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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향이 빚어내는 지적활동의 윤활유

갈색향이 빚어내는 지적활동의 윤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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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의 진한 충격

보통의 한국 사람이라면 커피에 관한 한 거의 모두가 전문가 수준이다. ‘커피 한잔 합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커피는 한국 사람들에게 차나 음료를 대표하는 보통 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음식점 못지않게 많은 곳이 커피점·다방이며, 도시의 빌딩은 전부가 커피점이나 다름없다. 자판기를 1~2대 갖춰놓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60~70년대의 그 유명했다는 양지다방이며 학림다방의 전설, 곧 고담준론의 장으로서 문화 사랑방 구실을 했다는 사실 등 커피와 관련한 저마다의 추억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커피는 어떤 음료보다 가까운 기호식품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다. 누구든, 언제든 손만 내밀면 먹을 수 있는 음료가 커피인 까닭에 ‘커피 마니아’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음료라는 데서 커피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생겨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으나, 커피가 지닌 독특한 성격과 맛을 알고 마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커피라면 모두 비슷하겠거니’ 여기는 통념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에서는 커피를 선택해 마실 수 있는 환경조차 마련되지 않은 탓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커피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마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커피를 비교적 잘 안다고 자부해 왔다. 하루 6~7잔이면 보통은 훨씬 넘는 수준인 데다, 중학교 시절부터 마셨다는 만만치 않은 경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이른바 ‘원두 커피’를 집에서 뽑아 먹기는 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스턴트 커피 애호가였다. 인스턴트 가운데서도 MJC에서 맥스웰로, 맥심으로, 네슬레 같은 브랜드로 넘어갈 때 잠시 즐거워했을 뿐 80년대 중반에 처음 접한 커피 메이커며 사이폰 커피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원두 커피라 불리는 커피들이 인스턴트를 압도할 만한 미각적인 충격을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던 탓이다.

커피의 참맛에 대한 신선한 충격은 역시 해외 출장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1995년 제49회 칸 영화제의 프레스센터에서 받은 에스프레소의 진한 충격, 그해 여름 유럽 미술관을 돌면서 로마·플로렌스·파리·런던 같은 도시에서 만난 새로운 커피들.

내가 남들로부터 ‘커피를 좀 유별나게 마신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 계기는 뉴욕에서 생겨났다. 1996년께부터 나는 휴가를 내든 취재 거리를 만들어서든, 해마다 ‘기를 쓰고’ 뉴욕에 갔다. 기자로서 ‘현대 예술의 메카’라는 뉴욕의 펄펄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직접 보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서 비로소 커피의 참맛과 만났다.

뉴욕 소호의 갤러리 전속 작가로 활동중인 화가 이모씨가 나에게는 커피 메신저였다. 그는 내가 뉴욕에 갈 때마다 소호와 첼시의 화랑가 순례를 시켜주었다. 한 번에 사나흘씩 계속되던 화랑가 순례는 커피점에서 시작해 커피점으로 끝났다.

강한 마력의 스타벅스

먼저 소호 중심에 있는 커피점 ‘바리’. 그 화가는 ‘백남준 선생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투박하게 생긴 하얀색 머그잔에 진한 커피를 따르고 생크림을 잔뜩 넣어 먹게 하는,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을 내놓았다. 창 밖을 바라보게 만든 높고 좁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즐기며 거리를 지나치는 다양한 인종의 예술가들을 구경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두 번째는 지난해 한국에도 들어온 스타벅스.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신 뒤 ‘커피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의아해했다. 스타벅스의 장기는 간단히 말하면 생두를 강하게 볶아 커피를 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쓴맛과 신맛을 느끼기도 전에, ‘강하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 만만치 않다. 그 충격은 다시금 스타벅스를 찾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은 소호 뒷골목에 있는, 커피를 직접 볶는 자그마한 커피점이었다. 가게 넓이는 중고등학교의 복도를 10m 정도 잘라놓은 듯했는데, 벽에다 작은 테이블 네개를 붙여놓았다. 갓 볶은 커피를 향이 날아가기 전에 바로 갈아 손님에게 내주는 것을 나는 처음 구경했다. 맛도 맛이지만 바깥에까지 풍겨나오는 커피의 진한 향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나의 여행 가방에는 스타벅스며 던킨도너츠 같은 대중적인 커피뿐 아니라, 소호의 그 뒷골목에서 볶은 커피가 항상 몇 봉지씩 들어 있었다. 뉴욕에 사는 친구는 커피가 떨어질 때가 되면 서울로 오는 인편에 커피를 몇 봉지씩 보내주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피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인스턴트로 대충 때울 수 있었다. 커피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선한 맛’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공수해온 커피가 가장 신선한 것인 양 신봉하던 나에게, 서울에서 발견한 커피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울에도 생두를 직접 볶아, 손으로 추출해주는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 여러 곳 생겼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 수는 비록 많지 않지만, 그 커피점들은 최소한 서울에서 마시는 커피 가운데 가장 좋은 맛을 내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커피나무에서 딴 생두는 1년이 지나도 그 성질이 별로 변하지 않는다. 반면, 생두를 볶아 원두로 만들면 2주일 안에 커피의 다양한 맛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생두는 커피 볶음기에서 220~230도의 열을 받아 내부 조직이 물리적·화학적으로 변한다. 변화하는 과정에 커피 특유의 맛과 향이 생성되는데, 커피 향은 휘발성이 강해 원두가 공기에 닿는 순간부터 달아나기 시작한다. 진공 포장을 하거나 원두를 비닐 봉지에 꼭꼭 싸서 냉동실에 보관하는 수도 있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달아나는 커피 향을 잡을 수는 없다. 커피를 즐기는 최상의 방책은, 갓 볶은 원두를 향이 달아나기 전에 갈아서 마시는 것이다.

