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일공동체의 ‘밥퍼’ 최일도 목사는 음식의 가치를 세상에 일깨우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굶는 사람들에게 산해진미는 그림의 떡이다. 이들은 그저 가장 단순한 요리인 따뜻한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이면 족하다.
최목사는 1988년 겨울, 서울 청량리 역전에서 굶는 이에게 밥을 대접하는 다일공동체를 처음 열었다. 청량리는 하루에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출입하는 서울 동북쪽 상권 집약지다. 전면에는 초현대식 백화점이 있지만, 그 뒤에는 채소도매시장, 수산시장, 한약재와 농산물이 거래되는 경동시장 같은 재래시장이 공존하고, 현대빌딩과 고층 아파트 뒤로는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소문난 사창가도 있다.

최목사는 라면으로 여러가지 음식을 창조했다. 갖가지 재료를 넣어 라면 전골도 만들고, 면을 끓여 건진 뒤, 채소들을 넣어서 라면잡채도 만들었다. 다일공동체의 초창기 시절, 이 라면을 맛있게 먹은 한 행려자의 말이다.
“우리는 죽어도 시체가 부패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방부제를 섞었다는 라면을 이렇게 날마다 먹어서 말예요. 설령 공업용 기름으로 튀겼다 해도 까짓거 그게 대숩니까? 덕분에 우리 뱃속에 있던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이 모두 죽고 말았을 겁니다. 이제 이 라면은 우리가 먹는 대로 피가 되고 살이 될 줄로 믿습니다.”
라면을 밥으로 바꾼 것이 1990년부터다. 노숙자와 무의탁 노인들은 대개 하루 한끼 식사밖에 못한다. 그 한끼 식사가 라면이니, 라면을 끓이던 사람들과 이를 받아먹는 이들의 안타까움이 오죽했을까. 이들에게 부활절(4월)에 밥을 대접하는 것이 당시 최목사에게는 최고 목표였다. 그러나 밥 지을 쌀이 쉽게 마련되지 않았다.
고심하던 최목사에게 어느날 아내 김연수씨가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그 통장의 잔고에 79만원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 돈은 사실 최목사집의 그달 생활비였으나, 전전긍긍하던 그를 보다 못한 아내가 생활비를 털어낸 것이다.
최목사는 이 돈으로 10인분 밥을 지을 수 있는 전기밥솥 네 개와 40명분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샀다. 그러나 전기밥솥과 쌀이 있다고 해서 밥을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야 했고, 밥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곳까지 실어나를 도구도 있어야 했다.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도 최목사는 단 한끼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밥을 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밀어붙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최목사는 첫 밥 배식을 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밥을 지을 수가 있었다. 각계 각층에서 재료와 노동력을 대겠다는 자원봉사자가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목사가 이처럼 밥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사람에게 밥은, 칼로리로 열량을 내며 체력을 유지한다는 단순한 영양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한국인은 밥을 먹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음식물이 넘쳐나는 요즘, 각종 모임에서 이것저것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 배를 채우고도 밥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입에 익은 음식이라 그렇겠지만, 한국인의 체질 자체가 쌀을 먹어야만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수천년 동안 쌀을 먹으면서 몸이 쌀에 맞게끔 진화한 것이다. 수천년 동안 형성된 체질이 한세대의 식습관으로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이렇게 밥을 해결한 최목사에게 두번째로 닥친 문제는 반찬이었다.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기 좋고, 영양가도 높고 맛도 있는 반찬이 필요했다. 그 영순위로 떠오른 음식이 바로 잡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