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힘으로 만든 ‘트럼프식 평화’, 노벨상엔 부적절

국제적 연대 통한 세계 평화 꿈꾸는 노벨평화상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5-10-11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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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관세 카드 꺼내가며 노벨평화상 달라 압박

    • 美 대외정책과 정반대인 노벨평화상의 정신

    • 노벨위원회, 평화로운 공존공영 꿈꾸지만

    • 트럼프 정부, 힘을 통해 전쟁 멈추는 일을 반복

    • 연대 위한 국제기구도 탈퇴 혹은 지원 중단 압박

    “우리는 (중단 평화 협정을 통해) 일곱 개의 전쟁을 중단시켰습니다. 여덟 번째 협정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만 7000명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협정을 타결할 겁니다. 나는 역사상 그 누구도 이렇게 (많은 평화 협정을) 타결시키지 못했다고 보는데, 하지만 어쩌면 그들(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노벨위원회)은 나한테 그걸(노벨평화상을) 안 줄 이유를 찾아내겠죠.”

    10월 8일 수요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어떤 기자가 아주 직설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바라고 있는데 스스로의 수상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본인이 그간 세계 평화를 위해 해온 업적을 자랑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9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버지니아 마운트버넌에서 열린 정치 후원 행사에 참석한 후 전용 헬기에 탑승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AP 뉴시스

    9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버지니아 마운트버넌에서 열린 정치 후원 행사에 참석한 후 전용 헬기에 탑승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AP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상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7월에는 노벨위원회가 있는 노르웨이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재무장관에게 전화해 관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노벨상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현지 언론에서 나온 일도 있었다. 10월 10일(현지 시각) 노벨위원회는 오슬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대체 왜 트럼프는 노벨평화상을 받으려 했던 걸까. 워낙 ‘크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니 특히 정치인이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제적인 상, 그러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노리는 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볼 수 있다. 이토록 매년 정치적 논란이 벌어지고, 수상자의 자격에 대한 왈가왈부가 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노벨평화상은 그토록 큰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걸까. 노벨평화상이란 대체 무엇인가.



    노벨평화상의 수상 요건은 분명하다.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직접 작성한 유언장에 명시된 내용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노벨평화상은 “국가들이나 국제기구에 의해 중재, 조정 또는 평화 회담에 관한 협력 또는 조약 체결, 법적 해결책에 대한 연구 또는 구상, 평화적인 동기 부여 및 평화 캠페인”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수여된다.

    얼핏 보면 정치적 중립을 담보하고 있는 듯하다. 그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는, 그 어떤 반론도 제기되지 않는 수상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 수상은 불가능하다. 노벨의 유언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평화’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속성 때문이다.

    평화란 무엇인가. 국제정치의 이상주의자들은 철학자 칸트의 사상을 계승하여, 평화를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법과 공화정, 국제 연맹, 세계 시민법 등을 통해 실현되는 어떤 정치적 이상으로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것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정치적 질서와 그것을 통한 인류 모두의 공존공영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것에 도달하는 것을 진정한 평화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을 ‘적극적 평화’라고 한다.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류 전체의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도, 단지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상태, 그런 ‘소극적 평화’에 도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소극적 평화가 그 자체만으로 정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전쟁은 나쁘고 끔찍한 일이지만, 전쟁이 멈췄다는 것만으로 적극적 평화가 실현됐다고 볼 수는 없다.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현시점에 끝나는 것은 반드시 정의로운 일인가. 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해 영토를 빼앗고 해당 지역을 합병하는 일은 절대 정의롭지 않다. 만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휴전 협상을 맺고 현재 양쪽 군대가 지배하고 있는 영역을 국경으로 확정 짓는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힘으로 빼앗는 결과가 되는데, 이는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이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평화의 이상을 앞세워 러시아의 불법 침략 행위를 추인하는 꼴이 된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

    6월 25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있다. 파국으로 끝난 2월 백악관 정상회담 당시 전투복 차림으로 등장해 복장 지적을 받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검정 재킷과 셔츠를 갖춰 입고 나왔다. 젤렌스키 X 

    6월 25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있다. 파국으로 끝난 2월 백악관 정상회담 당시 전투복 차림으로 등장해 복장 지적을 받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검정 재킷과 셔츠를 갖춰 입고 나왔다. 젤렌스키 X 

    한국인에게 좀 더 잘 와닿을 만한 사례를 들어보자. 만약 1950년 북한군이 기습 남침을 감행해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나 미국이 대한민국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대신 ‘평화’를 택해야 한다고 우리 정부를 압박했다면 어땠을까. 한국인 중 그 결과를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한국전쟁 휴전협정은 1951년부터 시작됐으나, 한국의 격렬한 반발로 협정은 1953년까지 이어졌고, 기존의 38선과 유사한 지점에서 전선이 고착되면서 마무리됐다.

