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인가? 충청이나 호남보다는 상대적으로 영남지방을 꼽을 수 있고, 더 범위를 좁히자면 안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동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의 존재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안동 일대에 이처럼 유교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퇴계 선생의 영향이 크다.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시킨 인물로 볼 수 있는 퇴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속의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퇴계의 양대 제자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이 꼽힌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퇴계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거의가 서애·학봉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양대 제자는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주력한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담당했던 셈이다.
또 학봉집안과 서애집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집안의 고택으로는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학봉 자신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집안에 명성을 떨치는 종택이 두 채나 있는 셈이다.
서애집안도 그렇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의 집이었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은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다.
물론 한집안에 종택이 여러 개가 있는 예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살았던 대종택이 있고,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파종택(派宗宅, 소종택)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종택과 파종택 모두가 세간에 회자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학봉과 서애집안은 대종택과 파종택이 동등한 비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동 금계마을에 자리잡은 파종택인 학봉종택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그리고 종택이 지닌 품격으로나 안동을 대표하는 고택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선비다. 임금 앞에서도 할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중앙선 철로가 바뀐 사연
학봉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중앙선 철도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 그것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런 계획을 알게 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키(荒木)’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선비임을 알고 기꺼이 철도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봉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도록 설계변경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 5개를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난히 터널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다.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들던 1970년대도 아니고,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의 철도 노선을 바꿨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학봉 집안이 지닌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은 일제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또 학봉은 호남지역 선비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이는 호남과 인연이 별로 없었던 다른 영남출신 선비들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먼저 광주 무등산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 집안과의 인연을 꼽을 수 있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내앞종택’에서 잠시 소개한 바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 노인 고경명은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서 삼부자(三父子)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고, 셋째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안동의 학봉집안으로 보내 대를 잇도록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경명과 학봉은 인간적인 신뢰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고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학봉의 부인과 아들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시기에 학봉의 가족들과 제봉의 가족들은 동고동락한 것이다.
학봉은 또 3년간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냄으로써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학봉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는 나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가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의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전까지 나주에는 서원이 없었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보다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수백여 개 누정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는 서원이 발달해 있었다.
영남학풍의 교두보 대곡서원
서원과 누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원에서 토론했던 주제가 주로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누정의 주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두 지역의 환경과도 연관이 있을 성싶다.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사색의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농토가 많고 물산(物産)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풍요로움과 함수관계가 있는 문학이 발달했을 것이다.
아무튼 학봉이 대곡서원을 세움으로써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과 영남의 퇴계철학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配享)된 5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거유들로 이른바 ‘동방오현’으로 꼽힌다. 그 얼마후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기대승이 추가로 배향되었고, 또 그 100여 년 후인 1693년에는 학봉 자신이 배향 인물에 추가됨으로써 대곡서원은 영남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경상도 출신인 학봉이 객지인 전라도에서 영남학풍의 근거지인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주나씨 집안 사람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나씨들이 나주의 밑바닥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서원이 설립·운영될 수 있었던 것. 오늘날에도 학봉집안과 나주나씨 집안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16세기 후반 대곡서원 설립 당시에는 대단히 보기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퇴계학통의 正脈
학봉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퇴계학통의 정맥(正脈)을 학봉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봉이 한 번 받았고, 그 다음으로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이 다시 이어받았다. 퇴계학통을 한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은 영남사회에서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양의 정신사에서 정맥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동양의 유·불·선 삼교에서는 공통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법(傳法)을 매우 중요시한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요, 죽음을 극복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스승은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므로, 자기의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전수할 수 없다. 비기자 부전(非器者 不傳;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이라고 해서, 만약에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 법을 전할 경우 여러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결국 하늘로부터 견책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제자도 스승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보면 스승이 제자를 찾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훨씬 더 크다. 스승은 제자를 알아볼 수 있지만, 제자는 스승을 알아볼 수 없다.
여기서 전법제자, 즉 정맥을 받은 적전제자(嫡傳弟子)가 지니는 의미가 있다. 동양의 종교와 학문은 문자나 책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 외에도 스승과 제자간의 내밀한 구전심수(口傳心授;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를 통하여 전달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구전심수는 오직 적전제자에게만 전해지므로 그 내용은 적전제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불가에서는 적전제자에게 전법의 징표로 스승이 사용하던 의발(衣鉢)을 전수하였고, 도가에서는 문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보검(寶劍)을 전해주었다. 유가에서는 스승이 보던 책이나 서첩을 전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인 징표보다 심법(心法)을 전수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퇴계학통의 정맥을 학봉 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은 퇴계의 정신이 학봉집안에 살아 있다는 말과도 같다.
퇴계의 학통이 전수된 과정을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퇴계는 학봉의 나이 29세 때인 1566년에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주자에 이르는 심학(心學)의 요체를 정리한 ‘병명(屛銘)’을 손수 써 학봉에게 주었다. 그래서 ‘병명’은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일종의 의발로 간주된다.
퇴계의 정맥은 학봉에게서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裁)-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으로 전해지고, 유치명으로부터 다시 학봉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에게로 전해진다.
김흥락이 퇴계학통의 정맥을 받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집안의 영광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임이 훨씬 무거운 자리이기도 했다. 퇴계의 적전제자이자 동시에 학봉집안의 종손이라는 영광 뒤에는 그에 필적하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위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책임 없는 권위는 성립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