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임 상식 제로…아들 낳을 때까지 ‘무한도전’
- 국민소득 78달러 시대의 ‘불가피한 선택’?
- 예비군 집중 공략…아파트 청약우선권 혜택
- 정관수술 보험 적용 마지막 날 종일 북적북적
- 180도 바뀐 정책…“아빠! 혼자는 싫어요”
요즘 젊은 세대에겐 ‘보릿고개’라는 말이 낯설 것이다.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라면 그 시절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얼마나 처절하게 살았는지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한 집에 아이가 보통 7, 8명이었다.
이처럼 아이를 많이 낳은 가장 큰 이유는 남녀 모두 피임 상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임의 필요성도 인식하지 못했다. 농경 중심 사회에선 아이를 노동력으로 여겼기에 많이 낳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더욱이 열악한 위생상태와 영양실조 등으로 죽는 아이가 많았던 탓에 말 그대로 생기는 대로 낳았다.
끝순이 말순이 말숙이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의 ‘실수’로 운 좋게 아들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아들을 낳은 집은 대문 기둥에 금줄을 매달았고, 남편과 시어머니는 온 동네에 자랑하러 돌아다녔다. 딸을 낳으면 남편은 아이 얼굴도 보지 않고 동네 주막으로 달려가 술잔을 들이켰고, 시어머니는 갓 출산한 며느리 앞에서 손자타령을 해댔다.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예부터 아들을 중시했다. 집안의 대를 잇고 조상을 모시는 일이 중요했다. 아들을 못 낳은 며느리가 쫓겨나지 않으려면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이를 낳든지, 남편이 첩을 둬 아들 낳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여성의 건강과 행복은 무시되고 오직 아들을 낳기 위해 임신과 출산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법조차 아들과 딸의 상속 권리를 차별하고 남자가 가계를 승계한다는 전통의식을 인정했다.
정부의 가족계획은 이처럼 왜곡된 사회의식과 구조를 바꾸기 위해 시작됐다. 1960년부터 시작한 가족계획사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산업이래야 대부분 농업이었고, 2차산업의 존재는 미미했다. 1인당 국민소득(GNI) 78달러. 세계 최하위 국가군으로 분류됐다. 당시 어느 신문의 사설 제목이 이랬다.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알자.’
우리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기아와 빈곤 해결. 그 대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가족계획이다. 1955~1960년 우리나라의 인구 증가율은 약 3%. 다른 선진국에 비해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정부는 인구 억제 정책을 민간 주도로 추진하기 위해 1961년 4월 1일 대한가족계획협회(이하 협회)를 발족했다. 협회 설립 취지문의 일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가족계획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임신횟수 및 터울을 조절함으로써 도의적으로나 모성 건강을 위해 좋지 못한 임신중절을 피하고 원치 않는 수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태어난 자녀에 대해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잘 양육하게 함으로써 적절한 자녀 수를 유지하고 명랑하고 윤택한 가정생활을 이룩하고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에 있다.’
협회는 한 달 뒤 발생한 5·16군사정변으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바로 다시 열고 6월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에 가입했다. 당시 정부나 지식인들은 가구당 가족 수가 너무 많다 보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봤다. 나아가 국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1961년 11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인구 억제정책을 병행하기로 했다.
차범근 “하나만 더 낳고…”
정부가 내세운 가족계획 표어나 포스터에는 당시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1961년 가족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표어는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기르자’였다. 대책 없이 닥치는 대로 낳을 게 아니라, 경제적 능력에 맞게 적당히 낳아 제대로 키우자는 얘기다. 이어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적게 낳아 잘 기르면, 부모 좋고 자식 좋다’ 등 비슷한 취지의 표어들이 등장했다. 사회적 인습과 전통 등 국민의식 전환에 중점을 둔 것이다.1966년에는 ‘세 자녀 갖기 운동’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부는 세 자녀를 3살 터울로 35세 이전에 낳자는 취지의 ‘3·3·35 원칙’을 올바른 가족계획이라고 소개하면서 홍보 영화까지 동원했다. 1970년대는 한 명이 더 줄었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정부는 국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가족계획을 실천하는 가정에 각종 지원책을 내놓았다. 세 자녀 이하까지 세제 혜택, 여성 상속권을 인정하는 가족법 개정, 두 자녀 불임수술 가정에 공공주택 입주 우선권 제공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독일에서 활약하던 축구선수 차범근 가족을 내세운 포스터도 등장했다. 차범근과 부인, 딸이 함께 나와 “하나만 더 낳고 그만두겠어요”라며 가족계획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유명 스포츠 스타를 앞세운 이 포스터는 어떤 강연보다도 설득력이 있었다.
