“너는 달라야 한다”

  • 안병태 < 전 해군 참모총장·한국해양전략문제연구소 상임고문(현) > ptan@untel.co.kr

    입력2004-09-01 1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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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는 왜소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 있다.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정신적인 영향을 준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 아버지가 바른 자식을 낳는다. 아버지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아버지 像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각계 인사가 쓴 ‘나의 삶 나의 아버지’를 연재한다.<편집자>
    충청도 당진의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나는 교육면에서 대단한 행운아였다고 생각한다. 엄격하면서도 자유스럽게 대해주셨던 아버지, 송악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3년간 전인교육을 시켜주셨던 이종석 선생님, 남아의 자존심을 불어넣어 주셨던 예산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 구본하 선생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셨던 인천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김열함 선생님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의식을 갖고 걸어갈 길을 밝혀주셨던 함석헌 선생님을 차례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나의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분은 나의 아버지다. 내 일생 일대의 행운은 내가 그 분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나의 아버지(安重植)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한글은 어릴 때 스스로 깨쳤고 한문(漢文)은 통감(通鑑)까지 배우다 그만두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작은아버지(安德植)를 학교에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작은아버지께서는 학교에 갈 뜻은 세우지 않고 나무하러 갈 생각만 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무하러 나서는 작은아버지의 지게를 빼앗아 망치로 자근자근 부수었다. 이를 보신 할아버지께서는 “네 동생을 위해서 그런 줄 알고 용서하노라”라고 하셨다 한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 앞에서 담배는 피우지도 못하고 술도 돌아앉아 마시곤 했다. 작은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자 집에서 먹이던 송아지를 끌고 와서 “쟤 중학교 입학금 허세유” 하고 가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당시의 일을 떠올리시며 “형제간에도 참 쉽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언변 뛰어나고 결단력 있던 아버지



    당신께서는 아들 여덟에 딸 둘 도합 10남매를 두셨는데, 내 밑의 아들 둘은 일찍 잃으셨다. 한번은 아버지께 한문을 배우다가 왜 그만두셨냐고 여쭤보았다. 아버지께서는 “글자 몇 자를 가르쳐주고 5분이면 충분한 것을 하루 종일 외우라고만 하니 도무지 재미가 있어야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언변(言辯)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으셨다. 그리고 자기 의사를 딱 부러지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모자라고 의사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사진’이라고 불렀다. 사진같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가만히 있다는 뜻으로 아버지만의 독특한 표현법이다.

    아버지는 누이동생 계화가 언행이 분명하고 ‘아기뚱’하며(아버지가 잘 쓰시던 용어로 욕심이 많고 담이 크며 주제 넘은 태도가 있다는 뜻) 누가 뭐라 해도 제가 좋아하는 남자를 선택했다고 하여 좋아하셨다. 동생 병구가 어릴 때 동네 큰 아이한테 얻어맞고 돌아왔다. 힘이 부친 것을 안 병구는 큰 몽둥이를 들고 그 아이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치며 당장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 계시다가 성이 좀 풀린 동생을 불러 빵을 사주시고는 흡족해 하셨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 왕골로 방석을 만드셨는데, 나는 손으로 만든 방석 치고 그보다 더 잘 만든 것을 본 일이 없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께서 짜신 왕골 방석을 잘 보관하고 있다.

    어머니를 위해서 탕약 짜는 기계를 손잡이의 기울기까지 계산해가며 직접 만드셨다. 지금 보아도 참 잘 만든 기계인데 이것은 동생 병도가 보관하고 있다. 왕골 방석이나 탕약 짜는 기계 모두 우리집의 가보다. 형제들이 만날 때면 꺼내 보며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아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의 잔디가 죽었다고 속상해 하셨다. 동생 병도가 출근하면서 베갯맡에 돈을 놓고 갔더니 아버지는 그날 당장 사초(莎草)를 하고 오셔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동생 병덕이도 해군에 복무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병덕이의 성격이 너무 무르다며 좀 강해지도록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를 시키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병덕이는 지금 삼성전자에 근무하고 있다.

    아버지는 동생 병환이 귓병을 앓아 군에 못 가는 것을 아시고 매우 섭섭해 하셨다. 병환은 지금 자영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막내인 병도가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갈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갈 수 없다면 집에 와도 별 대우(待遇)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을 하셨다. “대우가 없을 것”이란 아버지의 표현은 엄중한 경고였다. 병도는 신체검사장에서 “군에 못 가게 되면 나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사람대접 못 받으니 재심해 주십시오”라고 사정사정하고, 별 쇼를 다한 끝에 겨우 갑종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는 육군 단기하사로 복무하였다.

