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정부는 선제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견인하기는커녕 평양의 행동에 따라 오락가락만 했다. 한치 앞도 못 내다보고 정책을 추진하기 일쑤였다. 목함지뢰 도발 다음 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진군’을 알리는가 하면, 목함지뢰 위기를 봉합한 8·25합의 이후 ‘남북관계 정상화’에 나섰으나 핵실험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북한과의 협력사업에 간접적으로 나랏돈 75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확정(1월 7일)하려다 하루 전(1월 6일) 핵실험이 터지자 없던 일로 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확고한 안보를 토대로 북한과 신뢰를 쌓아 평화를 정착시킨 후 종국엔 남북 모두 행복한 통일시대를 연다는 것.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은 동북아 평화를 지켜내고 구축하려는 시도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유라시아 대륙을 경제공동체로 묶고 북한 개방을 유도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남북관계가 파탄 국면으로 추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내놓았다. 한국의 독자 제재로 개성공단 중단 카드를 꺼낸 것이다. 청와대는 김정은에게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정부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인 이들은 그간 “선언은 거창하되, 처방은 빈약하다”고 꼬집어왔다. 신뢰외교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현실정치에서…’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국과 중국의 러브콜을 동시에 받는 것은 축복”(윤병세 외교부 장관)이란 믿음은 현실에 발 디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 역할론도 허상인 것으로 드러났다.
뒤통수 맞기 일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a에서 b로, 그리고 c로 나아가는 시퀀싱(sequenc- ing)을 강조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좋은데 작은 것을 어떻게 시작할지 전략이 없다”(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지적이 나왔다. a를 시작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면서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파탄 국면에 이르렀다.△나진-하산 철도 물류 프로젝트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경원선 철도 연결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각론이자 상징이다. ‘박근혜 프로젝트’로 불려온 이들 사업 또한 좌초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탓이 크지만, 정부의 대외정책 또한 실패한 것이다.
△나진-하산 철도 물류 프로젝트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경원선 철도 연결과 관련한 그간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를 다룬 이 글을 통해 박근혜 정부가 북한과 북한 핵을 올바르게 관리하기는커녕 ‘보여주기 식’ 위주의 정책을 구사하면서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대외 변수에 따라 오락가락만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북한도 8·25합의 이행 의지를 밝히고 있는 만큼 민간 통로 확대와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 남북관계 정상화에 힘써주길 바란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4차 핵실험 하루 전인 1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정보원과 외교·안보 부처에서 핵실험과 관련한 경보음을 울리지 않은 터라 박 대통령 또한 위기감을 갖지 않았던 듯하다. 김정은이 발표한 신년사를 비롯한 평양의 제스처를 오판해 뒤통수를 맞았다고도 볼 수 있다.
“투자해선 안 되는 사업”
통일부는 핵실험 직전까지 신년 업무보고의 골자를 ‘남북관계 정상화를 통해 비핵화를 견인하는 선순환’ ‘남북 교류협력의 진전과 심화’로 잡았으나 핵 도발 탓에 1월 22일 업무보고 방점은 ‘선(先)제재 후(後)대화’에 찍혔다. 박 대통령이 지금껏 강조해온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 경원선 남북 철도 연결,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등은 업무보고에서 거론되지 않았다.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 경원선 남북 철도 연결, DMZ 세계생태평화공원은 박근혜 프로젝트로 불린 만큼 서로 맞물리면서 물밑에서 속도를 내왔다. 이 사업들은 ‘3종 세트’로 연결돼 있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핵심은 한반도 종단철도(TKR)·시베리아 횡단철도(TSR)·중국 횡단철도(TCR)를 잇대 한국에서 유럽에 이르는 철길을 구축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다.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면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와도 조응한다고 정부가 설명할 만큼 선언은 거창했다.
북한의 나진과 러시아의 하산을 잇는 철길은 54㎞에 불과하지만 한국 위치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아가는 랜드 브리지(land bridge)다. “한반도 관통 철도의 초석”(홍용표 통일부 장관)이면서 “통일 기반 조성 사업의 일환”(통일준비위원회 관계자)이었다. 북한도 3차례 시범 물류 운송에 협조하는 등 호의적 자세를 보였다.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는 남·북·러 삼각협력 사업이다. 북한과 러시아가 30%, 70%씩 지분을 가진 북·러 합작사 나선콘트라스의 러시아 지분(70%) 중 49%를 한국 컨소시엄이 인수하는 계약이 추진됐다. 포스코·코레일·현대상선이 이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러시아 지분 중 49%를 확보하면 전체 지분율은 러시아(35.7%), 한국(34.3%), 북한(30%) 순이 된다.
‘신동아’ 2015년 5월호는 포스코·코레일·현대상선 컨소시엄의 실사(實査) 및 수익률 시뮬레이션 결과를 단독 입수해 “30년 후에도 적자사업… 포스코, 배임 시비 휘말리나” 제하 기사로 보도했다. 실사 및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나선콘트라스는 30년 이후에도 운영 수입이 차입금 이자, 운영비용 등을 감당하지 못해 적자를 면치 못하는 구조다.
신동아는 또 “포스코가 코가 꿰어 들어갔다”는 발언을 소개하면서 “공기업인 코레일과 금강산 관광사업 등의 독점권을 가진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과 달리 포스코는 수익이 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비합리적 가격에 지분을 인수하면 나중에 배임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계약 직전 ‘올 스톱’
한국 측 컨소시엄 한 관계자는 “민간 기업이라면 투자하지도 않고, 투자해서도 안 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러시아 지분 인수 본계약 체결 직전까지 도달했다. 이 관계자는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고 전했다.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인 2002년 5월 13일 김정일을 만났다. 2007년 출간한 저서에서는 “김정일과 한반도 종단철도,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계에 대해 공감대를 이뤘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당시에도 철도 연결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2013년 11월 방한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이 프로젝트에 합의했다.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는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도 고려해 진퇴를 고려해야 하는 사업이라는 측면이 있다.
