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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는다, 고로 위대하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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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가장 좋았던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그의 마음이 맴돌곤 하는 원들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가장 좋았던 순간을 기억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노년의 가장 즐거운 시간을 즐겨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노년의 가장 좋은 순간이란 것이 바로 그것 아닐까 - 어린 시절의 가장 좋았던 순간을 갈망하는 것? (‘에브리맨’)

‘에브리맨’의 작가 필립 로스는 한국 독자에게 생소한 작가다. 그런데 현대 영미 쪽 소설계에서 그의 비중은 매우 크다. 이렇게까지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연유가 궁금할 정도로 필립 로스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미국의 목가’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에브리맨’은 세 번째 펜/포크너 수상작이다. 그는 미국에서 ‘불멸의 독창성과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펜/나보코프’상과 ‘지속적인 작업과 한결같은 성취로 미국 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펜/솔벨로’ 상을 70세를 넘긴 나이에 받았다.

1933년생으로 1959년에 소설가로 데뷔하여 2006년까지 50년 가까이 창작의 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소설 ‘에브리맨’을 읽고 있자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1970년 ‘나목’이라는 아름다운 장편소설로 여성동아 공모에 당선된 40세 신인 박완서. 박완서 선생은 2007년 77세의 연세로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발표했는가 하면, 최근 신작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를 발표해 문단은 물론 독자에게 행복한 놀라움을 선사해주었다.

필립 로스는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영순위 후보이자 현역 작가로 활동 중이다. 우리에게는 박완서 선생이 있고, 또한 나란히 최일남, 현기영 선생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제 위치에서 창작력을 발휘하고, 특히 노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 국가의 대외적인 국가 경쟁력만큼이나 중요한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소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외 없이 알고 있는 진리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말은 인류의 삶을 총정리한 ‘사생활의 역사’를 주도하고 집필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거장 필립 아리에스가 ‘죽음 앞의 인간’에서 공표한 명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문자로 명시하기 전에 인류가 시작된 이래 누구나 예외 없이 알고 있는 진리이며, 죽을 때까지 한번 이상 경험하는 사실이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이 죽음과 대면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루고 있다면,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우리 주위에 있었던 평범한 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작가들은 소설 속에서 시간을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시간의 운용 방법에 따라 독자의 감상이 달라진다.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에서 사용한 것처럼 순차적인 시간의 법칙을 따르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현대 미국 소설을 대표하는 피츠제럴드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사용한 것처럼 죽음 직전의 노년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졌다가 점점 어려지고, 더 어려지고 어려져서 태아로 소멸해버리는 모래시계형의 시간 운용도 있다. 또한 20세기 현대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설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계속 뒤로 되돌리는 회상의 변주법을 사용한다.

‘에브리맨’ 이후 필립 로스의 다음 소개 작품이 궁금하다. 필립 로스처럼 작가의 명성에 비해 번듯한 번역서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놀랍게도,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위대하다. 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없다면, 인간이 그토록 처절하게 삶을 응시하고, 무엇을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남기려고 할 것인가. 삶에 대한 치열한 경험과 모험, 그러니까 한 번뿐인 인생의 길목 길목에서 말을 걸어오고, 뒤돌아보게 하고, 돌아본 만큼 다져진 마음으로 한발 앞으로 내밀 수 있게 힘을 주는 소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 윗길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 12월 마지막 날 밤에 내가 도달한 생각의 정처(定處)이다.

그는 쓰러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불길한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느낌으로,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며 밑으로 내려갔지만, 결국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에브리맨’)

신동아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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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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