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The Henry Graves Supercomplication)가 260여억 원에 팔려 시계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이 시계는 미국 뉴욕의 명품시계 수집가 헨리 그레이브스 주니어가 파텍필립 측에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를 주문하면서 만들어졌다. 디자인과 제작에만 8년이 걸렸고, 920여 개의 부품이 쓰였으며, 당시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24개의 최고 기능을 탑재했는데 피카소의 그림처럼 해마다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하이엔드(high-end, 고급품) 시계의 세계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복잡하고 정교한 제작 기술, 초고가의 가격대가 형성되는 이유뿐 아니라 어떤 고객이 그런 시계를 사는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파텍필립은 더욱 그렇다. 국내 대표적 명품시계 유통업체인 우림FMG 김윤호 대표에게서 명품시계에 얽힌 얘기를 들어봤다.
▼ 애플워치, 갤럭시 기어 같은 스마트워치처럼 편의성이 돋보이는 디지털 시계가 많은데 왜 기계식 명품시계 수요가 여전한가.
“기계식 명품시계의 고객 및 잠재 고객의 연령층은 대개 중장년층이다. 이들은 편의성보다 품위와 격식에 관심이 많고, 투자 등 장기적 안목에서 물건을 구매한다. 여성들이 패션 취향을 돋보이게 하려고 명품백이나 구두, 액세서리를 구입하듯 남성들도 자신의 품격 있는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는 소품으로 명품시계를 꼽기 때문에 수요가 꾸준한 듯하다.”
수학, 공학, 기하학 등 응용
“예컨대 파텍필립이 설립 175주년을 기념해 만든 5175R 그랜드마스터 차임 시계는 개발에 7년, 제작에 2년이 걸렸다. 1366개의 부품을 사용해 20개의 기능을 구현한 이 수동기계식 손목시계는 단 7개만 생산됐다. 6개는 개당 32억 원에 판매됐으며 1개는 파텍필립 박물관에 전시됐다. 제작에 투입된 인력과 기술은 현존 최고 수준이고, 시계의 정교함과 예술성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렇듯 최고 수준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수년 동안 예술작품을 완성하듯 만드는 데다 한정 생산으로 희소가치가 더해져 가격이 높아진다.”
▼ 하이엔드 시계에는 수학, 기하학, 공학, 미술(문양) 등 다양한 학문이 응용된다던데.
“인류는 15세기부터 시계를 만들었고 시간의 오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이를 위해 수학, 기하학, 공학 등 정교한 학문과 신기술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기계식 시계의 심장부인 밸런스휠에 실리콘 기술이 적용된 무브먼트(동력장치)를 개발했다. 무게가 가볍고 자기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데다 오일이 필요 없어 한층 더 정확하고 내구성을 높일 수 있다.
더욱이 파텍필립의 슈퍼컴플리케이션에는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까지 자동으로 맞춰주는 퍼페추얼 캘린더, 두 가지 계측이 가능한 서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같은 기능이 담겨 있다. 이밖에도 풍부한 멜로디의 웨스트민스터 차임(여러 음계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기계식 시스템), 프티 소네리(15분 간격으로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기능), 그랑 소네리(매 15분과 매 시에 시간을 소리로 알려줌), 문페이즈(다이얼 위에 구현한 달의 형상) 같은 매력적인 기능을 갖췄다.”
▼‘컴플리케이션’이란….
“시간과 날짜를 표현하는 시계 이상의 기능을 가진 시계를 컴플리케이션이라 한다. 크로노그래프, 애뉴얼캘린더, 월드타임 또는 듀얼타임,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레귤레이터 등이 있다. 그보다 더 복잡한 기능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은 퍼페추얼 캘린더, 플라이백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 천체 시, 투르비옹(중력으로 인한 시간오차 보정장치), 미닛리피터(시와 분을 소리로 알려주는 기능),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스카이차트 등의 기능 중 2개 이상 구현한 시계들이다.”
▼ 하이엔드 시계는 어떤 소재를 쓰나.
