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호

정신과전문의 최명기의 남녀 본색

죽음을 부르는 열정과 섹스

치정살인, 이별살인, 동반자살…

  • 최명기 |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 ‘작은 상처가 더 아프다’ 저자 artppper@hanmail.net

    입력2016-03-03 15: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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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는 평균수명 40세이던 석기시대가 아니다. 경제적, 인격적 능력만 갖추면 내게 맞는 이성과 맺어질 수 있다. 도시의 익명성 덕에 소문도 잊힌다. 그러니 제발 죽일 만큼 사랑하지 말자, 죽을 만큼 사랑하지도 말자, 함께 죽지도 말자.
    어릴 때 영화 ‘카르멘’을 본 적이 있다. 순박한 군인 호세는 카르멘의 유혹에 넘어가 약혼녀를 버리고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호세는 카르멘을 구하기 위해 감옥에 간다. 출옥한 뒤에는 카르멘을 좇아 범죄자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카르멘은 호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카르멘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조롱하는데 격분한 호세는 카르멘을 찔러 죽이고 만다.
    섹스란 것을 모르던 어린 나는 호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르멘보다 더 예쁘고 착한 약혼녀를 버리는 것도, 감옥에 다녀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카르멘을 따라다니는 것도,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칼로 찔러 죽이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 ‘카르멘’뿐이랴. 베르디,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 중 상당수는 ‘치정살인’을 다룬다. 1년에도 수도 없이 많은 영화가 쏟아져 나오지만 이 모든 영화의 줄거리를 분석하면 딱 3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폭력영화, 사랑영화, 그리고 폭력과 사랑이 결합된 치정물이다.
    현실에서도 그러하다. 흔히 살인이라고 하면 연쇄 살인범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걸 떠올린다. 하지만 국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살펴보면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는 가족(23.6%), 친구 및 애인(13.9%), 지인(11.6%), 직장인(5.1%), 이웃(4.4%) 순으로 나타난다(2012년). 대부분의 살인이 낯이 익은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전체 살인사건 범죄자 중 남성이 82.9%인 점을 고려하면 남성이 아내, 전처, 여자친구를 죽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돈이 목적이거나, 증거인멸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이 아닌 경우, 남성이 남성을 죽이는 상황 역시 치정에 얽힌 경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가장이 자녀를 죽인 것도 아내를 먼저 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인을 저지른 여성도 남편, 전남편, 남자친구를 살해한 경우가 많다. 여성이 자녀를 살해할 때에도 대개 남편에 대한 분노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과 살인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랑에 얽힌 살인을 유형별로 살펴보자.
    우선 아내의 외도를 참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미국 텍사스 주에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광경을 남편이 목격하는 경우 그 자리에서 아내와 상간남을 살해해도 정상 참작을 하는 법 조항이 있었다(논란 끝에 1974년 폐지됐다). 여성의 인권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부 국가에서는 지금도 불륜을 저지른 여성을 잔인하게 처벌한다. 아내가 외도를 하거나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것에 남자들이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하는 이유는 뭘까.
    원시시대에는 유전자 검사도 없었고 혈액형도 알 수 없었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출산하더라도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만약 수개월 이상 아내와 성관계를 하지 않았는데 임신했다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서 임신한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몰래 관계하는 시기에 나와도 관계를 가진다면 남자로서는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다. 다른 남성의 아이더라도 모르고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질투심을 느낀 남자는 더욱 격렬하게 성관계를 갖는 경향이 있다. 어떤 놈이 내 아내의 자궁에 정액을 뿌렸을지 모르니까 내가 더 많은 정액을 뿌려서 이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정자(精子)살인’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 여성이 아주 짧은 시간을 두고 두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경우 여성의 자궁 안에서 한 남자의 정자가 ‘경쟁 상대’인 다른 정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져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현대사회에선 입양도 권장된다. 재혼을 하면 의붓아버지가 돼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녀를 돌봐야 한다. 그러니 일단 아내가 낳은 이상 남의 자식인지, 내 자식인지 의심할 필요 없이 ‘그저 내 자식이려니’ 하고 키우면 된다고 주장하는 남편도 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성병으로 불임이 된 남성이 아내가 임신하면서 겪는 갈등을 담았다. 이 소설이 출간된 일제강점기만 해도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한집 형제들 중에도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굶어죽었다. 만약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알고 양육하는 경우, 다른 남자의 아이로 인해 정작 자신의 아이가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이렇듯 아내의 외도로 인해 내 자식이 죽을지도 모르기에 남자들은 더 격분했던 것이다.
    더구나 아내가 아비가 다른 자식을 남긴 채 남편을 떠난다면 재앙이 벌어진다. 조선시대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 마을 주민들이 서로를 위해주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웃사촌’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내 자식 키우기도 빠듯한데 남의 자식 키워줄 여유가 없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면서 자식을 다 잘 돌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다. 앞에서 봤듯 남의 자식을 키우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석기시대부터 남편은 아내의 외도에 격분해왔다. 외도를 한 아내에 대한 격분은 여성으로 하여금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와의 관계는 꿈도 못 꾸게 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동맹을 맺어 남자의 외도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여자의 외도는 가혹하게 처벌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질투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면 여자는 달아난다. 남성의 과도한 질투로 괴로움에 시달리는 여성은 이혼을 요구한다. 남자들도 이제는 바뀐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들 중 일부는 아직 과거의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격렬한 분노와 폭력을 통해 여성의 외도를 차단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선을 넘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아내를 죽인 남편 대부분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죄를 줄이려는 속셈이겠지만 진심일 수도 있다.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  하고 싶은데 아내가 방해물인 경우를 제외하면 남자가 여자를 죽여서 얻을 이익은 없다. 게다가 둘 사이에 자녀가 있을 경우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양육해야 한다.
    원시시대라면 아내를 죽이고 은폐할 수도 있었다. 아내의 외도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덮어씌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다. 따라서 애초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는 남편의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이다. 분노의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질 끝에 살인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유전자를 남길 기회

