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17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가 타계했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는 1면 톱으로 ‘캐서린 84세에 죽다’는 제목을 뽑았다. 부제는 ‘용기, 영향력, 겸양의 지도자’. 부시 대통령도 애도사에서 그녀를 “수줍음이 있지만 강철 같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겸손하며 우아한 사람”이라고 묘사했고, A. 윌리엄스 워싱턴 시장은 캐서린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내에 조기를 걸게 했다. 아울러 그녀를 “탁월한 발행인, 사업가이자 활동적인 시민 지도자”로 평가하면서 “시정(市政)에 대한 끊임없는 워싱턴 포스트의 비판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는 뜻을 전했다.
캐서린 그레이엄.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죽어서도 ‘용기와 영향력, 겸양의 지도자’라고 극찬받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어떤 면이 현직 대통령까지 나서 찬사로 가득 찬 애도사를 읽게 만든 것일까.
독립 언론의 ‘진정한 발행인’
캐서린의 용기는 전설적인 두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방부 기밀 ‘펜타곤 서류(Pentagon Papers)’의 보도와 미국 대통령 닉슨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 보도다. 캐서린의 영향력은 미국 역대 최고의 편집국장으로 손꼽히는 벤 브래들리의 표현대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춰주는 저널리스트”에게 용기를 주는 발행인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사회·정치적 영향력까지 의미한다. 겸양이란, 그녀가 막강한 언론 권력을 가지고 있고, 역대 대통령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인과 경제인을 친구로 두고 있지만, 거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생활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행정부의 수장을 대통령 혹은 수상이라고 부른다면, 언론의 수장은 발행인이다. 언론 발행인이라는 단어는 개념의 독특함만큼이나 권위와 무게를 담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W. 저스트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 발행인의 모습을 구현한 대표적 인물로 캐서린을 꼽는다.
또한 캐서린은 1998년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 ‘퍼스널 히스토리(Personal History)’에서 “저널리즘의 우수성을 따질 때 영업 이익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 뛰어난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신문이 살아야 공익도 있다’는 그녀의 경영철학은 언론도 비즈니스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포천’지가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에 포함되는 그날, 워싱턴포스트는 진정한 ‘독립 언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믿음이었다.
사업 능력과 사교 감각
1960년 캐서린이 사업 일선에 뛰어들었을 당시 언론사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시대적 기운, 즉 반전 운동·여성운동 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자리를 기꺼이 맡았다. 한 예로 캐서린은 워싱턴의 흑인 대학 하워드에 거액을 기증하는가 하면, 미국 최초의 여성 방송사장이 탄생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그녀는 장학금 수여 등 다양한 사회자선 사업을 펼쳐 시민사회 지도자로서도 훌륭히 활동했다.
캐서린은 1917년 6월16일 유대인 사업가이자 관료를 지낸 유진 메이어와 독일 루터교 목사의 딸인 애그니스 언스트의 넷째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진은 뉴욕에서 미국 최초로 증권연구·분석팀을 둔 투자전문회사를 차려 거부가 되고, 워싱턴에서는 7명의 미국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 정부 고위관리를 지내다가 연방제도 이사회 의장과 세계은행 총재를 지냈다. 그리고 1933년 경영난으로 경매에 나온 워싱턴포스트를 매입함으로써 언론사 발행인이 되었다. 어머니 애그니스는 전위예술가이자 독일어·프랑스어·라틴어뿐만 아니라 중국어까지 구사하는 연구가로 많은 저서와 기사를 쓰고 정치에도 적극 참여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캐서린은 다섯 남매 중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다. 아버지 유진은 캐서린이 다섯 살 때 루스벨트에게 “나중에 캐서린이 놀랄 만한 일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는 캐서린의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후계자로 점찍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는 탁월한 정치·사업 능력을, 어머니에게는 예술·사교적 감각을 물려받았다.
캐서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명문 여자 대학인 Vassar대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다가 시카고대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녀는 당시 시카고대학 총장이었던 허친스에게 매료되었으며 그로부터 언론에서 일해볼 것을 권유받는다. 이미 아버지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뒤였기 때문에 방학 때마다 신문사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대학 사회에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던 허친스 총장은 13명의 미국 유명 지식인으로 구성된 언론자유위원회 위원장으로 1946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김택환 역, 중앙M&B)’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은 인물이다. 이 책은 미국 저널리즘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언론 자유와 윤리 그리고 정부·언론·시민의 자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캐서린은 워싱턴포스트에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제의를 뒤로 하고, 당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던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 ‘샌프란시스코 뉴스’ 기자로 입사한다. 그녀는 주당 24달러를 받으며, 부두 노조에 대한 기사를 자주 썼다. 이런 연유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모의 성향에 따라 공화당 지지자였던 그녀는 민주당 지지자로 정치적 견해를 바꾼다. 그녀는 그곳에서 반년 이상 일한 뒤 1939년 워싱턴포스트에 입사했다. 처음 맡은 일은 독자란이었다.
1940년은 캐서린의 운명이 바뀐 해였다. 필립 그레이엄을 만나 6월5일에 결혼한 것. 필립은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케네디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캐서린의 어머니가 흠모해 마지않던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시민사회에서 1대가 돈을 벌면 2대는 정치를 추구하고 3대는 예술을 하려 한다”고 했다. 필립 역시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필립은 태평양 정보 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1녀3남의 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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