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소-안티고네에서 모나리자까지’ 소피 쇼보 지음, 진인혜 옮김/영림카디널
미소는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마지막 창문이다. 그것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함이 솟아오르게 하는 것(조르주 바타이유)” 또는 “땅 위에 하늘이 잠시 나타나는 것(크리스티앙 드 바르티야)”이다.
미소는 눈·입·이마·관자놀이·입아귀 등이 관련된 신체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다. 미소는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띄기에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다른 한편 붙잡을 겨를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래서 미소는 수수께끼다. 미소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현세의 삶을 매력적으로 바꾸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발명품”이다.
또 미소는 타자와 소통하는 매개적 행위다. 미소는 “권위와 확신, 자아의 껍질로 둘러싸인 자기방어의 벽을 허물고” 육체 저 깊은 곳에 숨은 마음에까지 스며든다. 나의 미소는 상대방의 공격성을 완화하고 경직성을 누그러뜨려 나의 뜻과 의지를 상대방의 마음에 닿게 한다.
부처의 미소, 모나리자의 미소
미소와 웃음은 분명 다르다. 미소는 웃음의 흔적이 아니라 독자적인 영역에 속한다. 미소는 내부에서 생성된 기쁨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내면에 확립된 견고한 정신적 자세를 드러낸다. 미소는 신체의 표면으로 밀려나온 심리적·정신적 만족감이며 기쁨이다. “미소는 의례의 표현이면서 육체적·심리적 상징체계에 속한다. 미소에 함축된 상징적 의미는 기호와 의미, 의미작용의 세계에 속해 있다.”
반면 웃음은 “온몸에 파문을 일으키고 몸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 살며시 열려 있는 입을 중심으로 몸의 기운이 한데 모이게 하지만, 그로 인해 무의식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울러 웃음은 “수치심에 대한 자기방어이자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하나의 방식”이고 그리하여 “우리 안의 잉여물, 무의식적인 사고, 좋지 않은 추억 등을 내보내는 것”이다. 이처럼 웃음은 내부에서 강제되지 못한 채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도발이며 폭발이다.
웃음은 긴장을 해소하고 내적 이해에 이르게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웃음이 언어를 압도하고 사고를 순간 정지시킨다는 사실 때문에 일종의 퇴행 현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웃음은 일순간 에너지를 웃음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행동과 판단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의 파윰에서 로마시대의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군데에도 미소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중세 전기까지 서양에 미소가 없었음을 말해준다. 신들은 인간의 죄를 응징하는 천둥과 번개를 내리는 존재였기에 이들은 자비로운 미소 대신 형이상학적인 고함이나 꾸짖음만 퍼부었다. 이 어두운 시대에 미소는 악덕으로 여겨졌다.
13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얼굴은 단순히 신체의 표면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보티첼리, 리피,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의 회화에 미소가 나타난 것도 그 무렵이다.
미소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차이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일본인의 미소는 엄격한 처세술의 원칙이라는 규범에 갇힌 미소다. 일본인은 미소를 사회 규범으로 발전시켜 제도화했다. 그것은 중세 일본사회에 일상화된 폭력과 관련이 있다.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미소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며 아울러 폭력을 유발하는 빌미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일본인은 미소의 사회적 유용성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일본사회에서 미소는 공동체의 삶에서 유발되는 우발적 폭력을 제압하고, 사회적 평화와 일체감에 기여하는 제도로 정착했다.
가장 이상적인 미소는 부처의 미소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지만 서양인의 눈으로 보자면 부처는 못생긴 얼굴이다.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으며, 성별·연령을 분별할 수 없는 모호한 얼굴이다. 하지만 부처의 미소는 “모든 미소의 정수이고 절정이며 극치”다. 사람의 미소는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부처의 미소에는 대상이 없다. 아울러 부처의 미소에는 목적도 없고 객체도 주체도 없다. 부처의 미소는 해탈과 평정, 무욕과 선한 본성, 숭고한 자기집중에 이른 내면에서 스스로 솟아 바깥으로 뻗쳐나가는 빛과 같다. 우리는 다만 그 빛의 수혜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