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장의 핵심역량 추출은 ‘광주리론’으로 대변된다. 한 광주리에 신선한 사과와 썩은 사과를 함께 두면 신선한 사과까지 망치게 된다는 것. 그는 될 성싶은 떡잎은 과감히 밀고 싹수가 노랗다고 판단한 것들은 과감히 정리했다. 그 결과 ‘트라이’를 중심으로 한 내의류 부문과 진 캐주얼 ‘리’ 등 외의류 부문으로 기업의 핵심역량을 집중하고, 매출이 부진하고 재고가 많아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예나지나’를 비롯, ‘노하우’ ‘용가리’ ‘X-zone’ ‘스캉달’ 등 5개 브랜드를 과감히 정리했다.
87년부터 사용해온 트라이 영문 로고를 젊고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바꾼 것도 그런 의지의 소산이었다. 구태를 벗어나 경영을 정상화하는 의지를 보이고 트라이를 쌍방울의 대표 브랜드로 부각시키는 전략이었다. 한편으로는 브랜드 변신에 착수했다. 쌍방울의 이미지가 젊은 계층이나 부유층에는 어필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한 백사장은 20~30대를 타깃으로 한 고가의 ‘iklim(이끌림)’과 가까운 거리에는 외출복도 겸하는 ‘에스마일’이란 홈웨어를 개발했다.
건강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날로 늘어나는 것에 발맞추어 기능성 내의를 출시한 것도 적시타였다. 세탁후 30분 만에 완전 건조되는 최첨단 제품인 ‘트라이 쿨맥스’, 참진흙을 원료로 사용한 트라이 참진흙내의, 항알레르기 효과가 있는 키토산내의, 나이가 많은 소비자를 위해 관절 부위에 특수원단을 덧댄 트라이 한방 내의 등은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쌍방울은 또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에너지관리공단 후원으로 4개 종교단체가 주관하는 내복입기운동을 전개, 30% 할인된 가격으로 트라이 내의를 구입하도록 판촉활동까지 벌였다.
협력업체 수도 대폭 줄였다. 직원들 개인 청탁이 작용해서인지 협력업체가 필요 이상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는 중복된 부문을 과감히 잘라내고 한 브랜드당 협력업체를 2, 3곳으로 국한시켰다.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중국 상해와 소주에 있는 해외 부실공장도 다 처분했다. 94억원의 처분손실이 났지만 그대로 끌고 가면 손실이 더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훈춘 공장만 그대로 살렸다. 일본 수출물량이 꽤 있는데다 거대 시장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다. 그 결과 99년 가동률이 50%에 불과하던 훈춘공장은 최근 수출 에이전트를 잘 잡은 덕분에 수주가 많아져 납기를 대기가 바쁘다. 썩은 사과는 과감히 버리고 신선한 사과만 키워야 한다는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구조조정이 CEO의 고유영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온 관리자로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내부의 반발이나 불만이 없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그렇지요. 그래서 무조건 밀어붙이기보다는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 겁니다. 제 경우에도 부임 직후 직원들을 설득하느라 아주 힘들었습니다. 의사결정 과정은 고위간부 중심으로 해야 하지만 정지작업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그린보드란 제도로 청년중역회의란 겁니다. 말단사원들 의견을 수렴하고 제가 직접 시장에 나가 현장의 소리를 듣습니다. 도덕적으로 불건전한 의견만 아니라면 특히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취임 후 지금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하는 회의를 거른 적이 없다. 과장급, 팀장급, 사업부장급 회의를 아침 8시부터 1시간 가량 하고, 하루에 두 번씩 사무실을 돌며 사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눈다.
“이끌림이란 새 브랜드의 필요성은 모두 공감했지만 한쪽에서 독립 브랜드로 하자는 안이 강력히 대두됐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그건 아니었습니다. CEO의 권위로 묵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합니다.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근거있는 논리로 수긍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트라이처럼 독립 브랜드로 만들면 매장을 2000개나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 인원도 늘어나야 하고, 뭐 여러 가지 경영관리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끌림을 트라이 밑에 두자고 강력히 설득했지요. 하하, 다행히도 제 안이 맞아떨어지고 있어 면목이 섭니다만….”
