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4월1일부터 6일까지 5박6일간 일본을 방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총리, 자민당의 실력자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당 행정개혁추진본부장, 일본 언론에서 차세대 총리감 1위로 꼽는 다니가키 사다카즈(谷禎一) 자민당의원, 방위청장관 출신인 에토 세이시로(衛藤征士郞) 외무성 부대신(자민당의원), 야당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 가운데 한 명인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정조회장 등 일본정계의 유력 인사들과 일본외무성 고위당국자, 일본 주요 언론사 사장, 한반도 문제 전문가 등을 각각 만나 최근 한일 양국간에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국제정세, 일본의 정치개혁, 양국의 미래지향적 발전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폭넓게 교환했다. 또한 한일 차세대 지도자들의 교류 협력 필요성에 공감했다.
마지막 일정으로 지방 행정개혁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나가노현(長野縣)을 방문,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 지사와 면담하고, 주민들과 지사가 현장에서 만나 지역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자리인 ‘구루수와슈가이(車座集會)’에도 참석하여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개혁 실태와 그 현주소를 파악하는 시간도 가졌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일본을 방문한 짧은 기간 동안,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미·중 전투기 충돌사건, 모리 총리의 사임의사 표명과 자민당 총재선출 움직임, 지바현(千葉縣) 지사 선거에서 무당파(無黨派) 여성후보인 도모토 아키코(堂本曉子)씨의 당선 등 현재 일본의 한 단면을 상징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는 일본 국내 일부 세력 사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부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전투기 충돌사건은 다행스럽게 해결돼가고 있지만, 미국과 중국의 갈등 상존과 이런 양국관계에 무관할 수만은 없는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외교적 입지설정이라는 측면에서 특히 관심이 쏠리는 사건이었다.
리더십 부재의 일본사회
무당파 여성후보 도모토 아키코의 지사당선은 10여 년이나 지속된 장기 경기침체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 누적, 그리고 자민당 장기집권으로 인한 국민들의 정치불신과 정권 피로현상으로 불거진 모리 총리의 사퇴, 이런 중앙정치에 대한 심각한 불신과 정치개혁에의 열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들을 목격하면서 ‘리더십 부재 사회’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무엇인가를 분출할 듯한, 마치 ‘휴화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분출된 변화의 흐름이 과연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또한 한반도에는 어떤 파급효과가 있을 것인지 나로서는 사안 하나하나가 적지 않은 관심사였다.
교과서문제 DJ정권이 마무리해야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우익단체가 주동이 되어 무책임하게 써버린 한 권의 역사교과서가 그 동안 공들여 쌓아놓은 한일 양국의 우호 관계를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것은 아닌가.
필자가 이번 방일 기간에 만난 대다수 사람들의 한결같은 우려였다.
“현재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이 문제를 극도로 우려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왜곡은 단순한 우려 차원을 넘어 국민감정과 결부된 국가간의 중대한 외교 쟁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 및 처리 방향이 향후 한일관계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분수령인만큼, 일본 정부 및 정계 지도층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특히 정·관계, 언론계, 학계에 있는,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지도층이 나서줄 것을 기대한다.”(필자)
“교과서 문제로 주변 국가나 그 국민들의 오해를 사서는 안 되며, 과거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하시모토 전 총리)
“역사란 사실이지 창작물이 아니다. 모래 위에 썼다가 지우는 그런 게 아니다.”(노나카 히로무 자민당 행정개혁추진본부장)
“역사교과서 문제는 ‘레토릭(rhetoric)’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양국 발전을 위해 취한 용단에 역행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외무성 고위 당국자)
필자가 일본 정계의 실세들, 그리고 일본 외교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위치에 서 있는 외교 당국자를 만나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임하는 그들의 태도에 곤혹스러움이 배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차세대 주자로 평가받는 다니가키 의원 같은 사람은, 일본사회 내부의 내셔널리즘이 분출되는 이유로 장기간에 걸친 경제 침체를 들었다. 그는 “일본인들의 자신감 상실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며, “경제 침체로 인해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여 초조감에 사로잡힌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편으로 내셔널리즘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일본 경제가 회복되어 일본인들이 다시 자신감을 찾으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쪽 사람들은 교과서 검정제도가 국가에서 관할하는 ‘국정(國定)’이 아니라, 민간 자율의 ‘검정(檢定)’제도임을 들어 정부가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최초 신청한 내용 가운데 137곳에 대해 수정 지시를 내렸다며 자신들의 입장을 좀처럼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 밖에 문제가 되는 교과서를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교과서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지방교육위원회, 혹은 교사들의 판단에 달린 문제, 즉 민간 자율의 문제라는 주장을 하며 맞대응을 회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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