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년 전에 읽었더라면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되돌아가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20년 전의 나라면 심리학이나 최면요법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심리학으로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가졌기에 밀턴 에릭슨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전의 나는 간절히 해답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내 답답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지금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라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뿐 아니라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등 수많은 이가 정신적 지주로 여긴 밀턴 에릭슨. 그는 최면을 신비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옮겨왔다고 평가받는 ‘에릭슨 테라피’로 유명하다. 그는 두 번에 걸친 심각한 소아마비를 자기최면과 무의식의 힘으로 이겨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에릭슨은 ‘무의식’을 ‘어떤 이상적 징후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문제 해결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어떤 첨단 심리학 이론이나 투약 처방보다도 ‘환자의 무의식’에서 가장 큰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에릭슨에게 치료자의 역할은 ‘내가 너를 고쳐줄게’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이미 치유력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무의식에 해답이 있다’는 아이디어는 지금과 달리 그가 한창 활동하던 1950년대까지는 매우 생소했다.
에릭슨 식 최면요법의 기본적 아이디어는 ‘가장 큰 걱정’을 환자 자신도 모르게 적극적으로 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는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긍정적 자기암시를 끌어내, ‘의식화한’ 불리한 정보는 망각하고 ‘무의식에 잠재된’ 유리한 정보는 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환자의 이야기만 듣고도 증상을 치유했다는데, 예컨대 환자의 머릿속에 가득 찬 ‘나는 왜 병이 낫지 않는 거지?’라는 비관적 생각을 망각하게 만듦으로써, 환자 자신에게 치유의 힘이 내재함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동부의 어느 여의사가 내게 전화해서 “우리 아들은 하버드대 학생인데요, 여드름이 아주 심해요. 최면으로 치료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래요. 그런데 굳이 나한테 데려올 필요가 있을까요? 크리스마스 휴가를 어떻게 보내실 계획입니까?”
“보통은 병원에 휴가를 내고선 밸리에 가서 스키를 타요.”
“음,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에는 아드님을 데려가세요. 오두막을 하나 구해서 거기 있는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없애세요. 식사도 안에서만 하고, 손거울은 핸드백 안주머니에 넣어두고요.”
그들은 스키를 타면서 휴가를 보냈고, 아들은 거울을 볼 수 없었다. 2주 만에 여드름이 말끔히 사라졌다. 여드름은 거울을 다 없애면 치료할 수 있다. 얼굴에 뾰루지가 나거나 몸에 습진이 생겨도 같은 방법으로 없앨 수 있다.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 중에서
2. 무의식의 힘 끌어내기
에릭슨은 최면을 통해 신비나 기적을 불러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최면은 ‘무의식과의 적극적인 만남’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적극성을 위해서는 ‘의식의 강한 자기방어’를 뚫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의식의 방어, 즉 ‘최면 따위는 통하지 않을 거야’라는 반항을 향해 에릭슨의 최면은 ‘잠시 네 생각을 다른 곳에 옮겨봐’라고 조언할 것이다.에릭슨은 환자에게 ‘내 치료에 저항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항의 방향’을 조절해준다. 예컨대 비행공포증을 앓는 환자에게 의자 하나를 지정해놓고, 그 의자에서 온갖 비행공포증을 체험하도록 최면을 유도한다. 그런 다음 ‘당신이 경험한 모든 공포증을 저 의자에 놓고 가라’고 말한다. 공포증을 한 의자에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어떤 곳에서도 공포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최면은 장기적이고 의식적인 자기 암시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도널드 로런스라는 포환던지기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려 했을 때 에릭슨의 조언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자 에릭슨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열여덟 살이야. 동메달만 따와도 괜찮아. 은메달이나 금메달은 따오지 말게. 그러면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니까. 페리와 오브라이언이 금과 은을 가져가도록 내버려두게나.” 에릭슨의 말대로 정말 페리와 오브라이언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가져가고 도널드는 동메달을 따냄으로써 그는 첫 출전 올림픽에서 ‘기대주’가 됐다.