그는 할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일단 결정하고 나서 성공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CEO의 자세라고 역설한다. 성공할지 못 할지 확신이 안 서 망설이는 게 아니라, 선택의 기로에서 일단 선택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경영과 e-비즈니스의 도입
인적·물적 자원의 메커니즘을 재구축하는 백사장의 방안 중 눈여겨볼 대목은 영업조직 강화와 유통망 정비, 지식경영 도입, e-비즈니스의 과감한 도입 등이다. 백사장은 다원화돼 있는 영업조직을 통합해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는 것이 시장에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이라 판단했다.
“지점에 가보니 트라이는 해당 지점장이, 란제리는 본사 해당 부서에서 지시를 해야 영업망이 움직이더군요. 손님이 방문해도 관할구역이 다르다며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구요.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는 알겠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제가 나서서 란제리도 지점장 관할체계로 일원화했습니다.”
영업직원들에게는 철저한 원가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영업 및 손익 보고 회의를 개최했다. 처음엔 팀장에게도 ‘이익’에 대한 관념이 없었으나, 그 회의를 통해 서로를 검증하고 거품 숫자를 없앨 수 있었다.
59개의 직영매장 중 특수한 사정이 있는 17개를 제외한 42개의 매장을 위탁전환매장으로 바꾼 것은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직영매장 직원들은 그간 고정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위탁매장으로 전환시켜 서로 경쟁하게 하자 수익이 배로 늘어난 곳도 생길 정도였다.
“42개 위탁점의 매출은 평균 18.4%가 신장된 반면, 직영점은 오히려 5%가 줄었습니다.”
쌍방울의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인 지식경영의 도입이다. 백사장은 평소 기업을 경영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문제로 조직간 수평적 협조의 부재를 들었다.
“그 단적인 예로 직원 한 명이 갑자기 퇴사하면 그 사람이 맡았던 업무가 마비됩니다. 평소에 업무수행에 필요한 노하우들을 공유하지 않음은 물론 업무 매뉴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후임자가 전임자 수준의 업무능력을 발휘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부서간 알력이 대단해 시너지효과를 올리기는커녕 부서간 업무협조를 구하느라 기력이 탈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의 해결책이 ‘직원 개개인이 알고 있는 업무 관련 암묵적 지식을 모든 사람이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체계화하는 작업’인 지식경영에 있다고 본 백사장은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KAIST에서 개설한 ‘지식경영 강좌’를 한 학기 수강했고, 아예 중간간부 24명을 단기코스에 집어넣었다. 지난해 11월19일 지식경영 선포대회를 갖고, 회사조직을 6개 팀으로 나눈 뒤 CKO(지식경영 담당 경영자)도 임명했다. 지식경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직원들에게는 마일리지를 적용, 일정 점수가 되면 ‘사이버 임원’ 대우도 한다. e-비즈니스를 도입한 것 역시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백사장은 단언했다.
“지난해 8월 21일 야후코리아와 손잡고 세계에서 두 번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메리어트 호텔에서 ‘인터넷 언더웨어 패션쇼’를 개최했습니다. 그 날 9만5000명이 동시에 접속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쌍방울=고리타분한 기업’이란 이미지를 상당히 불식시켰다고 봅니다.”
B2B와 B2C를 다루는 자회사(이퍼베이시브닷컴)도 하나 만들었고, 이와 함께 홈쇼핑과 텔레마케팅, 통신판매, 다단계 판매 등 무점포영업망을 확충했다. 무점포영업팀에 젊고 패기 있는 인력을 배치한 것은 물론이다. 또한 전자상거래 시대에 대비해 인터넷쇼핑몰인 www.mytry.co.kr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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