    살인은 연인 사이에도 일어난다. 이런 경우,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겁에 질리거나 얼이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인을 무효화하고 싶다. 피해 여성의 얼굴을 이불로 덮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바로 눕히기도 한다. 시체의 피를 닦아내기도 한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시체와 몇날 며칠을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러다 자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살을 시도한다.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확실할 때 벌어지는 것이 ‘이별살인’이다. 이별살인은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거나, 남자의 사회적 지위가 여자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경우에 주로 발생한다. 전과자에다 무직인 남자가 명문대를 나온 전문직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여성을 사귄 경우가 있다. 여자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 헤어지려 하자 남자가 여자를 살해했다.
    흔히 남녀가 헤어지면 ‘세상에 깔린 것이 여자(혹은 남자)’라고 말하면서 위로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100년 전만 해도 대부분 시골에서 마을 단위로 살았다. 장날에 읍내라도 나와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50~100명 안팎의 마을 사람들 중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 임신이 불가능한 노인, 어린이를 빼면 혼인 적령기의 남자와 맺어질 수 있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축첩(蓄妾)이 가능한 시기에는 그나마 괜찮은 여자들을 부와 권력이 있는 이들이 차지했다. 평범한 남자가 괜찮은 여자와 사귈 확률은 극히 낮았다.
    이런 현실에서 여자에게 버림받으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기회가 어쩌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그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면 그 남자의 유전자가 세상에 더 많이 퍼지게 된다. 내가 기회를 잃는 만큼 타인이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남자로서의 매력도 떨어진다. ‘오죽 능력이 없으면 여자에게 버림받았겠냐’는 평판이 돌면, 여자들은 그 남자를 기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할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살인 욕망에 사로잡힌다. 여자를 죽일 수 없다면 경쟁자라도 제거해야 한다. 전남편이 현재의 남편을 죽이기도 하고, 현재의 남편이 전남편을 죽이기도 한다. 지금 남친이 전 남친을 죽이기도 하고, 전 남친이 지금 남친을 죽이기도 한다.



