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공사 현장.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그러나 건설 경기가 쇠락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장비 수요가 급감한 탓이다. 그럼에도 건설기계 등록대수는 꾸준히 늘어 2005년 32만 대에서 지난해엔 39만 대를 넘어섰다. 공급 과잉과 수요 감소로 인해 장비 가동률은 50% 이하로 떨어졌다.
최근에는 저가낙찰로 경영이 악화된 일부 건설업자들이 고의로 부도를 내거나 잠적하는 경우도 있어 건설기계를 대여하고도 대여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건설기계 대여자 중엔 건설기계를 1대만 보유한 경우가 많아 대여금 체불은 곧 생계위협으로 이어진다.
“대여금 체불되면 패가망신”
25t 덤프트럭을 운행하는 한 건설기계 노조원은 “흔히 원청사를 ‘갑’, 하도급업체를 ‘을’이라고 하는데, 건설기계 대여자는 ‘을’보다 못한 ‘병(丙)’쯤으로 보면 된다”며 “하도급업체가 공사계약 이행을 포기하고 부도를 내면 건설기계 대여금은 못 받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2억 원 가까이 하는 트럭 할부금으로 매월 300만 원이 들어가고, 기름값만 하루 25만~30만 원이 든다”며 “여기에 타이어 교체비용 등 유지비까지 합하면 최소 매월 1000만 원이 들기 때문에 대여금이 서너 달 체불되면 패가망신하게 된다”고 말했다.
건설기계 대여금 체불 사례가 빈발하자 국회는 관련법 개정에 나섰다. 주승용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9월 4일 건설기계 대여금 지급보증을 뼈대로 한 ‘건설산업기본법(건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건설기계대여금 지급보증제도(이하 대여금 지급보증)는 원도급자 또는 하도급자가 건설기계 대여자와 건설기계 대여계약을 체결하면 보증기관이 그 대금의 지급을 보증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법안은 발의된 지 석 달 보름 만인 지난해 12월 18일 속전속결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이 이처럼 빠르게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데는 주승용 의원이 국회교통위원장이라는 점이 한몫했다. 개정안 통과 이후 국토교통부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해 올 2월 18일 입법예고했다.
이에 따라 대여금 지급보증 시행일이 6월 19일로 다가왔지만 전문건설협회와 전문건설조합 등 관련업계는 입법예고된 대여금 지급보증이 현실과 동떨어진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과도한 보증 대상 △현실과 거리가 먼 보증금액 산정기준 △불합리한 보증 면제 대상 등이 그것이다. 입법예고 후 업계의 개정 요구가 빗발치자 국토교통부는 건설기계 대여자가 계약이행을 상호보증토록 하는 상호보증제를 수용해 5월 3일 재입법 예고했다. 그럼에도 업계는 “과도한 보증 책임 등 본질적인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며 추가 개선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원청사-하도급사 상호 보증을”
대여금 지급보증과 관련해 전문건설업계는 ‘과도한 보증 책임’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다. 한 전문건설 관계자는 “건설기계 대여금 체불 방지를 위한 지급 보증 대상에 공공공사는 물론 민간공사까지 포함시켜 전문건설사들이 막대한 보증 비용을 떠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대여금 지급보증법안은 건설기계 대여자와 계약을 체결한 원도급사 또는 하도급사가 보증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건설기계 대여 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지급보증 부담은 하도급사인 전문건설사에 집중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건설기계협회 관계자는 “타워크레인이나 기중기처럼 단가가 높고 장기간 대여하는 장비는 원청사와 계약을 맺기도 하지만, 불도저 굴삭기, 덤프트럭 같은 대부분의 건설장비는 하도급자와 계약을 맺고 공사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건설기계 대여 보증 시장의 규모를 8조 원, 이 가운데 체불금액은 3000억 원 규모로 추산한다. 건설기계 대여금의 약 4%가 체불돼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건설공사에 대여금 지급을 보증하려면 수수료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문건설공제조합이 추정한 대여금 지급보증 평균 수수료율은 4.33%에 달한다. 전문건설 관계자들은 “건설경기가 위축돼 저가입찰이 보편화한 마당에 건설기계 대여금 지급보증 수수료 부담까지 전문건설사가 떠안게 되면 손해가 불가피하다”고 호소한다.
공공공사의 경우 수수료율을 신용도 AAA를 기준으로 책정하는데, 전문건설업체는 평균 신용도가 BB 수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신용도 차이에 따른 수수료 차액을 전문건설업체가 떠안아야 한다는 것. 민간공사에서도 보증서 발급 비용이 하도급 계약에 포함되지 않으면 보증 수수료 전액을 전문건설업체가 부담하게 될 공산이 크다. 한 전문건설사 대표는 “영세 건설기계 대여업체를 보호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불공정한 하도급 대금 지급 관행 개선 없이 이 제도를 도입하면 전문건설사들이 공사대금을 못 받은 상황에서도 대여금 지급을 보증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문건설업계가 대여금 지급보증에 난색을 표하는 것은 하도급 대금지급 보증률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직적 체계로 이뤄진 건설산업의 특성상 발주자에서부터 원수급자, 하도급자, 2차 협력사인 건설기계 대여자에게까지 원활하게 건설공사 대금이 전달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문제는 건설기계 대여자와 주로 계약을 체결하는 하도급사가 공사에 참여하고도 대금을 제때 못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전문건설업 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민간공사의 하도급 대금 지급보증서 교부율은 평균 49.1%에 불과했다.
더욱이 민간공사의 경우 건설공사 원가에 건설기계 대여금 지급보증 수수료를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G건설의 P대표는 “공사 대금이 제때 지급되는 공공공사는 몰라도 대금 지급 여부가 불투명한 민간공사까지 건설기계 대여금을 무조건 보증하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서울의 Y건설 대표도 “원청사에서 공사 대금을 못 받는 바람에 대여금을 못 주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며 “공사 대금의 흐름을 이해하면 모든 공사에 대여금 지급보증을 하라는 게 얼마나 불합리한 얘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혀를 찼다. 그는 “대여금 지급보증을 강제하기 전에 원청사와 하도급업체의 상호 보증을 의무화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하도급업체는 계약이행 보증을 하고, 원청사는 대금 지급 보증을 하면 2차 협력사인 건설기계 대여자에 대한 대여금 지급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