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53) 두산주류BG 사장의 진짜 업무는 퇴근하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근무처는 주로 술집. 그러나 CEO라면 으레 갈 만한 고급 룸살롱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즐겨 찾는 음식점, 서민의 애환이 서린 포장마차 등이 그가 찾는 곳이다.
삽겹살을 주로 파는 한 음식점에 들어간 김대중 사장의 눈길이 빠르게 각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에 가 꽂혔다. 참이슬은 몇 병이고 산 소주는 몇 테이블인지 파악한 그는 손님처럼 앉아서 태연하게 술을 주문하며 종업원의 반응을 살핀다. 대부분 “어떤 소주를 드릴까요?” 하고 묻지만 어떤 종업원은 별도의 주문을 하지 않으면 으레 참이슬로 가져온다. 이런 곳은 계몽대상이다. 동행한 일선 영업사원이 노트에 잽싸게 기록한다.
“정승주 한번 드시겠습니까?”
그는 물론 산 소주를 마신다. 주변 테이블에서 참이슬을 마시는 손님이 많아도 그는 아픈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손님들이 하는 술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는다. 그 중에 산 소주와 참이슬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얘기를 들으면 피곤이 싹 가시는 보람도 생긴다.
음식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김대중 사장이 옆 테이블로 옮긴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산 소주 한 병을 서비스하겠다고 하자 옆좌석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술이 아주 세 보이는 테이블에서는 “정승주를 한번 드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묻는다. 허락이 떨어지면 주인에게 산 소주와 군주를 한 병씩 내오게 하여 정승주 제작 시범을 보인다.
산 소주와 군주의 마개를 따 정확히 입구를 ‘키스’시킨 후 산 소주가 밑에 오고 군주가 위에 오는 형태로 세워놓고 5분이 지나면 완전히 섞인다. 거꾸로 놓인 군주가 비중의 차이로 아래로 이동하며 순환하는 것이다. 일명 모래시계라고도 불리는 이 정승주는 소주와 백세주를 섞은 ‘오십세주’가 유행하자 두산주류BG의 마케팅개발팀이 고안해낸 ‘신상품’이다. 산 소주는 물론이고 최근 출시돼 호응을 얻고 있는 전통주, 군주의 판촉까지 겸하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다.
음식점을 나온 김대중 사장은 유리창 너머로 술좌석이 보이는 음식점은 빠지지 않고 바깥에서 지켜보며 산 소주와 참이슬의 소비 빈도를 체크한다. 음식점에 쌓아놓은 소주박스를 점검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 일과 중의 하나. 영업사원들이 매일 보고하는데도 김대중 사장이 현장업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소비자동향을 파악하고 현장감각을 익히지 않으면 무한경쟁체제에 놓여 있는 주류산업의 흐름을 정확히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늦게까지 매일 술을 드셔야 하니…
“억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피곤하겠지요. 하지만 일이 즐겁고 재미있어요. 게다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상품을 판촉하는 일이니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습니다. 하하.”
전면전으론 승산 없다
그는 주량이 소주 두 병밖에 되지 않는다고 ‘겸손해’한다. 하지만 점심때부터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저녁에도 마셔야 하니 그라고 해서 힘들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술좌석에서 술을 권하는 이가 있으면 반 잔만 따라줄 것을 부탁하는 것으로 자제한다.
“제가 술 사장이다 보니 술을 먹을 기회도 많고 술좌석에서 술을 가장 많이 받게 됩니다. 반 잔만 받겠다면 양해해주는 데 꼭 다 채워야 한다고 고집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날은 죽어나는 거지요.”
-그래도 특별한 건강관리 비법이 있을 듯합니다만.
김사장은 머리는 희끗희끗하지만 혈색도 좋고 배도 별로 나오지 않아 건강체질임을 단번에 느끼게 한다.
“두산경월 대표이사 시절, 강릉에 근무할 때는 회사도 가깝고 해서 아침에 헬스클럽에서 땀을 빼곤 했지요. 또 가끔 해변의 모래사장을 뛰면서 건강을 관리했습니다만 서울로 와서 두산주류BG를 맡고 나서부터는 시간에 쫓겨 따로 운동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집에서 운동하고 주말에 등산하는 정도지요. 음, 또 있다면 아침에 홍삼 달인 물을 마시는데 숙취 해소에도 좋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아요.”