    화풀이 대상 찾기

    아내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경우, 혹은 아내를 죽이지 못하는 경우 다른 대상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예컨대 자신을 떠나면 여자의 가족을 해치겠다고 협박하는 남자들이 있다.
    협박에 그치지 않는 수도 있다. 실제로 여자의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다. 아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가 식구들을 협박하다 죽이기도 한다. 아내와 헤어지도록 종용했다고 처가 식구들에게 보복하기도 한다. 처제를 성폭행한 남자의 심리엔 아내가 자신을 떠났으니 아내의 동생을 대신 아내로 취하겠다는 무의식이 반영됐을 수 있다.
    의붓자식에게 범죄행위를 하기도 한다. 아내더러 자신에게 오라고 의붓자식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다. 아내가 오지 않으면 아내 대신 의붓자식을 죽인다. 여자에게 가장 잔인한 고통을 주기 위해서다. 재혼 가정에서 아내가 떠난 후 남편이 의붓딸을 성폭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서 본 것처럼 처제를 성폭행하는 것과 같은 본능이다. 아내가 자신을 떠났으니 의붓딸을 대신 아내로 취해야겠다는 것이다.  
    아내나 애인이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한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례도 있다. 남자로서의 능력을 무시당하면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다. 여자가 외도한다는 증거는 없지만 자신이 남자로서 무능력하면 여자가 결국 다른 남자에게 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여자가 섹스를 거부하거나 성적인 능력을 모욕하면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자가 모욕을 당한다고 느끼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무시당하는 게 싫고, 조롱받는 게 싫다면 여자를 떠나면 된다. 하지만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히다 보면 여자가 죽어 없어지기 전에는 자신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이 여자를 떠나면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내를 죽이고, 여자친구를 죽인다. 이처럼 살인의 동기가 증오일 때 살해 방법은 잔인하다. 수십 차례 흉기를 휘둘러 난자하거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망가뜨리기도 한다. 여성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기도 한다. 



    죽음에 準하는 혼돈

    아내를 죽이면서 자식을 함께 죽이는 남편도 있다. 자신은 감옥에 가고 아내는 살해되고 없으니 자식을 키울 사람이 없다. 내 자식이 부모 없이 살거나, 살인자의 자식으로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경우 가장 합리적인 대안은 남편이 아내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히면 맹목적이 된다. 자신에게 지긋지긋한 아내이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지긋지긋한 어머니가 될 것이라 여긴다. 이렇게 지긋지긋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느니 자식들도 죽기를 원할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자녀가 아버지인 자신을 싫어하는 경우 자식에 대한 분노도 생겨난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가 없을 때 아내와 다른 자녀를 죽이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만 살아남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는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미워하는 자녀는 ‘이상한 어머니’ 밑에서 부적절한 양육을 받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일가족 동반자살의 경우 부모가 모두 죽음에 동의한 경우도 있지만, 남편이 아내를 살인하고 자식도 죽이면서 결과적으로 동반자살이 되는 사례도 있다.
    열정 혹은 섹스가 죽음을 불러오는 이유는 뭘까. 혹자는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곧 한 생명이 죽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 단세포 동물이었다. 단세포 동물이 두 개의 세포로 갈라지면 새로운 생물이 탄생한다. 그런데 원래 단세포 동물 처지에서는 자신의 몸이 둘로 갈라지는 순간 죽음을 맞게 된다. 반대로 새로운 두 개의 세포로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물론 인간은 단세포 동물이 아니다. 섹스를 한다고 매번 임신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더욱이 피임을 한다면 섹스를 아무리 많이 해도 임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섹스에는 죽음에 준하는 혼돈과 강렬함의 냄새가 풍긴다. 그래서 섹스를 하고 나서 잠시 허탈한 공허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을 어떤 이는 일시적인 정신적 죽음에 비유한다.



    유전자의 치명적 속삭임

    단세포 동물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인류가 됐다. 남성과 여성은 섹스를 통해 서로의 유전자를 맞바꾼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을 ‘유전자 전달자’라고 정의한다. 부모를 ‘진본’, 자식을 ‘카피본’으로 일컫는다. 진본인 부모는 자식이라는 카피본에 각자 정확히 2분의 1씩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한다. 자식의 염색체 2분의 1은 아버지로부터, 나머지 2분의 1은 어머니에게서 유래한다.
    석기시대에는 40세를 넘겨 살아가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개 10대 중반~20대 초반에 자식을 낳고, 자식이 성인이 되기까지 키운 뒤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죽음을 맞았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 시절에는 유전자 전달체로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였다. 유전자를 전달할 기회를 잃어버리면 삶은 의미가 없다. 치정살인, 이별살인의 당사자는 사랑 때문에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뇌 속 유전자의 속삭임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맹목적이 된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100세에 달한다. 생식 후 연령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옛날에는 먹고, 일하고, 생식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지금은 인간으로서 느껴야 하는, 그리고 느낄 수 있는 너무나 다양한 즐거움이 존재한다. 유전자 전달자로서의 삶에 지배돼선 안 된다. 우리 조상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 살아간다. 경제적, 인격적으로 능력만 갖추면 내게 맞는 이성과 맺어질 수 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도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에 대한 소문은 도시의 익명성 덕에 잊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제발 죽일 만큼 사랑하지 말자. 죽을 만큼 사랑하지도 말자. 함께 죽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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