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 풍란
유튜브를 탄 가수 싸이의 노래가 빌보드차트 2위에 오른 기념공연이라던가팔만 명의 인파가 말 춤판을 벌인 다음 날한 여자가 세종로 이순신 동상 앞에삐뚤빼뚤 손 글씨 적은 피켓을 들고 서 있다세 아이의 아빠에게 일터를 돌려주세요!쌀쌀한…
2013032013년 02월 20일겨울나무님께
한때 그는 세상을 향해 하염없이 불타오르던 열 살 스무 살 적 꽃단풍이었을 거외다.푸르뎅뎅한 사랑을 끝내 저버리지 못한 채 마침내 젖은 낙엽으로 거리를 나뒹굴다가 저렇듯 곁가지들 하나둘씩 죄다 쳐내 버리고 그날 밤 그는 마냥 휘몰아…
2013022013년 01월 21일소묘(素描)-백지
창문가에 선다눈이 내려 하얀 한겨울의 바깥이 춥다머리가 아프다눈이 흐리다느닷없이 백지 한 장이 창문을 가린다잃어버린 사랑이 무색의 꽃잎으로 지고 있다일상이 된 내 불명의 배회가 거기 황혼의 발자국을 남기고 눈물로 지고 있다가라앉는 …
2013012012년 12월 26일겨울폭포
나이에 맞게 적당히 살 수 없다거나시대와의 불화를 피할 수 없을 때마다난 얼어붙은 겨울폭포를 찾는다.봄에는 세상 안팎의 경계를 지웠고여름에는 바닥을 치며 자신을 비약시켰고가을에는 뼈와 살 사이로 마지막 망명을 떠났고겨울에는 자신의 …
2012122012년 11월 20일철야일지
입동이 내일 모레야근도 이젠 힘에 부쳐요 엄마막차를 손봐 놓고 컵라면을 먹는 새벽 첫 월급 타 사드렸던 빨간 내복이 엊그제 같은데 내후년이 정년이래요 기름때 전 작업복을 빨며 똑똑한 막내아들 못 가르친 죄라며 끝내 우시던 모습 눈에…
2012112012년 10월 19일시월이 붉어지거든
호곡號哭소리를 들으시라.잘못 복사된 사본처럼푸른 젊음이 결핍된 엽맥葉脈 구석구석바람 행로만 기록한저 깊은 소沼에 홀연히 젖어든돋은 그늘을 보라초여름 돌기마다 회오리 휘돌아붉게 산발한 머리채 이고인적 없는 계곡에서한 풍경을 도려내는저…
2012102012년 09월 20일나무들의 양식
나무가 먹고 있는 밥을 보았다몹시 조악한 악식(惡食)이었다스산한 늦은 저녁이었다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길 잃은 철새가성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나무의 밥과 인간의 밥은본래 하나나무와 인간은 같은 밥을 먹었지만 내 밥은 그에 비해 푸…
2012092012년 08월 21일향수鄕愁
이른 새벽, 하늘은 잿빛그리움에 고향은 멀다 길에 서면 인내(忍耐)는 바람낮은 가로등, 꿈도 엷다지는 달빛, 사랑도 얇다-이문근
2012082012년 07월 19일자월도紫月島 편지
그대, 오랫동안 잊고 산 얼굴이 보고 싶거든 여기 자월紫月로 오라.대부섬 방아다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갈매기떼 전송받으며 바다 위에서 한 시간쯤 창해일속滄海一粟을 몇 번 되뇌다 보면어느새 모성의 품으로 안아주는 한 섬에 닿으리.승…
2012072012년 06월 19일꽃잎 한 장
꽃잎 한 장이 수면에 떨어져작은 파문이 일고 있다파문이 물별을 만들고 있다꽃잎이 없다면파문이 없다면아름다운 물별을 볼 수 없을 것이다꽃잎 한 장 받는 일은가슴에 물별이 뜨는 일꽃잎 한 장 주세요
2012062012년 05월 23일우도(牛島)에서
