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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혁명의 그늘 흔들리는 영업·판매직

정보 혁명의 그늘 흔들리는 영업·판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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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나만은, 내 직장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에 사로잡혀 사는 이가 적지 않다. 이른바 ‘신(新) 러다이트족(族)’이다.

역사적으로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1811~1917년 영국 직물공업지대에서 일어났던 기계파괴운동을 뜻한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에 기계가 널리 보급되자 실직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정부와 격한 대치 끝에 살해당하거나 반대로 살인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황한 정부가 지도부에 교수형과 국외 추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후에야 운동은 잦아들었다.

신 러다이트족이란 이에 비추어 디지털 혁명기의 진통을 대변하는 집단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신기술을 이해하거나 적응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또는 인터넷이 현실 공동체나 기존 체제를 파괴하고 바람직한 가치관을 와해시킬 것이라 믿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성향은 특히 30대 후반 이후의 중간관리자층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처럼 지연, 학연 등 ‘인맥’을 통한 영업 비중이 큰 나라에선 사이버 거래가 자리잡기 힘들 것 ▲전자상거래가 확대된다 해도 경제 사정이 호전된 만큼 실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적어도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동안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일거리가 없어 놀 날이 오겠느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봤듯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고용 구조의 변화는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영업사원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업체들은 이미 전용 쇼핑몰 운영 뿐 아니라, 전자상거래 전문 사이트와도 광범위한 제휴를 준비중이다.



쌍용자동차는 한솔CSN과 사이버 차량 판매권 부여 및 차량 공급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기존 인터넷 판매 업체들이 자동차 제조업체와의 공식적인 권리 위임 계약 없이 사이트를 열어 갈등을 빚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솔 측은 쌍용자동차로부터 차 판매 전 과정을 총괄할 수 있는 전면적인 사이버 판매권을 위탁받았다.

노조의 ‘단속’을 피해 인터넷 판매업체와 거래하고 있는 한 자동차 대리점 사장은 “솔직히 손해본 것은 없다. 오히려 (전자상거래를) 제대로만 운영하면 지금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영업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회사 쪽도 지금은 대리점이나 영업 사원들 눈치 보느라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인터넷으로 차를 사는 일이 당연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은행 및 증권사들도 사이버 거래 확대로 생겨날 잉여 영업사원들에 대하여 ▲재교육 실시 후 업무 변경 ▲고용 조건의 전환 ▲인원 감축 등 다양한 방안들을 놓고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증권연구원 노희진 박사는 “일거리가 줄어든 증권사 직원들은 회사가 실시하는 재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파이낸셜 플래너나 컨설턴트 같은 자산운용 전문가로 키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직원이 이 프로그램을 통과할 수는 없다. 미국의 경우 파이낸셜 컨설턴트가 되려면 2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일종의 자격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평균 합격률은 40%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은행 쪽도 마찬가지다. 이미 몇몇 시중은행에서는 대리점 축소와 정보화 진전으로 생겨난 잉여 인력들을 전문영업인이라는 이름으로 노트북 하나 들려 점포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가만히 앉아 고객을 기다리지만 말고 발로 뛰어 찾아내라는 주문이다. 이 역시 세일즈 감각이 뒤떨어지거나 내근 쪽이 더 적성에 맞는 이들에게는 ‘나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심화되는 소득 격차

상황이 이런만큼 노동계 일각에서는 인터넷 혁명으로 인해 실업률이 증가하고 고용 불안이 가중되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9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지금의 한국처럼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비즈니스 리엔지니어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산업 구조 변화는 정보통신 분야를 제외한 전 부문의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 1991년 105만 명, 1992년 80만 명의 고용 감소가 일어났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의 진전으로 정보통신 관련 업종 및 서비스업에서 신규고용이 창출돼 92년 7.5%에 이르렀던 실업률은 99년 현재 4.2%까지 하락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보고서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단기적으로는 실업률이 증가할 수 있겠으나 새 경제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경우 장기적으론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 곧 해소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경제 전문가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 허재준 박사는 “미국 경제 호황의 이면에는, 정보통신 관련 전문지식인의 소득은 급팽창한 반면 그렇지 못한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은 현상 유지에 급급한 구조적 문제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실업률은 떨어졌을지 모르나 대다수 국민의 삶의 질까지 향상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도리어 상위 20%에 속하는 계층의 소득이 하위 20%보다 10배 이상 많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신(新) 빈부격차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통계청은 최근 ‘99년 4·4분기 도시근로자 가계수지 동향’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수치가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심함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3204에 달해, 통계청이 이 계수를 파악하기 시작한 79년이래 가장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지니계수가 0.4를 웃돌면 불균형의 정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판단한다.

빈부격차 심화는 미국뿐 아니라 정보통신 중심 지식 산업이 득세하고 있는 선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 이른바 e-엘리트층에 부가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근로자들에겐 최소한의 일자리와 임금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임금 격차 심화에 대해 실물 경제에 밝은 전문가들은 ‘경제 논리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당연한 현상’이라 말한다. “임금이란 노동의 대가다. 근로자가 회사에 기여한 만큼 받는다면 그것이 곧 정당한 액수다. 미국 애플 컴퓨터 CEO 스티브 잡스는 지난해 연봉 외에 약 2700억 원 상당의 주식과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20억 달러에 불과했던 회사의 시장가치를 160억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에 비하면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다.” 이화여대 경영학부 김성국 교수의 설명이다.

다시 미국의 예로 돌아가, 1997년 정보기술 생산분야 종사자의 1인당 연간 평균 임금은 약 5만3000달러로 전체 평균 3만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스톡옵션, 우리사주의 ‘신화’도 이들 소수의 ‘지식창조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5%가 95%를 먹여 살린다?”

