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와 관련된 일화를 들을 때마다 생겨나는 의문이 하나 있다. 백지수표를 건네받은 사람은 도대체 얼마의 금액을 적어넣었을까 하는 궁금함이다. 1000만원을 적으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신있게 10억원을 써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나 일의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금액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수표를 건네받은 당사자의 ‘자기 인지상’일 것이다. 자기 인지상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총합과 같은 것이다.
돈이 생기면 삼겹살을 사먹곤 하던 가난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됐다. 그는 고급식당에서 꽃등심을 먹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생겼지만 예전의 단골집에 가서 삼겹살을 ‘마음껏’ 구워먹는다. 자기가 부자라는 새로운 자기 인식이 생기기 전까지, 그의 자기 인지상은 아직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의식(self-awarenes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자의식이 명확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자기정체성(identity)의 혼란을 겪는다.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정신적 에이즈(AIDS)’ 상태와 같다. 우리 육체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경우 거의 자동적으로 침입자를 퇴치하는 방어시스템인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에이즈는 우리 몸 안의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아 사소한 감염에도 결국 목숨을 잃게 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적 에이즈’는 일종의 정신적인 사형선고다. 정신적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확고한 자기정체성 확립이다.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말이지만 자기정체성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우리에게 자기정체성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인물들이다.
김우중의 분노
먼저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올해 2월 ‘자본가의 잘못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김우중 체포결사대’가 프랑스로 떠났다. 보도를 통해 그 광경을 접한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중이 누구인가. ‘세계경영의 전도사’ ‘재계 서열 2위의 재벌총수’ ‘한국 최고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1967년 서울 충무로 뒷골목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에 5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지 30년 만에 정말 ‘꿈’같은 신화를 창조한 사람이다. 대우는 IMF 직전까지만 해도 고용인원 32만(국내 10만, 해외 22만)명, 해외지사·현지법인·연구소·건설현장 등 글로벌 네트워크 590개(110개국), 총매출 71조원, 총수출 151억달러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쌓아왔던 기업이다. 그 기업의 총수가 바로 김우중이었다.
그는 한때 젊은이들과 샐러리맨들의 살아 있는 신화이자 우상이었으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화두로 세인의 찬사와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는 식의 조롱을 받으며 도피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96년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김우중에게 수여한 나라가 아닌가.
세상사가 허무하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의 행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사자인 김우중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나라 전체의 경제위기를 김우중 일개인에게 전가하는 국민적 비난에 대해 강한 분노, 배신감, 허탈함을 느끼고 있다고 전해진다.
“나를 도대체 어디까지 몰아붙일 생각들인가. 내가 그토록 파렴치한 도둑놈, 사기꾼이라면 나를 믿고 같이 일해온, 20만명이 넘는 과거 대우직원들은 도둑놈의 부하들인가. 국민에게는 더없이 송구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어떻게 속죄하며 무엇을 해명하겠는가.”
그의 반발심에 이견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우중에 대한 무차별한 돌팔매질에 필자 역시 한몫 거들고 나서는 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김우중의 오랜 친구이자 고문 변호사였던 석진강씨의 지적은 가슴에 와닿는다.
“일반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아주 쉬워요. 어떤 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건 실패한 다음에 이유를 갖다 붙인 거지, 그것이 꼭 원인이 되었다고 보지 않는 것이 건전할 것 같습니다.”
백 번 공감한다. 매독이라는 성병을 정신과 의사가 치료하던 시절이 있었다. 매독에 감염되면 ‘스피로헤타 팔리다’라는 나선균이 뇌신경을 건드려 정신질환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항생제 한 대면 치료될 환자를 앞에 놓고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을 말하게 하며 정신분석 치료를 한 것이다.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그 원인을 유추할 때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 김우중’의 특질을 살펴보는 일에도 그 교훈은 여전히 요긴할 것이다.
광적인 조증무드(manic mood) 일생
다행히 이 글은 필자가 1995년 대우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때 적어놓은 메모를 기초로 한 것이다. ‘세계경영’이 한창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시기였는데, 본의 아니게 지금의 김우중과 대우그룹의 처지를 예견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 대우그룹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저 ‘김우중 회장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 정도로만 여겼다. 예측 능력을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의 김우중을 보고 실패 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도, 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손쉬운 돌팔매질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필자 나름의 변명이다.
김우중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국내 자서전 시장의 한 지평을 연 책으로 평가받는다. 89, 90년 모두 150만 부 이상 팔리며 두 해 연속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김우중식 사고방식을 성공적 삶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자서전 제목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한글 제목도 그렇지만 영문 번역판 제목은 더 그렇다.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모든 길은 금으로 포장돼 있다)’는 이 제목은 ‘한국 최고의 세일즈맨’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가 걸어온 모든 길은 노다지판으로 연결됐다는 평가에 안성맞춤인 듯하다. 동시에 김우중의 인간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김우중의 일생은 ‘조증무드(manic mood)’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증(躁症)은 충동을 동반하는 흥분상태, 활동과다 등을 보인다. 우울증과 반대인 증상이다.
어떤 한 가지에 심취해 있거나 열광적 성향을 가진 ‘―광(狂)’을 마니아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바로 조증의 영문 진단명 마니아(mania)를 근원으로 한다. 조증이라는 의학적인 표현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니아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광적인 집착, 열정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조증무드에 있는 사람은 늘 자신감이 넘치고 매사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본다. 기분이 좋고 늘 들떠 있다. 할 말도 많고 아이디어도 넘친다.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도 안 자는데 기운은 솟는다. 자연히 일을 자꾸 벌이게 된다. 얼핏 ‘그런 것이 병이라면 나도 한번 걸려보고 싶다’고 할 만큼 매력적이지만 그건 독버섯 색깔이 유난히 유혹적인 것과 같다. 더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들은 늘 확신에 차 있어서 일을 쉽게 시작한다. 한번 시작하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다. 두려움도 없다. 그들의 지나친 낙천성은 나중에 발생할지도 모를 문제에 대한 대비를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조증의 끝이 예외없이 남루하고 허망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조증무드 때 사업을 확장하고, 지나친 투자를 했던 사람이 조증무드가 가라앉은 다음에 후회하며 그것을 감당하느라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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