러시아 지분 인수 계약은 오는 3월 체결될 것으로 알려져왔다. 급물살을 탄 것은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한국 측 컨소시엄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다. 정부는 한동안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기업이 경제논리에 따라 추진하는 사업으로,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문제는 결정된 바가 없다고 강조해왔다.
기업은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은 비즈니스에 무작정 뛰어들 수 없다. 이에 한국 측 3사(社)는 정부 지원을 요청했으며 정부는 남북교류협력기금에서 7500만 달러(약 900억 원)를 대출해주기로 했다. 1월 7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어 확정할 예정이었다. 하루 전 핵 실험으로 이 안건은 상정되지 못했다. 정부가 한치 앞도 못 내다본 꼴이다.
정부는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는 5·24조치(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협 중단)의 예외로 설명해왔으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논의와 미국과 국제사회의 추가 대북 제재 국면에서 이 프로젝트를 당초 계획대로 진행하기는 어렵고 진행해서도 안 된다.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정부가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에 국민 세금을 투입하기로 하면서까지 의욕을 보였으나 신뢰가 쌓이지 않은 남북의 엇박자로 인해 암초에 걸렸다고도 하겠다. 이 프로젝트는 북한 경제에도 실익이 적지 않다.
물거품 된 ‘철원의 꿈’
“경원선을 다시 연결하는 것은 한반도의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 복원해 통일과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박 대통령은 지난해 8월 5일 경원선 복원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출발점이라면서 이렇게 밝혔다. 경원선 복원은 1단계로 백마고지역-월정리역을 잇는 남측 9.3㎞ 구간을 박 대통령 ‘임기 중’인 2017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다. 군사분계선 및 북측 구간 연결은 남북 협의를 통해 진행해야 한다. “서울-원산-나진-하산(러시아) 철도 연결을 박근혜 정부의 ‘레거시(legacy, 유산)로 만들려고 했다”고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경원선 복원 또한 물거품이 될 공산이 커졌다. 북한 군부 또한 한반도를 횡으로 관통하는 경원선 연결에 난색을 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사업도 철도 연결과 맞물려 진행돼왔다. 파주, 철원, 고성이 입지 선정 경쟁을 벌였는데, 정부는 상징성 및 시너지 효과를 감안할 때 철원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공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철원은 복원을 시도하는 경원선의 배꼽 위치에 있다. 철원이 최적지로 평가받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라고 한다.
“파주는 접근성은 우수하지만 생태와 경관 등이 미흡하다. 고성은 경관이 우수한 데다 북한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수월하지만 접근성이 약하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심이면서 남북교통의 중심축이다. 생태 습지가 발달했으며 세계적 철새 도래지이기도 하다. 역사 유적(태봉국)도 갖췄다.”
기반시설 문제 등으로 인해 후보 지역 중 예산이 가장 많이 소요된다는 점이 철원의 약점으로 거론됐다고 한다. 남측이 일방적으로 후보지를 선정할 경우 북한의 비난, 탈락 지역의 반발, 북측과 협의 후 입지 변경 시 혼란 등을 우려해 입지 확정을 유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원선이 연결돼 서울에서 출발한 열차가 철원, 원산을 거쳐 나진, 하산, 시베리아, 유럽으로 내달리는 것은 분단 70년을 고려하면 꿈같은 일이다. 덧붙여 경원선 배꼽에 해당하는 철원에 DMZ 세계생태평화공원까지 들어서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현실로 한발 다가선다.
“선언은 거창, 처방은 빈약”
박 대통령은 지난해 8월 5일 경원선 복원 기공식에서 “여수와 부산에서 출발한 우리 기차가 서울을 거쳐 나진과 하산을 지나 시베리아와 유럽을 연결한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진군을 알리는 힘찬 기적 소리가 한반도와 대륙에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이 발언은 하루 전(8월 4일) 발생한 육군 1사단 지역 목함지뢰 도발이 북한 소행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나온 것이다. 목함지뢰 도발로 남북관계는 전쟁 위기로까지 나아갔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강해야 할 때는 강하고, 유연해야 할 때는 유연한”(윤병세 외교부 장관) 정책임을 표방해왔다. “북한이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북한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도록 변화의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강조했으나 “선언은 거창하되, 처방은 빈약하다”는 비판적 인사들의 지적이 현실로 나타나는 형국이다. 큰 그림은 화려했으나 도대체 북한 관리에서 뭘 했는지 성과를 찾기 어렵다. 북한의 변화를 유도했다기보다는 평양의 행동에 따라 서울이 오락가락한 양상이다.
목함지뢰 도발 다음 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진군”을 알리는가 하면 목함지뢰 위기를 봉합한 8·25합의 이후 “남북관계 정상화”에 힘쓰려 했으나 핵실험으로 뒤통수를 맞았고, 북한과의 협력사업에 간접적으로 나랏돈 75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확정(1월 7일)하기로 했다가 하루 전(1월 6일) 핵실험 탓에 선(先)제재 후(後)대화로 돌아섰다.
베이징마저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과 인공위성)을 향해 나아가는 북한 탓이겠으나 박근혜 정부 통일정책은 북한 핵을 관리하는 데 실패하고 남북 간 신뢰를 쌓지도 못했다. 박근혜 정부 임기는 사실상 1년 10개월 남았다. 2017년 12월 20일 19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북한과 북한 핵 관리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