혹자는 이를 ‘5:95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상위 5%가 나머지 95%를 책임진다, 혹은 상위 5%에 95%의 부가 집중된다는 뜻이다. 미래학자 스탠 데이비스는 ‘80:20 이론’을 주창한 바 있다. 90년대 제조업의 총 매출이 전체 경제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0%였다면 2010년엔 50%로 줄어들고, 이익 창출 면에서는 50%가 20%로, 증권 시장에서의 시가 총액은 80%에서 20%로 각각 감소할 것이란 예측이다. 반면 정보통신 관련 산업의 경우 매출 비중은 20%에서 50%로, 이익 비중은 50%에서 80%, 시장가치는 20%에서 80%로 증가할 것이다. 요컨대 디지털 경제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정보통신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약간의 조정기를 거쳐 신빈곤계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강수돌 교수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소득 불균형만큼 심각한 것이 고용 불안정”이라는 지적이다. “정보통신 관련 인력은 심각한 부족 현상을 빚고 있는 반면, 영업직을 비롯한 대다수의 직종에선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으니 회사는 자꾸 더 낮은 임금, 회사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고용 계약을 요구한다. 비정규직 확산, 노조의 단체협상 기능 약화, 단순하고 기계적인 업무의 반복은 근로자의 삶의 질을 한 단계 아래로 끌어내릴 것이다.”

정보 혁명은 약인가 독인가

우리나라의 고용 구조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각종 통계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부 중앙고용정보관리소에 따르면 지난 한해 정규직 상용근로자는 613만8000명으로 그 전해(620만 7000명)보다 약간 감소한 반면, 임시·일용직 근로자는 596만 6000명에서 689만 3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중 상당수는 각종 매장, 대리점 등지에서 근무하는 판매·영업직 사원들이다.

그러나 고려대 이경전 교수는 “아직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경제체제가 직업 소멸을 불러와 실업자를 양산할지, 아니면 정반대의 성과를 거두게 될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점”이라고 말한다. 다만 각종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듯 빈부간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만큼 그에 대한 정부, 기업, 개인 차원의 다양한 대응책이 요망된다.

그중 대리점·영업직 붕괴 현상과 관련해서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략이 과도기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이브리드 전략은 말 그대로 온라인 유통과 오프라인 유통을 병행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포츠화 메이커인 나이키사. 온라인으로는 고가 제품을 판매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중저가의 대중적 제품을 판매하는 전략으로 매출 증대에 성공했다.

“하이브리드는 특히 미국에서 각광받고 있는 방식이다. 지난해 상반기, 온라인 판매를 병행한 업체의 매출 신장률이 오프라인에만 매달린 업체의 두 배에 달했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소비자는 온라인 사업자에 대해 아직도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다. 자체 점포를 갖고 있는 업체라면 고객들의 불신을 효과적으로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파이언소프트 이상성 사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현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거나 또는 영업사원으로 근무 중인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쌓아온 유통 관련 노하우를 전자상거래와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와우북’은 국내 최대의 온라인 컴퓨터서적 전문 판매점 사이트다. 이 회사의 황인석 사장은 17년간 컴퓨터 서적 유통에만 종사해 온 출판 영업맨 출신이다. 83년부터 7년 동안 종로서적 컴퓨터 매장에서 일했고, 1990년부터는 강남에서 컴퓨터 전문 서점을 운영했다. 몇 년 전 우연히 미국의 서적 전문 전자상거래 사이트 아마존에 들어가 본 후 줄곧 인터넷 상에 컴퓨터 서적 전문판매 사이트를 개설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와우북이다.

황 사장은 “네티즌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구매 심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 전문가라면 인터넷 상에서도 얼마든지 성공 신화를 일굴 수 있다”고 자신한다. 국내 최대 인터넷 경매 사이트 ‘옥션’의 이금룡 사장도 삼성물산에서 잔뼈가 굵은 유통 전문가다. 역경매 사이트 ‘예쓰월드’의 김동필 사장 또한 삼성전자 마케팅 담당 이사 출신. 전자상거래에는 어중간한 정보통신 전문가보다 디지털 마인드를 갖춘 유통 전문가가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경제적 패자 될 정보빈곤층

그러나 ‘오직 인터넷만이 살 길’이라며 무작정 새 사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벤처는 말 그대로 모험(venture),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시장 안착률 6%의 배타적이고 협소한 경쟁자유지역이다. 대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을만큼의 실력을 쌓거나, 택배업 등 전자상거래 확산의 여파로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려볼 수도 있다. ‘규모의 경제’에 부응하기 위해 대리점 간 합병을 시도하는 것도 생존을 위한 한 방법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 해소의 책임을 개인 또는 기업에만 지울 수는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그것이 지금의 상황처럼 디지털 경제로 전환하는 데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라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더욱 절실해진다.

현대경제연구원 채창균 연구위원은 “우선 간접세 비중을 낮추는 대신 직접세 비중을 높이고, 그중에서도 사업 소득 또는 자산 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와 형평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시장경제질서 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패자’를 위해 최저 한도의 복지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 격차 문제와 관련해 특히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디지털 격차’ 해소다.

인식 부족 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인터넷이나 PC와 접할 시간이 적은 사람들은 디지털 경제 속에서 정보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경제적 약자가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근로자 재교육의 책임 기업에만 돌릴 수는 없게 된 상황인 만큼 정부 차원, 혹은 민관 협동이 새로운 직업훈련 시스템 속에서 정보 격차 해소와 관련된 효율적인 대책들이 생산돼야 할 것이다.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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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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