    아버지는 인천으로 장사하러 다니셨다. 어린 맘에도 아버지가 안 계시면 불안하였다. 그러나 잠결에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을 알면 마음이 푹 놓이고 안심이 돼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회초리를 자주 드셨다. 한번은 꼼짝도 못하고 아버지의 회초리를 맞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저 녀석은 도망칠 줄도 몰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부모님이 은근히 도망치기를 바라시는 줄 알고 회초리를 치기 시작하면 냅다 뛰어 도망쳤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한 해 전 어느 가을 날 아버지는 시제(時祭)를 지낸 다음 제상에 차렸던 과일을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제일 좋은 과일이 모두 동네 아이들 차지가 되면 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주실까? 기대가 컸던 내가 아버지께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그 큰 손으로 별안간 나의 따귀를 후려치시는 것이었다. 나는 풀밭에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어디다 손을 내밀어? 다음-!”

    그때의 그 창피함이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끔 동무들 집에서 자고 다음날 바로 학교로 가곤 했다. 어떤 때는 이틀 연속 같은 집에서 자기도 했다. “미리 알리고 왔으면 반찬 좀 더 마련할 걸”하는 동무 어머니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째 날도 반찬은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가 그렇게 외박을 했건만 엄한 아버지는 찾지 않고 말씀도 없으셨다.

    초등학교를 당진군 송악면에서, 중학교를 예산에서 다니고, 인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는 형·누이·동생 등 일곱 남매를 어머니(이점례)께 맡기시고 나 하나만 데리고 인천으로 나오셨다. 아이들을 다 가르칠 수 없으니 선별해서 교육시키겠다는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우선 내가 선발되었던 것이다. 형이 매우 섭섭해 했다. 다음으로는 동생 병구(현 해군 준장)와 막내인 병도(현재 금형공장 경영)가 선발되었다.

    당신께서 딱히 말씀한 바는 없지만 교육받은 애들이 나머지 형제들을 도와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거점 확보 전략이다. 동네의 아버지 친구 분들께서는 그러한 아버지의 결단력을 나중에 매우 부러워하셨다.

    인천 숭의동에서 아버지와 같이 방 하나를 빌려 자취하며 고등학교 1학년을 다녔다. 아버지는 과자와 채소·과일을 리어카에 싣고 인근 동네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파셨다. 그런데 외상 장부는 만들지 않고, 거래 내역을 모두 외우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머리가 굉장히 좋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 맘속에 꽁하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어릴 적에 시제를 지내고 난 다음 과일을 나눠줄 때 왜 제 따귀를 때리셨어요?” 하고. 그리고 “동무네 집에서 자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찾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저에게 무관심했다는 뜻이 아닙니까?”라고.

    아버지는 10여 년 전 일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야 하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나는 네가 어디가 무얼 하더라도 크게 잘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데리고 살 여자일 수도 있다”

    우리 부자가 세 들어 살던 주인댁 최씨 아저씨네 큰딸이 숙명여대 1학년이었다. 아주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학생이었다. 나는 그녀가 우울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가 나에게 반말하는 것을 들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고 그녀는 대학생이니 나는 그녀의 반말을 아주 당연시했다.

    그날 저녁상을 물린 다음 아버지께서 엄하게 말씀하셨다. “너, 주인집 딸이 아까 반말할 때 왜 가만히 있었느냐? 네가 그 여자를 데리고 살 수도 있는 건데, 어디다 반말을 하느냐고 따졌어야 할 게 아니냐?”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데리고 살 수도 있는 여자라는 말씀은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 세상 이치를 조금 알 때까지도 아버지의 말씀은 안개 속에 있었다. 어리석은 연작(燕雀)은 대붕(大鵬)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숭의동 생활을 끝내고 수도국(水道局) 산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때도 자취를 했고 가난하기는 매일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궁색한 것은 크게 느끼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배다리시장에 가서 흰 고무신을 사오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했는데 그 고무신이 아버지 발에 조금 작았다. 아버지는 바꿔오라고 하셨다. 나는 갔다 오기 싫은 생각에 “좀 신으시면 늘어날 텐데요”라고 대꾸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정색을 하시더니 “나는 네 일이라면 지구라도 한 바퀴 돌 텐데…”라고 하셨다. 또 한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울림이 왔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내가 소위로 임관한 후 10여 년간 집안 생활비를 보탠 것을 매우 안쓰러워하셨다. 내 결혼이 늦어진 것이 그 때문이라고 여기셨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배를 타고 두어 달씩 출동을 나갔다 오고, 외국으로 두 번 유학을 다녀오느라 여자를 사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얘, 너는 지금 하늘이 와르르 쏟아져도 한쪽 손으로 떡 받치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그런데 그게 아녀, 성인(聖人)도 시속(時俗)을 따르라고 했어.”

