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秋에 읽히는 책
뒤뜰 나무의자에는 내 영혼의 그늘 같은 책 한 권이 굽은 등뼈로 놓여있네, 입추 햇볕은 몽글몽글한 손길로 굽은 허리 낱장을 목화솜꽃처럼 더디게 일으켜 세우네, 팔랑팔랑 낱장 넘기는 바람의 종종걸음이 참매미 떼 눈길을 끌지만 울음 그…
2009102009년 10월 05일방파제에서
어디로 갔을까해당화꽃 떠다니던그 봄날의 바다어디로 갔을까노란 꽃잎 같은 작은 게들 싣고한 걸음씩 들어왔다한 걸음씩 뒷걸음치던밀물과 썰물어디로 갔을까투명한 노란빛 어린 게들곰실곰실 기어 다니던흰 모래밭어디로 갔을까바다로 내려가는 길굴…
2009092009년 09월 04일모래성
모래 속을 헤엄치고 있는 새를 생각한다사태를 너무 가볍게 본 것 같은 기분으로민박집에서 저녁밥으로 나온 해초가 떠 있는 사발을 들여다보며 바닥에 깔린 모래를걸어봤어…죽은 애를 안고 오랫동안… 아이들이 해질 녘에 발견한 모래성밖으로…
2009082009년 07월 28일너를 보내고
너와 함께한 삶은하찮은 것사소한 일모두가 꽃이었구나너의 혼백 속에그 꽃들은 하염없이 눈물로 지고나는 시든 꽃송이의꽃 피어나는그리움에 젖어세상의 기쁨에서멀어진다
2009072009년 07월 01일궁리
궁리 끝에 몰래 비누를 긁어먹던 쥐는 자신의 생가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취한 채몸속 거품에 밀려 자신의 생가를 찾아가다가 덫에 걸려 죽은 쥐의 오므린 발가락들은 비유로서 우리에게 얼마나 친절한가궁리 끝에남의 고향을 무작정 따라간…
2009062009년 05월 29일러너들의 저녁
입이 벌어진 하얀 운동화 같은 얼굴로 너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하늘을 내딛는다벚꽃이 피고 있는건너편 102동까지학교를 나온 아이들의 목소리가가득한 운동장까지우리가 나눌 수 있는 최대한의공평함을 위해너는 가까워진다흐리고 비가 올 듯한 …
2009052009년 04월 30일봄날에
제게 잎을 주지 마십시오.연록빛 날개로 잠시 오를 뿐곧 무거워질 잎사귀는 주지 마십시오.제 마른 가지 끝은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갤 수 없도록.여기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당신 옷깃만 스쳐도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2009042009년 04월 02일어둠 속에서
돌조각상, 오래전 보았네날개를 펼친 채 붙박여 있었네, 푸른빛을 감싸고날아갈 듯 천년을 붙잡혀 있었네, 돌 속에서 새가 빠져나오기를 기다려 품에 입김을 던졌네입김을 던지며 나의 것이라도 되는 듯 비켜주지 않았네, 이상한 기운이 감돌…
2009032009년 03월 03일그물
깊은 밤, 누군가 그물을 걷고 있었다그물코에 걸려 올라온 달빛이 뱃머리에서 차랑차랑 쏟아졌다물고기잡이가 금지된상수원보호구역에서 그물질을?얼른 나는 강가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며칠 뒤 또, 그 며칠 뒤 또 야심한 밤에 그물질하는 남자를…
2009022009년 01월 30일새해 노래
웃음의 해가 되어지이다웃음이맞은편 웃음의 해가 되어지이다저 길모퉁이좌판할머니에게하루 6만원 벌이의 해가 되어지이다학부 2년짜리 젊은이한테알바 네 군데에서 세 군데는 그만둘 여유의 해가 되어지이다그 젊은이한테멀리 떠나가버린 책이돌아오…
2009012009년 01월 05일해후
