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쟁점 중 하나는 일본의 전쟁 목적이었다. 이 부분은 ‘국민의 역사’와 최초 검정본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한다. 검정본은 “일본의 전쟁 목적은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문부성은 “자존자위와 아시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싸웠던 전쟁 실태에 대하여 설명 부족인데다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수정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모임측은 ‘아시아제국과 일본’이라는 항목을 만들어 “그러나 대동아공영권의 이름 아래 일본어 교육이나 신사참배가 강요되었기 때문에 현지인의 반발이 강해졌다. 또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군에 의해서 현지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사역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필리핀이나 말레이 등처럼 연합군과 연계한 항일 게릴라 활동이 활발해지는 지역도 나왔다. 일본은 이에 강경 대처했으며 일본군에 의해 죽거나 부상당하는 사람들의 수도 다수 있었다. 이 때문에 패전 후 일본은 이들 국가들에게 배상했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일본의 전쟁이나 아시아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창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이 대목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초기 전쟁 승리가 아시아에 용기를 주고 독립을 하는데 기여했느냐는 논쟁으로 연결된다. 최초 검정본은 자화자찬 일색이었다.
“아시아제국의 독립과 일본-일본국은 개전 직후부터 아시아의 해방을 전쟁 목적으로 내세웠으나 언제 어떻게 아시아 제국을 독립시킬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계획은 부족했으며, 암중모색 단계였다. 일본군은 당초 점령지역을 군정하에 두고 독립운동을 단속했기 때문에 배반당했다는 느끼는 아시아 민중도 많았다. 또 그때까지 구미의 식민지배하에서 이익을 얻던 사람들에 의한 항일 게릴라활동도 일어났다. 일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제국이 수백년 동안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독립을, 미얀마 필리핀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안겨주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이미 패색이 농후했던 1944년(쇼와 19년) 3월, 인도 국민군과 함께 인도 독립 지원과 전국 타개를 위해 인팔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보급이 끊기고, 우기의 정글에서 병사들은 굶주림과 부상, 질병으로 쓰러지면서 패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일본의 패전 후 인도에서는 영국군이 인팔작전에 참가했던 인도 국민군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인도의 거족적인 격렬한 저항운동이 발발했다. 이를 계기로 2년 후인 1947년, 드디어 인도는 독립했다. 이때 인도의 법률가 팔라비 데사이는 ‘인도 독립은 일본의 덕택으로 30년 앞당겨졌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군이 조직한 PETA라는 3만8000명의 군대가 일본 패전후 되돌아온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개시했다. 2000명의 일본병이 의용병으로 참가해서 함께 싸웠고 4년 후인 1949년 인도네시아는 350년에 걸친 네덜란드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이뤄냈다.
이처럼 일본군의 남방진출이 계기가 되어 일본의 패전 후 아시아로부터 아프리카까지 유럽식민지였던 각국의 독립물결은 멈출 줄 몰라 제2차세계대전 후 세계지도는 일변했다. 1960년 유엔총회에서 식민지독립선언이 결의됐다. 이는 대동아회의 공동선언과 같은 취지였다.”
문부성은 이에 대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의 독립에 관하여, 각국의 독립에 이르는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군의 남방진출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종 합격본은 양을 많이 줄이고 마지막 문장을 “이들 지역에서는 전전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중에 일본군의 남방진출은 아시아 제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수정했다.
가해는 숨기고, 피해는 과장하고
이상의 한국 관련 부분을 자세히 뜯어보면 수정을 많이 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는 인상을 준다. 이는 가해사실에 대한 서술이 적기 때문이다. 원래 교과서 검정은 기술된 사실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무엇을 써넣으라고 할 권한은 없다. 따라서 집필자가 이를 교묘히 이용하면 가해 사실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그러나 이 교과서는 일본의 피해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초 검정본은 ‘전쟁의 참화’라는 항목에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전쟁중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군인이 아닌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국제법으로 금지돼 있고, 미군은 일본을 공습할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군수공장만 공격했다. 그러나 미군측이 기대한 정도의 전과가 오르지 않자 드디어 미군은, 일반서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개시했다.
1945년(쇼와20년) 3월 미군은 334기의 B29폭격기로 동경의 강동지구를 공습, 우선 동서 5km, 남북 6km에 소이탄을 투하해서 불의 벽으로 퇴로를 차단한 뒤 융단폭격을 해서 약 10만명을 살해했다. (중략) 더욱이 미군은 인구가 많은 순으로 전국 64개 도시를 불태웠다. 어린이들이 위험을 피해 부모 곁을 떠나 지방의 절 등으로 소개됐다. 일본의 사망·행방불명자는 군인 군속 약 186만명, 민간이 약 66만명,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세계 전사자는 220만명, 부상자는 400만명으로 추정된다. 제1차 세계대전을 훨씬 뛰어넘는 대참화였다.”
이런 기술은 한국이나 중국, 대만 등의 피해사실을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간 것에 비하면 형평성을 잃고 있다. 문부성도 이 점을 지적했고 약간 수정을 했지만 일본은 미국에 엄청나게 희생됐다는 ‘항의’의 냄새는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동경군사재판에 대한 불만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초 검정본은 “재판관은 전원 전승국에서 선발됐고 중립국이나 패전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증거 조사도 일본측 변호사 것은 계속 각하됐고, 검찰측 것은 진위가 의심스러워도 채택됐다. 더욱이 이 재판에는 위증죄도 없었다. 이 재판은 국제법상 정당성이 없다는 설도 유력하다”고 동경군사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 교과서에 대해 아이러니칼하게도 모임측과 이를 반대해온 시민단체가 모두 “수정을 했지만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임측의 의미는 여러 곳을 수정했지만 학생들이 일본에 긍지를 느낄 만한 수준은 유지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비해 시민단체는 표현을 바꾸었다고는 하지만 자국중심적인 역사인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둘 다 옳다는 점에서 역사교육의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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