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 별량면 죽전마을 앞 갯벌의 동틀녘 풍경. 순천만의 넓은 갯벌은 주민들의 문전옥답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을 한둘쯤 가슴속에 품게 마련. 선암사는 필자에게 늘 사무치도록 그리운 곳이다. 사계절의 세밀하고도 뚜렷한 변화를 오롯이 담아내는 오솔길이 그립고, 절 입구에 서서 빙그레 웃어주는 나무장승도 그립다. 절 주변을 에워싼 숲과 그 숲 바닥을 뒤덮은 차밭, 그리고 언제 찾아도 고아한 절집도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이다. 그러니 선암사를 한번 찾아가면 발길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하릴없이 선암사 경내를 소요하다가 송광사로 넘어가는 산길로 들어섰다. 조계산의 산허리를 에돌아가는 이 호젓한 산길에서는 짧은 시구들이 연신 뇌리를 스치고, 잠시나마 세속의 온갖 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길동무가 없어도 외롭지 않다. 이름 모를 새소리와 소슬한 바람소리,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딱히 송광사를 염두에 두고 나선 길은 아니었기에 중간께의 갈림길에서 천자암으로 내려섰다. 수령 800년의 쌍향수(천연기념물 제88호)가 눈길을 끄는 천자암에서 점심공양까지 마친 뒤에야 다시 길을 나섰다. 아득한 추억 속의 고향마을 같은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거쳐 벌교읍내로 발길을 돌렸다.
벌교는 보성 땅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오히려 순천시에 가깝다. 그래서 선암사-낙안읍성-순천만 갈대밭으로 이어지는 여정이라면 번잡한 순천시내보다 한적한 벌교읍내에 숙소를 정하는 게 좋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유명한 벌교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일제 당시의 건물과 민초들의 삶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게다가 드넓은 갯벌과 기름진 들녘 사이에 자리잡은 덕에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맛집이 즐비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순천만 갯벌의 갯고랑.
주인 박영자(64)씨는 “이렇게 차려내면 뭐 남겠냐며 반찬을 좀 줄이라는 손님이 많다”면서도, “여태껏 그렇게 해온 데다 우리 집까지 찾아온 손님들이 고마워서 그럴 수 없다”며 푸근한 웃음을 짓는다. 이 집의 진수성찬을 맛보려면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자리도 몇 되지 않거니와 손님이 주문할 때마다 밥을 새로 지어서 내놓기 때문이다.
추수가 끝난 뒤 새로 올린 초가지붕이 새뜻해 보이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민가들.
내친김에 남쪽으로 길을 더 내달려 여수를 찾았다. 여수는 미항(美港)이자 미항(味港)이다. 시야에 잡히는 풍경마다 남녘 항구 특유의 따사로움과 정겨움이 묻어나고, 발길 닿는 곳마다 내로라하는 별밋집들이 미식가를 유혹한다. 청정해역인 순천만과 여자만, 그리고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여수는 그야말로 해산물의 천국이다. 돌산갓김치, 장어탕, 서대회, 노래미탕, 참장어데침회(유비끼), 금풍생이구이, 바다메기탕, 문어회, 피문어죽, 해물한정식 등 여수가 아니면 쉽게 맛볼 수 없는 별미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담백하고 맛깔스런 해물요리도 잇달아 먹으면 십중팔구 식상함을 느낄 터. 그럴 때는 여수시 학동 선소 부근의 일품매우 여수점(061-692-1616)을 찾아볼 만하다.
여수 돌산도 작금마을 앞 바다에서 배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
미항(美港) 여수의 아름다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 남쪽에 고구마처럼 매달린 돌산도다. 돌산도에는 겨울이 없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춘광춘색(春光春色)만 가득하다. 바닷가 구릉지대에는 싱그러운 초록빛 시금치와 갓이 무성하게 자라고, 햇볕 따사로운 산비탈에는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동백꽃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해안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니 바다를 온통 은빛으로 채색한 한낮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진다. 한 계절을 훌쩍 뛰어넘은 듯한 풍경만 본 탓일까. 봄날 오후의 춘곤증 같은 나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