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덮인 겨울의 지리산.
그동안 이 골짜기 저 골짜기의 빈 집들을 떠돌며 일곱 번 이사를 하다 보니 이제야 지리산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사람이 살 만한 곳과 죽어서 묻힐 만한 곳, 사내의 기개를 드높이며 고함이라도 지르고픈 기운생동의 봉우리나 능선, 차분하게 지난 생을 반추하며 걸어볼 만한 옛길, 그리고 때로는 슬픔을 억누르다 못해 폭포수처럼 혼자 울기에 좋은 계곡 등이 눈앞에 선하다. 이처럼 지형적인 등고선이나 지명, 역사문화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정서적 개념을 나타내는 새로운 지도를 그려보는 것도 참 의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사실 누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 수 있다는 것은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행복에 가깝다. 이처럼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울기 좋은 곳’이나 ‘죽기 좋은 곳’ 하나쯤 남몰래 가슴속에 품고 산다는 것 또한 절망의 구심력이 아니라 희망으로의 원심력에 가깝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배경으로서의 산과 계곡과 강과 들녘이 아니라 자연과 한몸으로 교감하는 삶의 현장,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둘러보면 날마다 누군가 새롭게 태어나기에도 좋고,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군가 죽기에도 참 좋은 날들의 연속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그네나 철새는 따로 집이 없다. 날마다 도착하는 그 모든 곳이 바로 집이기 때문이다.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을 알아채고 따라 하는 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누구나 그럴듯한 집 한 채 장만하는 게 간절한 소망이겠지만,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욕망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말 것인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텃새처럼, 아니 이미 새가 아닌 닭처럼 철망 속의 둥지에 깃들여 살 것이냐, 철새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길을 갈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어차피 집과 집을 이으면 길이 되고 그 길의 마지막 집은 무덤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이라는 해괴한 물건(?)을 포기했다, 버렸다, 패대기쳤다. 이 세상의 모든 집을 안식처가 아니라 과정의 길로 만들고 싶었다.
분명 14년 전 지리산 입산은 도약이 아니라 한없는 추락을 자처한 내 인생의 마지막 번지점프였다. 서울살이 10년 동안의 환멸과 권태라는 은산철벽을 단숨에 깨뜨리는 ‘자발적 가난’의 외통수였다. 날아오르기보다는 차라리 추락의 자유를 꿈꾸었고, 비굴한 현실 안주보다는 도피·잠적·무책임의 질타를 받더라도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다.
텃새에서 철새로의 몸바꿈은 쉽지 않았지만 또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었다. 한 마음을 내려놓으니 또 그만큼의 빈터가 생기는 것이었다. ‘서울 하야식’ 혹은 ‘지리산 입산’은 단 한 번의 예행연습으로 끝냈다. 사표를 내고 보름간의 서울역 노숙자 생활, 이 극약처방이 주효했다. ‘돌아보지 말자, 더 이상 돌아볼 가치도 없다. 서울이 대변하는 아수라지옥을 빨리 벗어나자’ 되새김질하며 구례행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던 것이다.
이미 점찍어놓았던, 아는 스님의 섬진강변 빈 토굴의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지친 몸을 부려놓고 일단 사흘 내내 잠만 잤다. 사실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통쾌했던가. 어린 나이에 만덕사에서 행자 아닌 행자로 맛보았던 절대고독의 옆얼굴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