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눈 내린 휴전선 벌판에 무릎을 꿇었다밤하늘 가득 별이 나왔다과거의 분노보다 오늘의 사랑에서 별을 바라본다별은 나의 조국이다헤어질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서로의 별이다별에서 태어나고 별에서 사라지는조국은 별빛이다정호승●1950년 경남 …
201706012017년 05월 19일화양연화 (花樣年華)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
201705012017년 05월 11일제비꽃 꽃잎 속
제비꽃 꽃잎 속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돌의 틈서리를 비집고 올라온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쉽사리 부서뜨리지는 못했으니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천둥치는 빗속을 종종걸…
201704012017년 04월 11일운명의 힘
운명의 힘상대의 성향과 확률을 숙고해서가위를 낼지 바위를 낼지보를 낼지 결정하는 승부사도“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가, 요거 내래!”가락 맞춰 외치다 보면얼결에 내게 된다흥겨워라,운명의 힘황인숙●1958년 서울 출생●1984년 경향…
201703012017년 03월 07일북항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201702012017년 02월 13일구체적으로 살고 싶어
젓가락, 접시, 소시지, 오렌지주스, 달걀…… 그런 것들이 될 거야 사물이 된다면 달그락거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숨겨지고 수평선은 어둠을 끌어올리지 어둠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거야 눈물이 나…
201701012017년 01월 05일환상의 빛
환상의 빛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몇 세기 전의 …
201612012016년 12월 15일아이들이 울고 있다
한 아이가 계속 운다 두 아이가 배고파 운다 세 아이가 엄마 잃고 운다네 아이가 갈 곳 없어 운다누가 아이들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쑥쑥 자란다폭발음 속에서도 구호물자가 없어도 지진 일어난 곳에서도누가 아이들의 배고픔을…
201611012016년 11월 09일청평
청평저 강물을 어루만지는 햇볕이 태양을 떠나온 지이십 개월밖에 안 됐을 턱이 없지어루만짐은 반복이 안 되는 것이지손아귀에 들어갔다 나온 보석은이미 보석이 아닌 것이지반복이 안 되는 시디플레이어로 듣는세레나데, 물결은 강변으로 밀려나…
201610012016년 10월 17일근린공원
근린공원개들의 달리기가 개를 완성하겠습니까. 나무의 흔들림이 나무를 증명하겠습니까. 번지는 황혼이 이 저녁을놀이가 놀이터를 정복하지 못하고 우는 일을 아이가 정복하지 못하고부부생활이 부부를 정복하지 못합니다.그래서 점점 불안해지는 …
201609012016년 09월 13일나의 에덴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벌거벗은 아흔아홉 개의 계곡을 가진 깊은 산에 홀리고 싶어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물소리를 붙잡고 싶어 산부전나비 쫓다가 무심하게 건드린 벌집, 나는 또 캄캄하게 절벽으로 밀리…
201608012016년 08월 05일倒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마침내 비가 내리는, 이야기라기엔 비좁고 사연이라기엔 주어가 없이 가로지른 목책 아래 울음을 씻느라 뒤도 돌아보지 못하는 개울은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잠시 사라진다 廢屋의 사람들은 그 물로 밥을 지어 일가를 이룬다…
201607012016년 07월 13일뱀의 입속을 걸었다
뱀이 쓸쓸히 기어간 산길 저녁을 혼자 걸었다 네가 구부러뜨리고 떠난 길 뱀 한 마리가 네 뒤를 따라간 길 뱀이 흘린 길 처음과 끝이 같은 길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길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실천문학사, 2015) 중에서 고영…
201606012016년 05월 23일미안, 엄마
미안, 엄마엄마는 안경을 벗어 내 얼굴에 씌워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날씨는 어떤 것일까역광이죠 모르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내 손을잡고 멈추었다 까맣게 먼 숲의 입구였다모자를 벗고 아이들이 걸음을 늦춘다 엄숙함을…
201605012016년 04월 25일인연
친구가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라면을 끓였다 달걀은 풀지 말아달라고, 친구는 내게 부탁한다 봉지 속에 면발을 사등분으로 부술 때마다 경미하게 눈가가 떨려왔다 그게 누구였냐고 왜 그랬느냐고 물…
201603012016년 03월 04일이동
이동 너는 여기가 좋다고 말한다 편해서 좋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잡아끈다 너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201602012016년 02월 15일눈길
종일 눈보라가 쳤다. 누구였을까, 눈보라를 뚫고 왔다가 돌아간 사람, 어지러운 발자국, 그 옆에 족제비 발자국도 가지런하다. 언 내(川)를 건너는 눈보라, 눈 맞고 서 있는 자두나무야, 너는 외롭냐? 저문 뒤 귀가 큰 어둠과 귀신이…
201601012016년 01월 12일심문
늙는다는 것, 때리는 것도 힘에 부치지만사실 맷집도 달린다.권고사직을 제안받고 그는소진된 복서처럼 무엇이든 그러안고 싶었다.피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세월은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빼앗아버린다.내버리다시피 판 주식을 사서 대박 난 …
201512012015년 11월 20일겨울 채비
바람은 차고 아침 서리 매서워져텃밭 무 걷이를 했습니다. 어떤 것은 아내의 매끈한 종아리 같고어떤 것은 큰아이 장딴지처럼 굵고옛적 나의 젊은 아버지가 하던 방식으로 무릎팍 길이만큼 땅을 파고 묻습니다그늘에 앉아 아내와 무청도 엮습니…
201511012015년 10월 21일하루하루, 하루
오늘도 새소리보다 먼저 깨어나비틀거린 마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든다발가락에 쥐가 나고하루가 너무 길다남는 게 없는 생활도 하고남는 게 없는 생활 아닌 것도 한다보도블록만 보고 걷다가이파리만 보고 걷기도 한다해가 짧아지고 흐린 날이 많…
2015102015년 0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