1980년대의 대표적 표어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이는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급기야 1990년대에는 ‘고운 딸 하나 백 아들 안 부럽다’는 표어까지 등장했다. 대가족 중심에서 소가족 중심으로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남아선호사상이 퇴색한 것과 무관치 않다.
종족 번식권 vs 청약 우선권
정부는 1962년 3월 1일 전국 시·군·구 보건소에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계몽지도원을 배치하고 콘돔, 질내 삽입 피임정제, 피임약, 젤리 등을 무료로 보급하기 위해 예산을 집중 편성했다. ‘가족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대책 없이 아이 낳는 집을 단속하겠다며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권장하고, 여성에게는 ‘피임시술’을 장려했다. 그래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나.정부가 남성에게 정관수술을 독려한 것은 수술비용이 크게 들지 않으면서 영구적으로 피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사후 관리가 필요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혔다. 정부는 정관수술 건수를 늘리려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대한가족계획협회는 1964년 4월부터 의사들에게 정관절제수술교육 및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정관수술비는 500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 수술을 받은 남성에게 사후 치료비는 물론 회복기간 중 근로보상금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했다. 수술 대상자에게 수술을 받게 한 보건지도원이나 계몽원에게는 별도 활동비를 지급했다. 정관수술 부작용 치료를 위한 ‘피임시술 사후 관리위원회’도 중앙과 지방에 설치했다. 하지만 갖가지 유인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술 건수가 급증한 건 1974년 정부가 인구 억제정책 중 하나로 예비군 훈련기간에 정관수술을 받도록 하면서다. 예비군 중에는 젊은 기혼자가 많았는데 이들을 가족계획사업에 동참시킨 것은 절묘한 아이디어였다. 정부는 예비군들에게 다양한 ‘당근’을 제시했다. 1977년 12월에는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에게 주공아파트 및 주택부금아파트 분양 우선권을 부여한다고 발표했고, 1982년에는 국방부 훈령으로 예비군훈련 중 정관수술을 한 사람에게 훈련 잔여시간을 면제해줬다. 기혼자는 예비군 잔여훈련 면제 혜택과 더불어 수술비 면제, 아파트 분양 우선 혜택 등 경제적 이득까지 챙길 수 있었다.
내 집 마련 열기와 더불어 청약 우선권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덕분에 수술 건수도 2배 이상 늘었다. 분양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끈 서울 강남의 모 아파트는 정관수술자가 청약우선권을 갖게 되면서 ‘고자 아파트’ ‘내시 아파트’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에 힘입어 정관수술 참여자는 1984년 최고치를 찍었는데, 그해에만 8만3527명의 남성이 수술대에 올랐다. 자녀 1~2명을 둔 30대가 가장 많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느덧 60대가 됐다. 얼마 전 그 또래의 한 남성이 진료실을 찾았다. 전립선 비대증 초기 환자였는데 “혹시 젊을 때 정관수술을 했기 때문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지갑 속에 오래 보관해온 듯 꼬깃꼬깃하고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보여줬다. 정관수술 증명서였다. 30대 때 아파트 청약 우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쪽지였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아파트 청약을 하지 못해 기념으로 갖고 다닌다고 했다. 종족 번식 기능을 아파트 청약 우선권과 맞바꾼 것에 대한 미련과 불안 때문일까. 어찌됐든 정관수술은 전립성 비대증과는 무관하다.
癌 유발 논란에 거부감
잘못된 성 상식 때문에 정관수술을 기피하는 일도 많았다. 정관수술을 받으면 ‘정액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정력이 떨어진다’는 등 성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저런 핑계로 몸에 칼을 대기 싫은 남편 대신 아내가 영구 피임술인 난관 절제수술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남편의 성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수술을 받는 게 낫겠다는 비상식적 판단에서였다.정부는 여성에게 자궁 내 장치인 루프 삽입시술을 권장했다. 루프는 한번 시술하면 제거하기 전까지는 피임효과가 지속돼 효과적이지만,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부작용 등으로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1968년부터 루프 시술에 실패한 여성에게는 먹는 피임약을 제공했다. 스웨덴이 무상원조한 피임약이었다. 여성의 영구 피임법 중 나팔관 절개 수술은 개복을 해야 할 정도로 큰 수술이다. 그 때문에 제왕절개수술 등 개복수술을 한 사람 중 희망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시술이 이뤄졌다.