올레길 걷던 젊은이 하나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말귀도 못 알아듣는 말을 향해 김치이-하는데그 모양이 생각하면 할수록 재미있어서 한참 가다 만난 소를 보고 이번에는 내가사진기를 꺼내 들고 마악 김치이-하려는데웬 늙은이 하나가 팔을 걷어…
2012052012년 04월 19일양반탈
누워서 웃고 있다웃음 가득 주름살을 지으며판박이로 고집 세게 웃고 있다누가 양반을 버렸나어떤 죄라도 품어주겠다는 듯조용히 웃는 저 얼굴을 버렸나모든 말들을 생략하고도모든 말들을 요약한 웃음 같다흰 도포를 입고정자관을 쓰고부채를 들고…
2012042012년 03월 20일공갈꽃
여의도 서편에 자리 잡은 아고라 정원울긋불긋한 꽃들이 정결한 척, 한바탕 피어 있다자유와 민주, 평화를 위한 구원의 나팔수라며세상에 좋다는 소리는 모두 따 붙여가며4년마다 피는 꽃, 파리지옥 같은 공·갈·꽃아무 꽃나무에 물거름 주어…
2012032012년 02월 21일이불
방금 예단이불이 도착했어요 혼자가 싫은 사람들이 방마다 혼자 웅크렸다가 나왔어요아직 오지 않은 그 사람에게로 중심이 쏠렸어요 출렁, 꽃무늬 이불이 펴졌어요 아유 따뜻해라, 아버지는 침묵의 손바닥으로 꽃무늬를 쓸었어요 아유 폭신해라…
2012022012년 01월 19일초대
집 근처에 작은 감리교회가 있다담장도 없는 교회당 벽에는 자벌레만한 화단이 딸려 있다그래도 거기에무화과며 앵두 목련 꽃무릇 능소화 들이 살아서내 발길이 자주 흘러가곤 한다사나흘 전에 초면인 목사와 잠시 꽃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런데 …
2012012011년 12월 20일코끼리의 기원
어젯밤 회식이 길어졌고, 좀 취한 것까지는 인정하겠다그래도 그렇지, 평상시처럼 출근시간 맞춰 잘 일어나, 늘 하던 대로빵 굽고 딸기잼 꺼내고 오렌지 주스 따르고, 늘 하던 대로, 아들을 깨웠다빨랑 일어나라, 아침 먹자 잉,아빠, 누…
2011122011년 11월 22일연잎 위에 달항아리
이른 봄 매화꽃 함성에 깨어나꽃그늘 손잡아 흔연스러운 봄나들이그늘진 바람받이 한적한 비탈에후두둑 감꽃 주워 만든 목걸이무료한 목소리에 젖어 있는 한여름소나기 성글거리는 소리로연잎 위에 머물다 구르는달항아리 내 사랑노을빛으로 애태우는…
2011112011년 10월 19일반허공
죽을 때가 되어간다면앞이 잘 보일 것이니살아서 모든 것을 떨쳐내고 왕궁의 오솔길을 따라서비밀스러운 왕의 쪽문을 따라서그렇게 삶의 미련을 잊어버리고죽은 왕녀의 비녀를 그리워한다그리도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녀돌아가는 길에 추억 하나 이름…
2011102011년 09월 20일빈집에 우물 하나
늘 어디론가 떠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부러웠습니다하지만, 지금 여기 더 독하게 앓으며맑아질 수 있다면지나온 세월만큼 견딜 수 있겠습니다뒤꼍 떫은 감나무이따금 지나는 허기진 바람 한 점에도사색에 잠겨 있습니다세월 지나 폐허가 되어버린…
2011092011년 08월 19일살구나무에 대한 경배
내 친구 최승희 교수는 한국 고문서 연구의 권위인데그보다 더 잘하는 건살구 술 담그는 일.자기 집 마당에 있는살구나무를 잘 가꾸어매년 수확한 살구로 술을 담근다.가끔 점심을 같이 할 때페트병에 담아 가지고 나오는데그 맛은 주성(酒星…
2011082011년 0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