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대 후반인 나디아는 이집트 국립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문화재 복원이 전공이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고대 이집트 왕국의 위대한 파라오-우리에겐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사나이’로 더 잘 알려진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 때문이었다. 룩소르의 ‘왕비의 계곡’에 있는 네페르타리의 무덤이 까다로운 복원과정과 보존조치를 거쳐 발굴 98년 만에 어렵사리 일반에 공개됐다는 뉴스를 카이로 현지에서 접하고 그 뒷이야기를 듣고자 무작정 나디아의 사무실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두 사람의 외국 여성에게 포위돼 있었다. 그들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호주 캔버라 국립박물관에서 온 보존과학 전문가였다. 두 사람 모두 10대의 딸을 둔 40대 후반의 중년 여성이었다.
관심사가 같다 보니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우리는 람세스 대왕이 사랑하는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남자라곤 한 사람도 그려넣지 않은, 그래서 벽화에 오직 여자들만 등장하는 특이한 무덤을 만든 것에서부터 자신과 어머니, 왕비, 왕자와 공주 등 가족들의 모습을 아부심벨의 거대한 바위벽에 새겨 그의 애틋한 가족 사랑을 후세에 길이 전하려 했던 것, 전세계의 보존과학 전문가와 최신 장비를 다 동원하다시피 해 왕비의 무덤을 복원한 과정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우리는 카이로 구시가에 있다는 네크로폴리스를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안내는 물론 나디아가 맡았다. ‘죽은 자의 도시’라는 네크로폴리스에는 말 그대로 거대하고 특이한 탑 모양 무덤들이 즐비했다. 내친 김에 주위에 있는 오래된 모스크도 둘러본 다음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에야 신시가지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었다.
나디아의 ‘독신의 행복’
식사를 하다 말고 나디아는 “내 아파트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디아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몰랐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미혼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여행자란 특이한 안내자가 없으면 방문지 문화의 속살을 살펴보기가 쉽지 않다. 대개는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만 보고 와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댄다. 나는 가능하면 여행지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저 ‘보는 여행’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여행’을 하자고 마음먹고 길을 떠났기에 그녀의 제안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단 음식이 또 있을까 싶은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나디아의 아파트로 따라갔다.
그녀의 아파트는 5층 건물의 꼭대기, 다시 말해서 옥상에 있었다. 크지는 않았으나 제법 격식을 갖춰 지은 듯했고, 미술전공자답게 거실과 침실 부엌을 정성스레 꾸며놓아 밖에서 본 것과는 딴판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온 여자가 ‘원더풀’을 연발한 것은 당연했다. 중국의 집들이 대개 그렇지만 중동지역의 집들도 우중충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화려하고 세련되게 치장돼 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그곳 젊은이들과 어울리다 한 친구의 집에 따라가본 적이 있는데, 그 집이 꼭 그랬다.
나는 꽤 괜찮은 그림이 걸려 있고,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할 수 있을 듯한 찻잔과 티스푼, 가구들이 놓인 나디아의 방을 보면서 왜 그녀는 그 나이에 아직 혼자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슬람지역에서는 좀 배웠다는 여자들이 결혼을 굴레로 여기며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중동을 여행하면서 그곳 교민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어릴 때 받은 할례(성기 절제),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부모의 뜻에 따라 짝을 맞아야 하는 결혼제도, 그리고 결혼해서는 커리어 우먼의 길을 접고 오로지 남편의 뜻에 따라 평생을 살아야 하는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결혼을 기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미 커리어 우먼으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는 데다, 처음 보는 이국의 사내와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독신의 행복을 나디아는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줄곧 두르고 다니는 흰색의 차도르가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것도 아주 역설적인 방법으로.
이슬람 여자들은 흰색 또는 검은색 천으로 몸과 얼굴을 가린다. “그대 아내와 딸들의 몸을 외투로 감추어라”는 코란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이를 대개 ‘차도르’라 하고 이란에서는 ‘헤잡’이라고 부르는데, 같은 이슬람 국가라 하더라도 차도르의 착용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선 눈과 코만 내놓게 하는 데 비해 이란 이라크 요르단 이집트 터키 같은 곳에선 머리카락만 가리면 된다.
“벌거벗고 혁명한 여자는 없다”
볕이 뜨겁고 모래바람이 강한 기후에서는 천으로 몸과 얼굴을 가리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일 수 있다. 남자들도 머리에 터번을 두르지 않는가. 그러나 머리카락은 물론, 눈과 코를 빼고는 얼굴을 모두 천으로 감싸는 차도르를 단지 햇빛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도구로만 보기는 힘들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자고 나면 전날 동침한 여자를 죽여버리는 괴팍한 왕에게 한 슬기로운 여인이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마침내 그를 바른 길로 이끌었는데, 그 이야기를 담은 고전 중의 고전, ‘아라비안 나이트’의 고향, 이란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테헤란 공항 곳곳에는 ‘헤잡은 여성을 더욱 여성답게 만든다’는 문구와 헤잡을 쓴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거리는 한마디로 헤잡투성이였다. 13살이 넘은 여자는 집 밖에선 반드시 헤잡을 둘러야 하고,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며, 이 원칙은 식당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를 위반하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 주인도 그걸 방조했다는 이유로 영업정지 같은 문책을 받게 된다고 했다. 서구 지향의 팔레비 왕정 때는 헤잡을 벗으라고 강요했는데, 79년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반대로 헤잡 착용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여성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는 혁명이 터지고 1년 뒤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를 만나 그 이유를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왜 여성에게 이 거북하고 우스꽝스러운 옷 속에다 몸을 감추라고 강요하는가? 이 나라에서도 여성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투옥되고 고문당하며 혁명을 돕지 않았던가?”