1976년 이후 일명 ‘배꼽수술’로 불린 복강경 수술법 등 한층 수월한 방식이 보급되면서 수술 건수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골반이나 허리 통증 등 수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여성의 난관수술은 남성의 정관수술보다 훨씬 어렵고 부작용이 심각한데도 정관수술보다 훨씬 많이 행해졌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단체들은 대한가족계획협회와 손잡고 ‘남성이 더 피임하는 해’를 선포하기도 했다.
먹는(경구용) 피임약이 국내에 보급된 것은 1960년대 후반. 정부의 가족계획 차원에서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에게선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시판 초기라 부작용이 생각보다 심했다. 더욱이 당시 보수적인 사회 정서상 피임약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약을 먹으면서까지 성생활을 즐기는 여성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임약을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것도 귀찮고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에 한 달분을 복용하면 안 되느냐는 문의가 많았고, 한꺼번에 많은 약을 먹고 하혈을 하며 병원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당시엔 피임약을 복용법대로 먹기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먹는 여성이 더 많았다.
먹는 피임약이 암 논란에 휩싸인 것도 비슷한 시기다. 1968년 미국 뉴욕 주 의원선거에 출마한 후보자가 “먹는 피임약이 암을 유발하는데 한국에 대량 보급됐다”고 주장한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서 먹는 피임약에 대한 한국 여성의 거부감을 더욱 키웠다.
사실 먹는 피임약은 오랜 피임의 역사에서 이른바 ‘성의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생화학자 그레고리 핀커스가 개발한 최초의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 10’은 1960년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판매 승인을 받았다. 핀커스는 여성이 임신 중에는 다시 임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여성의 몸엔 임신 중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급격히 많아지는데, 먹는 피임약은 임신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호르몬 수치를 높여주는 성분으로 만든 것이다. 이 약이 등장하면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임신이 두려워 성관계를 기피하지 않게 됐다.
초기에 판매된 약은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부작용 논란을 일으켰다. 피임약 한 알에 무려 150ug의 합성 에스트로겐이 들어 있어 피임 효과는 컸지만, 고혈압, 부종, 혈전 등이 나타날 위험도 그만큼 높았다. 한때는 암이나 비만을 유발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먹는 피임약은 발전을 거듭해 최근에는 용량을 과거의 20%대로 낮춰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정관을 이어라’ 特命
그런데 요즘은 저출산율이 국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며 출산을 장려하느라 여념이 없다. 정말 ‘인구가 국력’이라는 말인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시대가 바뀌면서 인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인구를 줄일 게 아니라 늘려야 한다는 것. 그렇다 보니 산아정책도, 구호도 정반대로 바뀌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하나보단 둘, 둘보단 셋이 행복합니다’ ‘하나의 촛불보단 여러 개의 촛불이 더 밝습니다’ 따위의 구호가 등장했다.우리 정부의 산아정책사에서 2004년 11월 30일은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정부가 주도해온 가족계획 사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정관수술부터 막았다. 그동안은 가족계획 사업이란 명목으로 국가가 정관수술비를 지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건강의료보험으로 대체했다. 결국엔 수술비 전액을 본인 부담으로 돌리겠다고 정반대로 선회했다. 대신 정관 복원수술에 대해선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했다. 정관을 끊는 건 막고, 다시 잇는 건 적극 장려하는 것이다.
정관수술이 의료보험 적용을 받은 마지막 날인 2004년 11월 30일, 전국의 비뇨기과는 정관수술을 받으러 온 남성으로 온종일 북적였다. 당장 내일부터 보험 혜택이 없어진다는 말에 그동안 수술을 망설이던 남성들이 병원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엔 의료보험 적용을 받아 수술비 8만460원 중 본인부담금이 3만 원밖에 안 됐으나 보험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하루아침에 30만 원으로 10배가 뛰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 명동에 위치한 필자의 병원에도 주변 회사원들이 몰려들었다. 평소 하루 1, 2건 하던 정관수술을 이날 하루에만 30건 넘게 했다. 예비군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수술할 때를 빼놓고 하루에 그토록 많은 정관을 자르기는 처음이었다.
엊그제까지 정부를 대신해 정관수술을 권장하던 필자에게 언제부턴가 “저출산 대책과 관련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구호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요즘 필자의 병원에 정관수술을 상담하러 오는 남성이 있으면 반드시 자녀가 몇 명인지 물어본다. 한 명이라고 하면 부인과 한 번 더 상의하고 오라며 돌려보낸다. “하나는 너무 외롭지 않겠느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