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바닥이 차갑다바닥은 따뜻해야 한다불처럼 뜨거워서도 안 되고얼음처럼 얼어 있어도 안 된다피곤한 등을 대고 잠을 자거나 쉬고손을 짚고 발을 디뎌일어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바닥이 기둥이 되기 때문이다바닥은 어디에도 있다의자에도 있고길에도 …
2014112014년 10월 21일초가을 초저녁
나무에게 가서 산에 관해 떠들고돌에게 가서 허공에 관해 지껄이고개에게 가서 들판에 관해 소곤거리던초가을 초저녁이 여기에 지금 와 있다불룩하고 둥그스름하고 펑퍼짐한 초가을 초저녁에게나무가 산에서 물소리를 가져왔냐고 묻고돌이 허공에서 …
2014102014년 09월 18일나에겐 나만 남았네 _ 사랑의 북쪽
어느덧나에겐 나만 남았네나에겐 나만 남고 아무도 없네나에겐 나만 남고당신에겐 당신만 남은그런 날당신은 당신이 되고나는 내가 되고서로 서로 무죄일 것 같지만그렇게 남으면 나는 나도 아니고당신은 당신도 아니고당신도 나도 아무도 아니고단…
2014092014년 08월 20일항해일지 _ 아버지 Ⅰ
어린 시인, 아버지를 따라 섬에서 바다로 길을 찾아 떠났제라첫 항해는 목선을 타고 하늘 바다 사이 새떼들 날고, 평화는 바다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작은 무지개가 살랑거렸제라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어린 시인 콧노래 흥얼거리며 낚시질을…
2014082014년 07월 18일방충망
이곳은 월경금지! DMZ 철책 같은방충망에 방아를 찧듯 나방은거푸 머리를 들이받히면서도형광등 환한 불빛 유혹에 겨워방 안으로 기를 쓰고 날아들려고삶이란, 한여름 밤 불나방처럼 이렇듯눈부신 세상으로 비행을 꿈꾸는 것그러나 사방 둘러친…
2014072014년 06월 19일등산
산에 올라가자 산에 올라가자 벗들 임들우리 모두산에 올라가백의민족으로하얗게 하얗게산자락 뒤덮고마음껏 실컷 대성통곡하자산기슭에서 태어나산기슭에 묻힌내 조상들의 산을 내려와 다시 시작하자다시 말하자다시 꿈꾸고다시 일터를 가자엉엉 울어버…
2014062014년 05월 20일달과 황소
출렁이는 하늘황소가 운다꽃으로 피고 싶어 하는 구름들이 몰려다니고버려진 꿈들이 소란을 피우면흘러갈 곳을 잃은 달이 창밖에서 운다나비처럼창가에 붙어 서서 허수아비처럼귀 기울이면달을 짊어진 황소가 운다
2014052014년 04월 21일사월에 내리는 눈
얼마나 알량하면지척에서 놀던 봄이 오다 말고지레 놀라오그라진 살 속에 얼음덩어리 눈으로 내리겠느냐눈에 덴 가슴이 뜨겁다불구덩이보다 뜨겁다열리다 만 사랑이 눈을 감고 연기처럼 하롱인다바람이 젖은 백지장처럼담벼락에 붙는다사월에 오다가 …
2014042014년 03월 19일편지
어젯밤 부는 비바람에목련꽃 다 지겠네못다 핀 벚꽃들 다 지겠네 끝내 닿지 못한 소망처럼 꿈처럼 목련은 지고 그대가 보낸 시를 읽고한 잎 두 잎 지기 시작하는 목련꽃을바라보는 아침 그 떨어져 날리는 꽃잎이바로 그대의 마음이었나 그 …
2014032014년 02월 19일다시 철새들도 추억 속에 집을 짓는다
철새들이 철원을 찾는 마음 여전하다. 애꾸 중 궁예가 웅거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 강하의 조운은 어려우나 읍에서 북으로 칠십 리. 망망한초원 중 방방곡곡 놀 만한 철원에 대한 인상이 유전자 속에 각인된다.갈앗재 비낀볕에 캐터필러 …
