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래 5년 동안 세계 각국은 전후 복구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세계의 대전이었으므로 미국(파괴된 하와이 일부 제외)을 제외한 일본, 중국, 소련,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모든 나라들이 국내문제로 바쁜 시기였다.
그런 한편으로 미국과 소련은 국제정치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른바 ‘냉전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소련공산주의자들의 팽창정책 때문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6년에 미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와 미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을 창설하고, 1947년 ‘마셜정책’으로 유럽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97억달러라는 당시로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대항해 소련은 전쟁이 끝난 뒤 공동으로 관리하던 독일점령지역의 군사 협조체제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련은 1948년 6월11일 서독과 베를린 사이의 철도 운행을 이틀간 중단시킨다. 또 며칠 뒤인 6월16일에는 이른바 ‘4개국 군사조율체제’에서 대표단을 철수하기에 이른다. 결국 6월23일 소련은 동독과 베를린에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그 유명한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소련은 또 1949년 9월 핵실험에 성공해 핵보유국이 됨으로써 미국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유럽의 복잡미묘한 국제정치 문제에 대처하기 바빴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한반도문제를 챙길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소련과 중국은 발맞추어 유엔에서 ‘대만’(장개석 정부의 중국)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모택동이 실세를 쥔 중국 정권을 인정해야 하는 곤혹스런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12일 프레스클럽의 기자 인터뷰에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한반도를 제외한 알류산 열도와 일본, 그리고 …”라는 발언이 그것인데, 우리로선 원한의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이었던 것이다.
한반도 제외된 ‘애치슨 라인’
그런데 애치슨의 “일본을 포함한 알류산 열도로부터 필리핀까지가 미국의 방위선”이라는 발언은, 어느 의미에서는 미국의 관할하에 들어오는 일본과 필리핀을 보호하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 한국을 얕잡아본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국(自國)의 방위는 자국민의 노력과 힘, 독립적 의지로 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 의도가 어떠했든 김일성과 스탈린 및 모택동은 애치슨 라인을 믿었고 또한 용기(?)를 내어 남한을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애치슨 라인이 남침의 결정적 동기가 된 셈이다.
북한은 소련의 계획된 정치공작에 따라 남조선을 해방하고 혁명적화통일을 위한 온갖 전술(정치선전, 평화위장공세, 게릴라 파견 등)을 구사했다. 모택동의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쫓아낸 뒤 여유를 가지고 북한을 지원했다. 중국 군대가 ‘인민해방군’이라면 김일성의 군대는 ‘통일해방군’이 되어야 한다고 중국이 김일성을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 스탈린을 설득하여 ‘남조선해방 계획’(The plan of liberate South Korea)을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미군의 개입만 없다면 문제는 간단하다는 논리로, 몇가지 원칙을 정해 놓고 있었다.
첫째, 알류산 열도에서 필리핀까지의 미국 방위선에서 한반도는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미군의 개입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
둘째, 1949년 6월 실시된 남한 주둔 미군의 전면 철수를 호기로 만들 수 있다는 점.
셋째, 남조선 통일을 위한 위장 평화 공세를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다는 점.
넷째, 남조선의 이승만이 선제 공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
다섯째, 남조선의 모든 정치, 경제, 군사 및 사회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선전·선동 그리고 폭력과 파괴를 이룩해 낸다는 점.
이것이 북한의 기본적인 ‘남조선해방전략’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6월 말 회계연도 준비와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에 맞서 수소폭탄을 실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1950년 6월의 주말(1950년 6월24일)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군수산업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6·25전쟁을 촉발한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즉 2차 세계대전 후에 쌓아둔 미군의 무기를 처분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전쟁은 항상 정치력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이 조화를 이룰 때에 발생하는 것이지 무기가 남아 돌아간다고 해서 일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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