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방송인 송해가 무대에 나와 한 손을 높이 들어 “전국 노래자랑!” 하고 외친다. 이때 야외든 실내든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이 그의 선창에 따라 잘 훈련된 아이들처럼 “전국 노래자랑” 하고 복창한다. 이 무대를 이끄는 송해는 관객들에게 능청을 떨며 애교를 부린다. 흔히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까분다고 할 만큼 그는 나이로 상대에게 거리감을 주는 법이 없다. 누구든 그를 편하게 생각하고 쉽게 접근한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출연자가 그의 얼굴을 진흙 범벅으로 만들고 향토음식이라고 고춧가루가 잔뜩 묻은 김장김치를 얼굴에 문질러대도 “앗 따가워.” 이 한 마디로 받아 넘긴다. 그런 그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가 따뜻한 서민의 웃음 한 자락이다.
능청과 애교 넘치는 75세 노인
송해는 올해로 만 75세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능청과 애교를 고희가 넘은 노인이 노는 모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그는 젊고 매력있다. 어찌 보면 주책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75세라는 나이가 어울려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권위와 관록을 내세우고 더러는 옹고집을 부리며 나이 대접을 받으려는 게 ‘칠십노인’들의 대체적인 정서라면 그의 모습은 철저한 ‘반동’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게 매력이다. TV에는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목구비, 거무스름한 피부에 작은 키, 어눌한 표정. 일견 TV방송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변함없이 진행해왔다.
서민의 애환과 꿈이 실린 이 프로그램은 ‘송해’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벌써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2001년 12월 말까지의 방영 횟수가 1105회에 이르고, MBC TV의 ‘전원일기’와 함께 우리나라 TV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꼽히게 된 밑바탕에는 그의 수더분한 진행솜씨가 가장 큰 자원이 됐다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이 프로그램이 비결은 무엇일까. 시청자나 관객이 식상하지 않고 변함없이 방송인 송해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답을 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낙원동 골목에 자리잡은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낙원동 136번지 보광빌딩 305호. 유명한 부산초밥집을 옆에 끼고 3층으로 오르자 ‘원로연예인 상록회’라고 쓰인 간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출입문을 여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실내를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이고, 구석에 있는 테이블 앞에선 TV에서 낯익은 송해가 케이크 조각을 뜯어먹다가 접시를 집어든다. 오후 1시 무렵이니 아마도 점심인 것 같았다.
“주전부리를 좀 했소.”
손으로 입을 쓱 훔쳐내며 “커피 할라우?” 하고 묻는 그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구김살이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그의 이미지가 연상되자 웃음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칫 실수를 할까 싶어 필자는 입 가장자리에 힘을 주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천연덕스럽다. 당신의 위엄은 별게 아니라는 듯, 그 방면에는 달통한 경지에 있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필자가 우물거리는 사이 벌써 커피가 왔다.
그와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사무실은 장바닥처럼 바글거렸다. 회원들이 하나 둘씩 오기 시작하더니 오후 2시쯤 되자 왕년의 코미디언 가수 연출자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들었다. 남자 회원들은 익살과 농담을 질퍽하게 풀어놓더니 일상처럼 두 개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마작 패를 돌리기 시작한다. 여성 회원들은 한켠에서 고스톱 판을 벌이고, 다른 한쪽 소파에서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식들 손자들 얘기로 꽃을 피운다.
남자회원들의 마작판엔 100원짜리 동전이 오고간다. 때로는 1000원짜리 판을 벌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소일거리로 하는 게 대부분. 돈을 딴 사람은 도망갈 생각을 아예 버리고 저녁에 술 살 걱정을 해야 한다. 돈을 딴 사람이 1만~2만원은 수입 잡게 되어 있어서 소주 몇 잔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우리도 공직자나 다름 없는데 이런 모양이 나가면 좋지 않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한다.
연예인상록회의 회원자격은 60세 이상의 연예활동을 한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다. 회원 중에는 배우 윤인자씨, 가수 이남순 김선영씨가 있고 코미디언으로는 구봉서 배삼룡씨 등이 있다. 이날도 전 MBC 연출자 진필호씨를 비롯해 낯익은 사람들이 꽤 사무실을 찾았다.
“나이가 들수록 옛 친구들이 그리워요.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 좋은 일도 해보자고 이런 자리를 만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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