담장 아래 요양소의 늙은 중국인이 체조를 한다, 이 얼 싼 쓰, 금붕어 몇 마리를 투명비닐봉투에 넣고 걸어가기 좋은 봄날이다. 공동식당 식탁 아래엔 바람 빠진 축구공, 따지고 보면 외삼촌이 괴로운 것은 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어했…
2008122008년 12월 02일죽은 새들의 행진
허벅지까지 차오른 하얀 눈은 금세 허리를 삼켰다산보를 나왔던 아이는 목마를 태운 엄마가 무릎을 꺾을 때마다가늘게 나부끼고 있었네여름을 가로챈 봉우리가 화려한 모조 열매를 전시했다손가락들이 정상을 지목했지만눈의 두께를 재는 얼굴을 치…
2008102008년 10월 02일삶-GMC 산판차처럼
1보내주면서와 오면서로계절은 늘 섞여 있으면서한여름말고는 난로를 피워야 하는 추전(杻田)역엔싸리밭 사이 바람이 자울자울사람보다 산짐승들이 더 많으면서시작은 육지, 종착은아프도록 부서지면서 구애하는바다를 지나면서갇힌 수족관의 내용물들…
2008092008년 09월 03일북어
제단에 바쳐질 줄은그물 속서도 생각 못했다미라 되어빛 잃은 눈에 푸른 하늘이 어른거린다장작 같은 몸매엔넘실대는 파도와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드넓은 바다 무리들과 즐겁던 날죄 없이 걸려든투망 안의 절망건조장에서 눈 세례 속 황태될 때먼…
2008082008년 07월 31일수국
방을 끊자 방에 대한 꿈만 있다그녀가 사라지자그녀의 윤곽만 남는 것처럼발가락을 모으고볕꿈을 꾼다- 이곳은 물의 나라라오내 목소리는 모두 젖어버렸소거품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문 너머그녀가 벗어두고 간 당초무늬 치마가바람에 널려 있다 내…
2008072008년 07월 04일식물성의 사랑
그 아픈 나무에게 마음을 빼앗긴 지겨우 일 년.퇴근할 때 두고 간다고 생각한 것도이제 겨우 며칠.목련꽃이 공중부양하듯 떠 있던 밤까칠한 나뭇가지만 보여주는 산딸나무에게못내 서운했다.봄이 왔잖니, 꽃도 피어나고 있잖니.어두운 표정의 …
2008062008년 06월 09일천체 예언자
북을 두드리며 피리를 불며시청 앞 광장에서 그는 노래했네이곳의 거주민들이여 오랜 여행자들이여나의 깊은 권능 속으로 들어오라보이저 호가 토성을 지날 때 그는 말했다끝없는 붕괴가 곧 시작될 것이라고저 너머의 십자가가 우릴 구원할 것이라…
2008052008년 05월 06일밤 시장
텅 빈 시장을 밝히는 불빛들 속에서한 여자가 물건을 사들고 집으로 간다.집에 불빛이 켜 있지 않다면삶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밤 시장,얼마나 뜨거운 단어인가!빈 의자들은 불빛을 받으며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밤은 깊어가는데 아무도 오…
2008042008년 04월 03일변산 내소사
봄은 늘 늙은 봄,올해 돋은 달래 냉이도 새것이 아냐.올 매화도 마찬가지,작년 것과 같은 헌 매화야.비도 작년 비바람도 작년 바람낯익은 비 낯익은 바람이야.변산 내소사 일대에큰고니 발자국 몇 개 찍어놓고달래 냉이 앞세우고당도한 봄도…
2008032008년 03월 05일벼룩시장
흐린 날엔 물건들도 몸살을 앓는다양편으로 오른쪽 굽만 닳은 구두는비척비척 길 바깥으로 미끄러지고물먹은 시계는바늘을 안개 속으로 실종시켜버린다물건들이나를 시장으로 내몬다물건들도 늙는다늙은 물건들 앞에서 그들의 젊은 날을 상상하는 것은…
2008022008년 02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