    평화는 본질적으로는 정치적 현상

    노벨평화상이 매년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평화란 본질적으로 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제외한 노벨상의 다른 수상 부문, 즉 과학 분야의 노벨상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평화는 측정하기도 어렵고 전쟁이 벌어지지 않거나 억제되고 있는 상태에 대한 평가 역시 개별적인 주체와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이 바로 노벨평화상이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다시 한번 고쳐볼 필요가 있다. 노벨평화상은 어떤 국제정치적 이상을 지닌 걸까.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의 등의 셋으로 나뉘며, 그중 학계를 벗어나 현실에서 유의미한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은 두 개다.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정의했다. 비관적이지만 현실적인 통찰이다. 어떠한 정치 현상이건 ‘상대방’이 누구인지 고려하지 않고 그 의미를 묻거나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노벨평화상이 정치적이라면 대체 그 정치는 누구를 ‘적’으로 삼고 있는 정치인지, 어떤 식으로 ‘우리’를 구성하고 끌어안는 정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현실주의는 앞서 언급한 칼 슈미트 적 관점과 유사하다. 정치를 적과 아군의 구분과 대립으로 본다. 평화란 아무리 잘해도 소극적 평화, 즉 전쟁이 당장 일어나고 있지 않은 상태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우리는 인간인 이상 같은 편을 찾아 뭉치고 적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둔다.

    자유주의는 현실주의에 비해서 이상적이다. 국제 정치가 마치 국내 질서처럼 조약과 국제법, 국제기구 등을 통해 보다 안정적이고 상시적 평화 상태,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소극적 평화’를 넘어서 ‘적극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비전이 자유주의적 국제정치관의 근간에 깔린 것이다.

    이런 인식을 전제로 노벨평화상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역대 수상자 명단을 보면 노벨평화상의 이념을 확인할 수 있다. 노벨평화상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상이다. 스위스의 장 앙리 뒤낭과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가 제1회 수상자의 명예를 가져갔다는 점만 봐도 분명하다.

    장 앙리 뒤낭  국제적십자사 창설자. 동아DB

    장 앙리 뒤낭 국제적십자사 창설자. 동아DB

    뒤낭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를 설립했고 제네바 협약을 제안한 인물이다. 적십자는 오늘까지도 전 세계의 전장에서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기구’로서 평화의 최후 보루 기능을 수행한다. 제네바 협약은 그 후로 등장한 거의 모든 국제 인권법의 기준이자 시금석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학자의 책상에서 정치가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정착시킨 뒤낭이 바로 노벨평화상 제1회 수상자이다.

    파시는 국제 평화 연맹을 창설하고 총재직을 역임했다. 그가 만든 국제 평화 연맹은 오늘날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를 만들고 운영함으로써 전쟁을 줄일 수 있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계속됐다. 노벨위원회가 지속해서 그러한 시도에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음은 물론이다. 1901년 이후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노벨위원회는 다양한 국제 평화 중재 기구에 고루 상을 줬고, 그러한 움직임은 국제 연맹 창설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함으로써 그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노벨평화상의 수상자 모두가 자유주의적 국제정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1964년 수상자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평화적 기여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이는 국제 정치와 무관하다. 1969년 수상자인 국제노동기구(ILO)가 세계 평화, 특히 국가 간의 전쟁 문제에 직접 기여하는 바는 없을 것이다. 1979년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 역시 빈민 구제와 사회봉사에 헌신했지만 국제 정치와 자유주의 질서와는 큰 상관이 없는 활동을 했다.

    노벨위원회는 때로 자유주의 대신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노벨평화상을 안겨주기도 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의문을 표하는 1973년도 노벨평화상이 대표적이다. 1973년 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평화 협정을 주도한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월맹 정치국원 레득토(Lê Đức Thọ)가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는데, 레득토는 수상을 거부하였고 키신저 역시 왜 자신에게 그 상을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전해져 온다. 이 협정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해 수상자 발표 이후 노벨위원회 5명 중 2명이 항의의 뜻을 밝히며 위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만큼 노벨평화상은 성격이 분명한 상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유지됐다. 예외가 있긴 하나 그 지향점을 내려놓은 적은 거의 없다.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동아DB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동아DB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했다시피 그는 취임 전부터 전 세계의 여러 전쟁을 종식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향하는 평화란 ‘국제기구와 법, 조약을 통한 평화’가 아닌, 오직 미국의 힘으로 약자를 억눌러 만든 평화다.

    혹자는 ‘어차피 우리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현실주의적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식의 평화는 현실주의라 보기도 어렵다. 현실주의적 태도를 선호하는 차원을 넘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국제연합이나 유럽연합 같은 큰 단위의 국제 조직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수많은 국제기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노벨위원회가 국제사면위원회,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원자력기구, 유엔평화유지군 같은 여러 단체에 노벨평화상을 준 이유다.

    트럼프는 바로 그런 국제주의적 활동에 적대적이다. 트럼프가 처음 당선되었을 때 미국은 유네스코에서 탈퇴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당선 후 재가입했지만, 트럼프 2기가 시작되자 다시 미국은 유네스코에서 탈퇴했다. 유네스코만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는 유엔을 비롯한 여러 산하 단체의 지원금을 줄이거나 끊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노벨평화상의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노벨평화상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요구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그가 오늘날 대한민국과 일본, EU 등 동맹들을 향해 벌이는 ‘관세 협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적 역량을 더욱 키우고, 특히 태평양에서 중국을 상대로 패권을 유지하려면, 미국은 한국과 일본 등 제조업 역량을 갖춘 동맹국과 ‘원 팀’이 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는 자유주의적 이상은 고사하고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외 통상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 불발의 아픔을 계기로 본인의 모순된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식으로는 평화도 패권도 지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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