커피라는 음료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보니, 커피 선진국이라는 이탈리아·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지에서 제아무리 잘 볶은 커피라 해도 서울에서 볶는 커피의 맛을 당해낼 도리가 없다.

나는 지난해 초 서울에서 제대로 된 커피를 처음 맛보았다. 내가 나 스스로를 ‘마니아’라고 부르기에 주저하는 까닭은, 진정한 커피와 만난 것이 2년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커피의 정수와 만난 적은 있으나, 커피의 맛을 알고 조금씩 공부해가며 찾아 들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커피의 참맛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 곳은 서울 안암동 고려대 후문 쪽에 있는 ‘인터내셔널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이라는 커피 전문점이다. 보헤미안 커피의 진수는 강하게 볶은 커피를 강하게 추출하는 데서 나오는 진하고 풍부한 맛이다.

살아 있는 맛, ‘보헤미안’의 커피

모르고 마시는 이들에게도 보헤미안 커피는 ‘진하다’라는 첫인상 외에 ‘커피가 참 맛있다’라는 느낌을 준다. 커피가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은, 커피를 분류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살아 있는 커피’ ‘죽은 커피’라는 말을 쓴다. 살아 있는 커피는 말 그대로 커피 고유의 맛이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뜻이고, 죽은 커피는 커피의 맛과 향이 다 사라진 채 쓴맛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헤미안의 주인은 혜화동에서 시작해 13년째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이추씨. 1950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뒤 목장을 경영하다가 ‘커피의 길’에 들어선, 한국에서 손꼽히는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80년대 중반 ‘평생을 걸 만한 일거리’를 찾다가 커피와 만났다. 일본 도쿄로 돌아가 2년 동안 커피 전문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한 뒤 서울에 커피 전문점을 열었다.

박씨는 ‘커피를 추적한다’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것은 책을 통해서든, ‘실전’을 통해서든 커피를 끊임없이 공부한다는 뜻이다. 그는 일본에서는 배우지 못한 커피 볶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볶은 커피를 일본에 보내 검증받는가 하면 국내 전문가에게 맛을 보이며 원두의 질을 정기적으로 점검해 왔다.

그는 사나흘에 한 번씩 커피콩을 볶는다. 좀더 손쉽게 볶을 수 있는 모터 달린 기계가 국산으로도 여러 종 나와 있으나, 그는 가스 불 위에 원통을 올려 돌리는 다소 고전적인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불 위에서 원통을 돌리는 속도와 시간, 커피의 볶음 상태, 콩을 분쇄하는 방법, 물의 종류, 물의 온도 등에 따라 커피는 맛이 달라진다. 박씨는 13년 동안 커피를 ‘추적’해 오면서 진하면서도 입안을 가득 채우는 커피의 풍부한 맛을 만들어냈다.

“커피에는 사람을 사로잡는 깊은 에너지가 숨어 있다. 커피가 지닌 진가를 뽑아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라고 그는 말했다. 커피를 모르는 사람도 에스프레소 같은 강한 커피를 마시면 ‘맛있다’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커피가 지닌 강력한 힘을 뽑아내는 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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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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