“시계 소재로 가장 좋은 것은 스테인리스스틸이다. 강도, 가공성, 내구성, 가격에서 강점이 많다. 귀금속은 기능성보다는 가치 제고와 미적 완성도 차원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파텍필립 모델들은 18k 로즈·화이트·옐로 골드와 백금 소재를 쓰며, 일부 모델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를 사용한다.”
▼ 기계식 시계엔 오차가 발생할 텐데.
“가장 잘 알려진 정밀 시계인 크로노미터는 일 평균 인증오차가 -4~+6초인데, 파텍필립은 20mm 이상 무브먼트는 -3~+2초, 20mm 미만 무브먼트는 -5초~+4초로 좀 더 엄격한 오차를 적용한다. 투르비옹 무브먼트는 더 엄격해서 -2~+1초 기준을 적용한다.”
▼ 파텍필립에는 어떤 종류의 시계가 있고, 연간 생산량은 얼마나 되나.
“현재 운영 중인 컬렉션은 칼라트라바, 노틸러스, 아쿠아넛, 일립스, 곤돌로, 투웬티~4, 컴플리케이션 등 7개 부문이다. 2014년 기준으로 약 4만5000개의 기계식 시계와 약 1만 개의 쿼츠 여성용 시계가 생산됐다. 매년 수요가 증가하지만 수요량의 3~5%만 증산할 수 있다. 숙련된 시계 장인이 워낙 소수인 데다 부품도 제한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왜 파텍필립을 사는가’
“고객과 제품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회사 정책이다. 모든 파텍필립 시계에 해당하진 않고, 그랜드컴플리케이션급 이상의 미닛리피터, 스플릿세컨드, 리미티드 에디션 등 특별한 시계 제품을 구매할 때 신상 및 구매 이력을 요청한다. 이런 시계들은 생산량이 극히 한정적이고 고객의 주문이 몇 년간 밀려 있어 실제 사용자를 가려내고, 중복 주문자를 파악하려는 목적도 있다.”
▼ 파텍필립의 세공, 예술성 등 마감이나 완성도는 어느 정도인가.
“파텍필립은 그 어떤 브랜드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예컨대 파텍필립 노틸러스의 경우 케이스 만드는 데만 65가지의 폴리싱 공정이 필요하다. 2009년부터 파텍에서 자체적으로 적용해온 PP 인장(Patek Philippe Seal) 기준은 무브먼트뿐만 아니라 시계의 외관, 미적 기준, 고객 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가치와 품질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 흔히 명품시계 구매자와 미술품 컬렉터를 비슷한 유형으로 분류한다. 명품시계를 파는 사람은 미술품을 소개하는 큐레이터와 비슷할 듯하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미적 감각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미술품 컬렉터와 명품시계 구매자는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고 본다. 20여 년 전 처음 시계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시계를 단순히 하나의 상품으로 대했다. 그런데 시계의 가치를 점차 알아가고, 특히 제네바의 파텍필립 박물관을 다녀온 뒤엔 시계라는 예술품을 파는 미술관장 역을 자임하게 됐다. 2001년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소유주인 스턴가(家)가 수집한 2000개 이상의 특별한 시계, 16세기 뮤지컬 오토마통(기계식 자동인형), 미니어처 에나멜 작품, 서적, 공구 등 8000여 점의 시계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그런 역사적 컬렉션을 보면서 파텍필립이 추구하는 가치, 기술, 미적 감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고전과 혁신의 키워드
고전과 혁신은 파텍필립의 역사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올해로 창립 177년을 맞는 파텍필립은 고전적이지만 때로는 아주 혁신적인 제품으로 유행을 선도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차이콥스키와 바그너, 록펠러, 아인슈타인 등 왕족과 저명한 정치가, 예술가, 과학자들이 이를 애용했다.1839년 폴란드를 떠나 스위스로 이민 간 귀족 앙투안 드 파텍이 시계 장인 프랑수아 차펙과 함께 제네바에 세운 파텍차펙이 이 회사의 시작이다. 이후 용두(태엽 감는 꼭지)로 시간을 조정하는 와인딩 장치 개발자 장 아드리앙 필립이 합류하면서 회사 이름이 파텍필립으로 바뀌었다. 1932년 찰스·스턴 형제에게로 넘어가 현재 4대째 가족 경영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