호메이니의 대답은 이랬다.
“혁명에 기여한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이슬람 복장을 한 여성들이었지, 당신처럼 살갗을 드러내놓고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과 목덜미, 몸매를 과시하면서 거리에 나서는 요염한 여자치고 팔레비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은 없다. 그들은 좋은 일이라곤 한 적이 없고,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쓸모있는 여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벌거벗음으로써 남자들의 주의를 흩트리고 마음을 뒤흔드는가 하면 다른 여성들까지 동요시킨다.”
얼굴도 이렇게 가리도록 하는데 몸은 어떻겠가. 속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해준 것은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카이로 의과대학 여학생이었다.
손에 코란을 쥔 그녀가 대뜸 내게 무슨 종교를 믿느냐, 한국은 어디쯤에 있으며 어떤 나라냐고 묻기에 대답해주고는 “이슬람 여성들은 왜 그렇게 몸을 감싸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런 저런 설명을 늘어놓다가 겉옷을 살짝 걷어올리더니 두 다리를 감싼 검고 두껍고 긴 속옷을 내게만 보여줬다.
구두 스타킹 속옷으로 개성 표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인가. 헤잡을 두르긴 했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난 파란 눈, 살짝 그어놓은 쌍꺼풀, 짙은 눈썹, 오똑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콧날, 립스틱을 붉게 바른 입술, 순백의 피부, 적당한 몸집, 약간 물기를 머금은 눈망울로도 눈이 부실 정도인데, 그것도 모자라 이란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는 앞머리를 약간 틀어올려 이마를 많이 드러냄으로써 얼굴이 길어 보이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렇게 해서 갸름해진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다.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 다음으로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구두와 스타킹이었다. 한 가지 색깔의 천으로 몸을 감싸는 헤잡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에서 개성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래서 구두와 스타킹은 그 모양이 다양했고, 젊은 여자들은 거리를 걷다가도 구두 가게 앞에 이르면 으레 멈춰서서 한동안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들이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속옷 가게였다. 남에게 보여주는 겉옷은 이슬람의 법인 ‘샤리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지만, ‘남편 전용’인 속옷은 그런 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속옷가게를 보니 불빛이 더 화려한 것 같았다.
이슬람 사회에는 또 ‘하렘(harem)’이라는 것이 있다. 차도르와 마찬가지로 자기 여자를 외부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에 이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렘이라고 하면 아랍의 왕궁이나 가정에서 여자들을 격리해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게 만든 시설이나 제도를 일컫는다. 나스타샤 킨스키와 벤 킹슬리가 공연(共演)한 ‘하렘’이란 영화로 우리에게도 웬만큼 알려졌는데, 이스탄불의 톱카피 궁전에 있는 하렘이 그 극치를 보여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최고지도자였던 술탄 것이었으니까.
그 하렘은 20세기 초 제국의 패망과 함께 폐쇄되고 그 후 박물관이 되어 지금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일반인들에게 소상히 알려진 것은 몇 년 전에 나온 ‘하렘, 베일 뒤의 세계’란 책 덕분이다. 하렘의 여자를 어머니로 둔 터키 여성 알레브 쿠르티에가 쓴 이 책에 따르면 피지배 민족의 여자들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미인들을 톱카피 궁전의 하렘에 모아놓고 최고의 화장품과 향수, 목욕과 마사지로 얼굴과 몸매를 다듬어서 술탄에게 바쳐 욕정을 채우게 했다고 한다.
하렘의 여자들은 술탄의 눈에 들기 위해 피눈물나게 노력했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순간을 기다리다가 늙어갔다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하렘은 오직 술탄 한 사람을 위해 만든 여자사냥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렘은 폐쇄의 상징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폐쇄와 단절은 사막문화권의 전통이다. 한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그리고 강한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는 두꺼운 벽돌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고 문과 창도 작게 내야 한다. 나무가 귀해 목조가옥을 지을 수도 없으므로 안과 밖이 통할 리 없다.
그런데다 전사(戰士) 중심의 남성사회라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려면 자기 여자가 외간 남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길 가는 여자와도 눈을 맞춰서는 안 되며, 남편이나 아버지의 허락 없이 여성의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또한 아랍인들은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도 접대를 남자들이 도맡는다.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지나다가 그곳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 부부의 집으로 초대받은 적이 있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라 파키스탄 사람들도 여럿 초청됐는데, 선교사는 남자손님들하고만 어울릴 뿐 여자손님들과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여자손님의 상대는 선교사 부인의 몫이었다.
그날 밤 나는 여자손님들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사회라면 여성들이 주로 맡는 버스 안내, 식당 웨이트리스 같은 서비스도 남자들이 담당했다. 다만 현대적 비즈니스 업종으로 현지 주민들과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은행, 고급호텔, 여행사 등에서만 양장을 한 여자들(그들도 차도르는 두른다)을 볼 수 있었다. 이나마 세상이 많이 바뀌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했다.
여성에 대한 이와 같은 굴레는 그들의 특이한 결혼제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슬람 전통사회에서의 결혼제도는 잘 알려진 대로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는 일부다처제다. 일부다처제는 이웃 부족과의 잦은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자라는 전통 유목사회에서 생활능력이 없는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보장 차원에서 생겨났다. 그런만큼 역사도 오래고 뿌리 또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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