4년 뒤 멕시코에서 올림픽이 열리자 도널드는 다시 에릭슨의 조언을 구했다. 에릭슨은 말했다. “이제 네 살 더 먹었군. 도널드, 금메달을 따도 괜찮아.” 에릭슨의 말대로 도널드는 멕시코올림픽에서도, 4년 뒤 도쿄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왔고, 이후에는 포환던지기 세계신기록을 세워갔다. 처음부터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조언했다면, 도널드는 자기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 있다. 처음에는 금메달을 따고 이후로는 내리막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담을 주지 않고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전진하도록 스스로의 잠재력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에릭슨은 도널드가 심리적 장애물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왔다.
에릭슨은 최면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무의식 속에 ‘우리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힘’이 숨어 있음을 강조했을 뿐이다.
3. 확산적 사고, 수렴적 사고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며 다양한 분야로 상상력을 확장하는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는 성인이 되면서 점점 퇴화한다. 성인들은 점점 ‘나는 원래 수학을 못해’ ‘나는 원래 음치야’…하는 식으로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제약을 두는데, 이런 것이 바로 ‘수렴적 사고(convergent thinking)’다. 수렴적 사고에 길들어버린 사람은 아무리 새롭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줘도 ‘자신이 원래 아는 이야기나 지식의 패턴’으로 모든 외부 정보를 환원시킨다. 확산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나뭇가지가 수천, 수만 개의 가지로 뻗어나가듯, 처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방향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몰고 나간다.우리는 의식을 스트레칭해 무의식의 근육을 이완시켜야 한다. 수렴적 사고가 우리 생각의 물꼬를 틀어막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추겨야 한다. ‘나는 몰라도 내 무의식은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가 지금 이토록 고민하는 문제를, 도저히 ‘의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무의식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에릭슨은 천사 같은 얼굴을 가졌으나 악마 같은 행동으로 간호사와 의사를 괴롭힌 루스라는 말썽꾸러기 소녀를 이렇게 치유했다고 한다. 병원의 온갖 기물을 파손하는 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루스 앞에서, 에릭슨은 일부러 침대보를 찢어발긴다. 루스가 침대를 부술 때 말리지 않고 오히려 에릭슨 자신이 더 신나서 침대를 부순다. 루스가 창문을 깰 때 옆에서 거들기도 한다. “루스, 벽에서 난방장치와 파이프를 떼어내자.” 에릭슨은 미친 사람처럼 난방장치를 뜯어내고 파이프를 해체한다. 에릭슨이 루스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간호사의 옷을 찢어버리자 그제야 루스는 정신을 차린다.
“에릭슨 선생님, 그런 짓 하면 못 써요.” 루스는 자신의 병실로 들어가 찢어진 침대보를 가져와 간호사를 덮어줬다고 한다. 물론 병원 사람들에게는 미리 말해두고 연출한 행위였다. 에릭슨은 사실 ‘루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네가 하는 행동이 남들에겐 이렇게 보인다고, 은유적으로 비춰준 것이다. 놀랍게도 루스는 그 후 아주 착한 아이가 됐다고 한다.
에릭슨은 환자가 지닌 관심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등의 방식으로 여러 명의 환자를 치료하면서 파라셀수스(1493~1541)의 명언을 들려준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모습대로 되고,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말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당신의 현실을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당신의 상상을 바꾸면 된다. 당신의 생각, 당신의 의식, 당신의 감정을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무의식과 대화해야 한다.
밤에 꾸는 꿈, 낮에 꾸는 백일몽, 억눌린 모든 감정,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모든 상처와 대화를 시작하자. ‘난 안 될 거야’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는 나쁜 상상과 싸우자.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스스로의 부정적 의식을 물리치자. 당신의 무의식은 당신의 의식을 향해 지금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을 알려줄 것이다. 무의식은 ‘내가 아는 나’보다 훨씬 총명하고, 지혜롭고, 관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