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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경제위기’ 유령인가 현실인가

‘제2 경제위기’ 유령인가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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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인 문제들’의 핵심은 기업·금융 구조조정이라는 해묵은 과제다. 벌써 문을 닫았어야 할 수많은 부실기업이 ‘시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살아남아 멀쩡한 기업들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이는 금융권의 부실로 직결돼 자금 흐름을 왜곡하고 우리 경제의 신뢰도를 떨어뜨려 제2위기를 촉발시킬지도 모를 ‘숨쉬는’ 뇌관이다.

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것은 그간의 경기 회복에 기인한 바 크다. 97년 12월, 구제금융을 얻는 대가로 IMF의 초긴축 프로그램을 수용했던 한국은 외환시장의 불안이 진정되고 지나친 긴축 때문에 ‘산업기반이 무너진다’는 판단이 서자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98년 중반부터 IMF의 양해하에 부양정책으로 선회했다.

부양책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저금리와 기업 대출금 만기 연장, 공공지출 프로그램을 축으로 한 인위적인 부양정책은 침체일로를 걷던 경기를 끌어올려 내수와 수출을 회복시켰고, 이에 따라 기업의 매출과 순이익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때마침 국제 경기도 회복세를 보여 부양 효과가 배가됐다.

부양정책이 적시에 시행되지 않았다면 기술력, 재무 건정성, 투자·수익구조가 좋으면서도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우량기업들이 대거 도산, 공황이 초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99년 이후의 높은 성장률과 수익률은 사실상 이런 우량기업들이 이끌어낸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경기 부양책은 기업 구조조정과 좀처럼 한배를 타기 힘들다는 결함을 갖고 있다. 경기가 좋으면 부실기업이 자산을 매각하거나 인원을 감축하는 자구노력을 게을리하기 쉽다.



우리도 그랬다. IMF체제 직후 흑자 도산과 실업자 양산이라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강도높게 추진되던 미시적 구조조정은 거시적 팽창정책 아래 급속하게 퇴색했다. ‘先경기부양 後구조조정’ 기조로 돌아서 이후 우량기업은 물론, 군살을 빼거나 퇴출돼야 마땅한 한계기업과 부실기업까지 저금리와 대출금 만기 연장의 수혜자가 되어 ‘암 수술’을 미루는 바람에 부실을 더 키운 것이다.

이미 경쟁력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기업들이 부양책을 쓴다고 되살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금융기관들은 이런 기업들에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줬다가 스스로의 운명조차 불투명해지는 처지가 됐다. 기업은 기업대로 분에 넘치게 설비투자만 잔뜩 늘려놓고 자구노력을 하지 않다 보니 채권은행들이 더 이상의 신규 대출을 꺼려 돈줄이 막혔다.

기업과 금융권의 동반 부실은 외부에서 작은 충격이 와도 버텨내지 못하고 제2, 제3의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회사채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금융시장에 출처 불명의 불안심리가 확산되고 주가가 출렁이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정한영 연구위원은 “부양책을 너무 오래 끌었다. 지난해 7∼8월이 다시 긴축으로 돌아설 기회였는데 대우 사태가 터지면서 정책 전환이 어렵게 됐고, 올해에도 총선 때문에 금리 인상 타이밍을 놓쳤다”며 “당국은 정책금리를 상향 조정해 총수요를 축소하고, 이와 함께 개별 부문에 대한 미시적 부실 정리 방안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드 랜딩’ 위험 상존

여의도연구소 유승민 소장은 무리한 경기 부양책의 부작용이 5년 단임제 대통령들의 ‘경제성적표’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80년에 정치적 격변과 오일 쇼크, 흉년이 겹쳐 경제가 휘청거리자 당시 김재익 경제팀은 부양 대신 긴축정책을 실시, 균형성장 속도로 서서히 복귀했다. 그 결과 86∼89년에는 3저에 힘입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89년 무렵부터 경쟁력 위기론이 표출되면서 다시 하강기를 맞았다. 이때 서서히 소프트 랜딩(연착륙)을 시도해야 했는데, 막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건설 등으로 경기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 뒤를 이은 김영삼 정부도 하강기에 신경제계획이라는 부양책에 주력했다.

경기 사이클은 오르막을 지나면 내리막을 타야 하고, 내리막을 타는 과정에 기업들은 스스로 구조조정을 하게 돼 있다. 그런데 5년 단임제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경기 사이클을 무시하고 임기 안에 드러날 단기 실적에만 연연, 무리한 부양으로 일관했다. 돈이 넘치는데 어느 기업이 설비를 줄이고 사람을 자르겠는가. 이 때문에 10년 가까이 경기가 과열되면서 마침내 97년과 같은 충격적인 하드 랜딩을 겪게 됐다.