산 소주는 김대중 사장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년 전 진로가 독점해온 주류시장에 지각변동을 몰고 온 ‘그린신화’의 주역이기도 했던 그는 그 후 뉴그린과 미소주의 실패로 벼랑 끝에 몰린 두산주류BG를 되살리라는 특명을 받고 1999년 12월 다시 야전사령관으로 되돌아왔다. 두산포장 등 두산계열사의 대표이사를 맡은 2년이 주류를 떠났던 유일한 외도 기간인 셈이다.
두산주류BG는 (주)두산의 주류본부라고 할 수 있다. BG는 ‘비즈니스 그룹’의 약칭. 주류본부라고 해도 과거의 두산백화와 두산경월을 1998년도에 합병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주류전문회사보다 규모가 크다.
“처음엔 좀 암담했습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참이슬의 아성이 워낙 공고해 기발한 신제품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 분위기였습니다. 과거 그린으로 서울시장의 99%를 차지하고 있던 진로를 몰아내고 45%까지 시장을 빼앗은 적도 있었지만 제가 취임한 당시에는 참이슬에 서울 경기지방의 시장을 다 빼앗겨 바닥을 기고 있을 정도였거든요.”
신제품만이 빼앗긴 시장을 되찾을 비책이라고 판단한 그는 그때부터 날마다 새로운 컨셉트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꿈도 소주 꿈만 꿀 정도였다.
그는 배틀필드 속에 들어가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즉 참이슬과 같은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전면전을 벌여봐야 시간낭비라는 것. 그래서 색다른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싸움터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건강·자연·신선이라는 요즘 현대인들의 중요 트렌드를 반영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다 어느 아이디어회의에서 녹차란 테마가 튀어나왔다. 그는 무릎을 쳤다. 기어이 찾아낸 것이었다.
20여 차례 테스트에서 호평받아
“녹차가 자연과 건강, 신선이라는 관심사에 딱 부합하는 테마였던 거지요. 나이 든 분들이 가장 싫어하는 숙취를 해소하고,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에다 전 연령층의 애주가를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 후 오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한라산과 지리산 줄기의 청정 녹차 산지에서 채집한 녹차 잎을 우려내 소주의 깨끗한 맛과 녹차의 개운한 맛이 살아 있게 했다. 특히 소주 제조공정에서 녹차 잎을 직접 우려냄으로써 소주의 본질적인 문제점인 숙취를 해결, 무숙취 타입의 건강지향성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20여 차례의 소비자 테스트에서도 고객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내 자신감을 얻은 김사장은 신제품 출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경쟁사에는 ‘솔잎’이란 가짜 정보를 흘리는 한편, 이름 짓기에 들어갔다.
“아이고, 이름 짓는 게 가장 어려운 장애물이었어요. 일류 네이밍 회사에 의뢰하고 사내공모도 해보았지만 신통한 이름이 떠오르질 않았어요. 심지어 유명 작명가들을 찾아갔다니까요.”
뭔가 기발하고 참신하면서도 살아 있는 자연의 맛이 나는 이름은 오리무중이었다. 이렇게 5개월이 흘러갔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거 뭐 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 그룹이름인 두산의 산을 따서 하면 되는 거지” 했다. 산? 자연의 산? 그는 순간 산의 성공을 예감했다. ‘산을 마신다’는 카피 문구마저 술술 떠올랐다. 네이밍 회사와 직원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호응하자 김사장은 산의 출시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D-데이는 2001년 1월17일.
“주류업계에서 333원칙이 있습니다. 3일째 3주째 석 달째가 되면 신제품의 성공을 점칠 수 있다는 겁니다. 3일째가 되면 주류도매상 주인과 배달원들이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합니다. 이 사람들은 신제품에 가장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 직감적으로 판단하는데 이것이 첫 고비입니다. 3주째는 음식점 주인들이 고객에게 권하는 시기인데, 이때 소비자 반응이 체크되고 음식점 주인들이 신제품을 계속 넣을지 아니면 반품할지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석 달째는 전체적으로 성공의 윤곽이 잡히는 거죠.”
산 소주는 333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참이슬보다 알코올 도수가 1도 낮은 22도의 부드러운 맛이 알려지면서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루에 1만5000상자가 팔릴 정도가 되자 경쟁사에서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진로는 산이 출시된 지 15일 만에 참이슬의 도수를 산과 같은 22도로 낮추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지만 산의 거센 물결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지난 4월 3000만병 판매를 돌파한 산 소주는 출시된 지 7개월째인 8월 현재 수도권 일대의 시장점유율을 15% 정도로 끌어올렸다. 이는 올 연말까지 계획했던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으로 김사장은 이 추세대로라면 올 연말 시장점유율은 30%선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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