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솜씨뿐만 아니라 머리도 참 좋으셨던 것 같다. 4대 독자로 태어나 하기 싫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셨다지만 웬만한 한문은 줄줄이 꿰셨다. 스무 명 남짓 되던 일꾼들의 임금을 아무 기록도 없이 일한 날짜와 돈을 기억해가며 머리로 정확히 계산해내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보다 술이 더 원망스럽고 미웠다. 술을 드시지 않았을 때의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술만 드셨다 하면 온 집안이 공포에 떨어야 했으니 술이 원수 같았다. 그런데 그 원수 같은 술이 우리 집엔 늘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술을 담가놓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살림이었음에도 어머니가 술을 담근 것은 순전히 접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선 이상하게도 집에서는 좀처럼 술을 드시지 않았다. 손님이 와도 조금밖에 안 드셨고 주정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 집엔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지나가는 까마귀라도 불러서 먹이고 입히고 할 만큼 인심이 좋은 아버지의 성품 탓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역시 아버지가 계시든 안 계시든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그냥 보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미처 준비된 술이 없으면 나를 시켜 가게에 가서 술을 사오게 하셨다. 어머니께선 친척은 물론, 아버지 친구나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던 일꾼들에게까지 정성껏 끼니를 대접하고 술을 내놓았다.
일이 별로 없는 추운 겨울에는 밤마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우리 집에 오셔서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도록 놀다가 가셨다. 그때마다 방 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해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담배 몇 개비 걸어놓고 화투를 치거나 술내기 화투를 칠 때면 더욱 그랬다. 간혹 다투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게 좋았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 술을 드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또다시 불안하고 초조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주정은 변함이 없었다.
내 어금니가 깨진 사연
중학생이었을 때로 기억되는데 비가 약간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무언가 긁적이고 있던 나는 설핏 동네어귀에서 고성이 오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목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서도 들으셨는지 형한테 가보라고 하셨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형은 창피스럽다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니 나라도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구멍가게 옆 후미진 공터에는 구경꾼들이 빙 둘러서 있었고, 그 가운데에 웬 젊은이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뛰어들어 그 젊은이의 턱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이날 이때까지 누구한테도 얘기한 적이 없지만, 내 왼쪽 어금니 하나가 깨진 것은 그때였다.
나는 여전히 술이 원망스러웠고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나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고 나름대로 사리판단도 깊어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술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더 커졌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술이라는 생각에 술을 더 미워했는데, 이제는 ‘술 하나도 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어, 술보다 아버지가 더 원망스럽고 미웠던 것이다.
누나와 작은형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 어느 날 무단히 집을 나간 아버지가 조선팔도로 만주로 떠도시다가 여덟 해 만에 돌아오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렇게 무책임한 아버지일 바에야 차라리 그때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게 나았을 것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행동으로 반항을 하거나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런데 이처럼 차갑게 굳어가는 내 마음을 녹여준 것은 뜻밖에도 서슬 퍼런 어머니의 한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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