DJ 정부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 사이클상 2003년쯤 상승곡선을 탈 목표로 서서히 돈을 풀었어야 했는데, ‘1년 반 안에 IMF위기를 끝내겠다’며 임기 초부터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면서도 대우 같은 핵심적인 구조조정은 뚜껑만 열어보고 그냥 덮었다. 내년 정도까지는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하겠지만, 경기는 조만간 다시 꺾이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시점에 외부 충격이 올 경우 또다시 하드 랜딩으로 치달을 위험이 크다.”

이 시점에 긴축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대해서는 신중론을 펴는 이들도 있다. 우리 경제가 아직 과열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 삼성경제연구소 홍순영 연구원은 “산업설비 가동률이 82∼83%는 돼야 인플레이션이 우려되는데, 현재는 70%대에 머물고 있어 과열 기미는 없다. 또한 수입이 큰 폭으로 개방된 데다 총비용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0%밖에 안 되기 때문에 과거처럼 ‘경기 상승→임금 인상→물가 인상’의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 금리를 올렸다가 금융경색이 초래되면 우량기업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

이에 대해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경기 과열 때문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미국도 시장을 죽여가면서 금리를 올리고 있는데, 우리가 언제까지나 회사채 금리가 한 자릿수라며 강변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금융기관이 대출심사를 제대로 해서 기업에 따라 차별적인 금리를 적용하면 우량기업이 금리 때문에 무너지는 일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시정책에 손을 대는 것은 경제 회생의 틀을 다시 짜는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함께 미시적 구조조정으로 속을 채워 넣어야 한다. IMF 구제금융을 받던 97년에는 대기업의 부도가 속출했다. 한 해에만 30대 재벌그룹 중 한보·삼미·기아 등 7개가 무너졌다. 하지만 구제금융 이후에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재연됐다(대우그룹과 새한그룹이 좌초한 것은 IMF체제로 들어간 지 1년8개월, 2년 반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쓰러져야 할 기업, 기술적으로는 사실상 부도가 난 기업까지 억지로 살려왔기 때문이다.

未부도 부실기업 30% 넘어

기업의 이자 상환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는 이자 보상배율이다. 이자 보상배율은 이자비용과 법인세 차감 전 수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배율인데, 이것이 1배 미만인 기업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조차 지불할 수 없음을 뜻한다.

서울대 정운찬 교수(경제학부)의 조사에 따르면 고성장을 거듭하던 지난해 5월 말 현재 부도가 발생하지 않은 기업 6116개 중 이자 보상배율이 1배 미만인 기업은 31∼33%(1874∼2025개)나 됐고, 이들 부실기업의 차입금 규모는 113조∼13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5대 재벌 계열사 149개 중에도 이자 보상배율이 1배 미만인 곳이 38∼44개, 차입금 규모는 24조∼41조원에 달했다.

정운찬 교수는 “지난 몇 년간의 이자 보상배율 추이를 살펴보면 기업의 잠재 부실 규모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에도 이들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실 기업주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보다는 채권 금융기관, 나아가 국민의 부담을 통해 회생하고 싶어한다. 금융기관은 자신들의 부실을 최대한 숨겨 현재화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부실기업 퇴출이 미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정부대로 연쇄 부도와 대량 실업, 금융시장에 미칠 충격을 우려해 웬만하면 구제금융 지원을 통한 부도방지 정책에 무게를 싣는다. 이런 정책은 당면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구조적 부실을 일시적으로 감출 수 있게 함으로써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부추긴다는 게 정교수의 지적이다.

97년 IMF와 협상할 때도 정부는 민간기업의 부도를 막기 위해 지급보증을 자청해 스스로 부실을 떠맡다시피 했다. 이와 관련, 세계은행의 조지프 스티글리츠 부총재는 지난해 12월, IMF체제 2주년을 맞아 가진 행사에서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파산은 자본주의의 핵심 제도이며, 민간 대 민간의 자본시장 거래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 적절한 시정방안을 제공한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외국 채권단들과 민간 부채의 상환 재조정 협상을 하고 그 상환을 보증한 것은 민간 채무를 공공 채무화한 계약위반이었다.”

이미 워크아웃에 들어간 기업들도 부실 처리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76개 워크아웃 대상 기업 중 경영실적이 개선돼 ‘졸업’을 검토중인 곳은 14개에 불과하다. 더욱이 대부분의 워크아웃 기업에서 부실 책임자인 대주주가 여전히 경영에 관여하고 있어 자구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실정이다. 대주주가 국가경제를 인질 삼아 ‘배째라’ 식으로 나와도 부채 규모가 크다 보니 채권단도 저자세로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법정관리인을 선임하거나 청산 절차에 들어가 대주주의 지분이 매각되지만, 워크아웃의 경우에는 대주주의 입김을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부가 부실기업 처리를 법정관리보다 워크아웃 쪽으로 유도한 것은 법정관리 절차를 밟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 때문. 그러나 빨리 진행돼야 효율적인 부실 처리가 가능한 워크아웃이 지지부진하면서 오히려 부실을 덮고 감추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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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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