    소령 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자와 사귀다 집으로 초대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했다. 사고와 행동이 자유스럽고 거침없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는 인사를 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지금도 할머니를 사랑하세요?”라고 물었다. ‘저런! 자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르는 어른들께 할아버지, 할머니라니? 아버지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려나’ 순간적이었지만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아가씨같이 젊은 때에는 사랑이라면 가슴이 쿵쿵 뛰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니야. 습관으로 사는 거여!”

    아아! 나는 감탄했다. 어느 철학자가 저런 답변을 내놓을 수 있으랴!

    지금의 아내를 부모님께 인사시켰을 때는 “얘, 쟤 생산할 수 있겠냐?”라고 하셨다. 뒤가 너무 가느다랗다는 말씀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못할 말이 없었다. 대단한 실례지만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고 아버지하고만 내 신상 문제를 상의한 적도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두 주 후인 1981년 1월21일 어머니를 따라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두 분을 내가 있던 따뜻한 진해로 모셨으면 더 오래 사셨을 텐데…. 나는 영원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먼저 가신 어머니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집을 떠나려 할 때 그때까지 감정을 보이지 않으시던 아버지께서 목놓아 우셨다. 평소에는 냉정하게 보였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깊이 아끼셨나 보다. 그러한 아버지를 장지에 모시고 간 게 나의 씻을 수 없는 불효가 되었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 다른 한 분은 장지에 모시고 가는 게 아니라는 걸 몰랐다. 선산(先山)이 있는 마을에 도착해 산에 올라가기 직전 아버지는 혈압으로 쓰러지셨다. 온양병원을 거쳐 수원 화티마병원에 입원하려고 내 등에 업혀 가실 때만 해도 정신이 있으셨다. 그러나 입원한 뒤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였다.

    며칠 후 아버지의 호흡이 곤란해지자 나는 기도 절개수술을 받으시도록 했다. 몹시 괴로워하셨다. 말씀은 못하셨지만 형제들의 말소리는 분별하실 수 있었나 보다. 내가 병상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를 불렀을 때, 아버지는 최후의 기력을 다해 엄지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이놈아, 아직도 철이 덜 들었냐.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나를 왜 이렇게 고생시키느냐’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런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계신데 나는 진해의 근무처를 오르내리는 바람에 임종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임종도 못했었는데….

    아버지는 나의 친구요 스승이셨다. 예산중학교에 들어간 해 아버지와 나는 여름 장마로 물이 불어난 영내다리 철길을 건너 오가면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철도 침목 밑으로 거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내다리 철교는 왜 그리 높은가. 현기증을 느끼며 다리가 후들거려 건너가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다.

    사관생도 둘 배출했다고 매일 태극기 게양

    이를 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일부러 철길을 수십 번 왕복하셨다. 탁류(濁流)에 굴하지 말고 학교를 다 마치라는 뜻이었다.

    나를 교육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아버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절대로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 나를 좋게 보시고, 사기를 올려주셨던 아버지. 지구를 몇 바퀴 도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하셨던 아버지.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벽이 없었다. 내가 버릇없이 굴어도 탓하지 않으셨다. 갑자기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해군 중위였던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아버지. 1969년 동생 병구가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사관생도 두 명을 배출한 집이라 하여 초가집이었지만 대나무로 국기 게양대를 높이 세우고 매일같이 태극기를 게양하셨다.

    1980년 미 해군대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선산에 같이 가자”고 하시는 것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며 듣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무라지 않으셨다. 선산에 가면 아버지가 틀림없이 “얘, 저 자리가 내가 갈 곳이다”라고 하실 터인데, 나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너무도 그립다. 아버지를 생각하다가 아찔한 순간을 느끼고 내가 떠난 뒤를 대비해 아이들에게 ‘애이불상(哀而不傷: 슬퍼하되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됨)’을 당부했다. 우리가 떠난 뒤 저것들이 이 어려운 세파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찌해 그분들의 아들이 되었고 저것들은 어찌해 내 새끼가 되었는가. 깨우친 푸른 눈으로 보면 나는 아직도 금수(禽獸)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존재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련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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