2014022014년 01월 21일함부로 주지 말아라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아무것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말아라술한테 주고 잡담한테 주고 놀이한테 너무 많은 자기를 주지 않았나 돌아다보아라가장 나쁜 것은 슬픔한테 절망한테 자기를 맡기는 일이고더욱 좋지 않은 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
2014012013년 12월 18일方向
그냥 무료히 꺾인 날들무슨 일이 스쳐갔더라 새벽은 그냥 열리고 문을 나서면 허허들판어디더라 거기가 어디더라방향을 잡으나 그 방향은 아니고젊음은 파릇하게 스치나노년은 어둡고 스산하여헤매다보면 幻影뿐다시 낯선 허허벌판 어디더라 거기가 …
2013122013년 11월 19일11월, 아득히 먼
햇볕이 적금된 통장그 붉고 노란 단풍잎마다비밀번호를 적고 사인을 했다.허허한 겨울을 위해 마음의 지갑을 채운다.어둠의 폭포를 뚫고 밤새 풀어헤친귀뚜라미의 사설그 벽에 붙어서 북을 친다.장단 추임새에 만가(輓歌)도 들썩인다.아궁이에 …
2013112013년 10월 18일돌아가신 어머님의 몸을 닦으며
반듯이 누우신 어머님하, 어머님하. 납작이 엎어진 놋사발 두 개의 젖가슴이시여. 일만 사발의 젖물, 일만 사발의 정화수, 삼만 사발의 눈물하.
2013102013년 09월 23일별 하나의 희망
내 영원한 별 하나 있다면 좋겠네기쁠 땐 기쁜 눈으로슬플 땐 슬픈 눈으로자나깨나 바라볼 별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구름과 바람과 세찬 비에도형형한 빛으로가시에 찔리고 긁힌 생채기 위에서도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눈빛을 닮은 그러한 별이라…
2013092013년 08월 20일서쪽
긴 포대기같이 구릉이 뒤집히며모래바람 불어올 때죽은 새끼를 끝내 데리고 가겠다고성지 성화(聖地 聖畵), 텅 빈 사막에 검은 들소가 울고 있다수심(水深)이 깊다그만지평선이 네 배꼽 밑까지 허기져 내려가겠다나는 뒤돌아서며가시나무꽃이 비…
2013082013년 07월 19일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잘난 꽃 되지 말고 못난 꽃 되자함부로남의 밥줄 끊어 놓지 않는이 세상의 가장 못난 꽃 되자
2013072013년 06월 19일영(嶺)
순하고 느릿한 구름들이 내려와 양이 되고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이 되고길길이 날뛰던 바람이 수만 갈래 풀과 이파리로 번져나발자국을 셀 수가 없다거친 숨 골라 여기에서 거기로 이동한 것들의 흔적에돌아가며 오르내리다기어이 제 속을 들여다…
2013062013년 05월 22일백마고지 역에서
철길처럼 마주보는 우리 팽팽한 기다림의종착역은 어디쯤일까 방금, 지상의 마지막 역에 내린 백발 할머니가 절벽 같은 철길 끝에서 지평선 너머 세상을 까치발로 넘겨다본다 슬쩍 눈물을 닦는 할머니 손가락에 외가락지 이제는 다 닳아 끊…
2013052013년 04월 18일고등어 한 마리
늦은 밤 지친 행색이 돌아와 누운 자리에흐물흐물 비린내가 먼저 기상하는 아침맞벌이 아내의 불 켜진 새벽 주방이 미안하다식탁 너머 음식물 쓰레기통 속노여운 기색 한마디 없이 낯익은 고등어 대가리 하나 묵언수행 중이다눈 부릅뜬 채 입 …
2013042013년 0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