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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

독사 훈련으로 ‘神弓 코리아’ 길러낸 승부사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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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수전 요원(UDT) 훈련, 공동묘지 담력 키우기, 번지점프, 뱀 소굴 탐방, 낙하 훈련…. 영화 ‘실미도’에 등장하는 북파 간첩 전문 훈련 프로그램이 아니다.
  •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무려 28년간 세계 최정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 양궁 대표팀의 독특한 훈련 프로그램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타고난 카리스마로 선수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독한 훈련을 시켜 한국 양궁의 오늘을 있게 한 주인공이 다름 아닌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다.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
한국 선수들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전했다. 그중에서도 양궁 선수들의 독주가 눈부시다. 양궁은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금메달을 안겨준 전통적인 효자 종목이다. 우리 양궁 대표팀 선수들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전체 4개 금메달 중 3개를 싹쓸이하며 세계 최정상의 실력을 다시 한 번 뽐냈다.

한국 양궁이 처음 금메달을 딴 것은 대표팀을 올림픽 무대에 첫 출전시킨 1984년 LA 올림픽에서다. 당시 서향순 선수가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딴 후 이제까지 양궁 대표팀은 무려 19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여자양궁 대표팀은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올림픽 여자 단체전을 무려 7연패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는 오진혁 선수가 남자양궁 개인전에서 우승하며 28년 ‘노 골드(No Gold)’의 한도 풀었다.

한국 양궁이 세계 정상의 위치를 무려 30년 동안 굳건히 지키면서 다른 나라의 견제도 날로 심해지고 있다. 런던 올림픽의 개인전 방식이 점수 총합산제에서 세트제로 바뀌었듯 세계양궁협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경기 규칙을 개정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양궁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자 각국 양궁 팀에서는 ‘한국인 지도자 모시기’ 붐이 일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 출신 양궁 지도자가 한국 양궁의 최대 적수가 되는 기현상도 빚어졌다.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40개국 중 12개국의 감독이 한국인이라는 점,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기보배 선수와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멕시코 아이다 로만 선수를 조련한 사람이 한국 출신의 이웅 감독이라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 대표팀은 이에 굴하지 않고 런던 올림픽에서 다시 3개의 금메달을 가져오며 ‘양궁 강국’임을 다시금 입증했다. 날로 심해지는 견제,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규칙, 전 세계 선수의 상향평준화 속에서 딴 금메달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값지다.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기에 한국 양궁은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30년간 세계 정상의 위치를 지키고 있을까.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 뒤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현재까지 대표팀 코치, 감독, 대한양궁협회 임원 등으로 일하며 “독종 중 독종” “곁에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는 평가를 들어온 서거원(56)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 겸 계양구청 양궁팀 감독이 있다.

서 전무는 일각에서 한국 양궁의 성공을 타고난 기질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 민족이 동이족(東夷族), 즉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서 양궁에서 승승장구하는 게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과 치밀한 전략의 결과 오늘날의 성공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넘치는 카리스마와 불같은 추진력으로 ‘서칼’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서 전무의 리더십 비결을 탐구해보자.

축구선수, 19세에 처음 활 잡다

서 전무는 1956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각종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내던 그였지만 정작 그가 활을 잡은 것은 만 열아홉 살이던 1975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양궁은 전문적인 스포츠라는 평가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정신 수양을 위한 취미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선수층도 매우 얇았다. 당연히 국제대회에서 특출한 성적을 거두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양궁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젊을 적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그는 활만 잡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양궁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바로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늦깎이 양궁선수였지만 1977년 처음 출전한 전국 대학부 종별 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준우승의 주역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1978년 국내 최초의 양궁 실업팀인 삼익악기 양궁팀에 무난히 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궁선수로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국산 활이 아닌 외제 활만 사용하던 시절이라 장비도 고가였고, 그나마 몇 달씩 기다려야만 새 장비를 만질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인기 종목도 아니라서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양궁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의 귀에 반대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1985년 그는 선수 생활을 끝마치고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운동선수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존재하는 요즘에는 만 스물아홉 살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에게 서른이란 환갑이나 다름없는 나이였다. 그 역시 선수 생활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선수를 하느냐”는 주변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한 지도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직후 국가대표팀 코치가 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처음 남자양궁 대표팀 감독에 올랐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며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여자선수들이 1984년 LA올림픽에서 이미 금메달을 획득하고 정상에 올랐던 것과 달리 남자선수들의 성적은 여자선수들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양궁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지 못한다면 향후 남자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끊길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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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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