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대구의 전통적인 한의사 밑에서 한의학을 공부하셨는데 그 선생이라는 분은 내가 어릴 적에 벌써 호호 영감이 되어 있었다. 머리에 누런 호박 관자가 달린 망건을 쓰고 도폿자락에서 인삼주가 담긴 호로병을 꺼내어 조용히 마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영감이 다녀가는 날은 온 집안이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아버지는 ‘동의보감’에 관해서라면 영남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미군정이 시작된 이후 의사시험에 합격해 한의사 자격증을 땄는데 당시 이 자격증을 딴 사람은 읍에서 단 두 사람뿐이었다.
전쟁이 나자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우리 가족은(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부산 쪽으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의료기관에 지원하여 따라다니다가 때로는 인민군 쪽 의료기관에 소속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 보고 들은 것을 사랑방에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삼아 그중 많은 부분이 내가 뒤에 소설을 쓸 적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눈빛이 매섭고 콧수염이 멋있었지만 아버지는 실수투성이의 인간형이었으니 그 실수의 뒤치다꺼리는 자연히 어머니 몫이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우리는 동네 어귀에서 동네 안의 새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빚을 많이 지게 되어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약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부산으로 돈 벌러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에 아버지를 따라간 사람이 바로 갓 다섯 살 난 나였다. 그때의 상황을 나는 어떤 소설에선가 이렇게 그렸다.
[아버지가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의 발 밑에서 자갈이 와글와글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읍으로 올라가는 국도에는 자갈이 자동차 바퀴에 밀려 작은 둔덕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부황 든 얼굴색의 달이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비치는 길을 열심히 걸어갔다. 플라타너스의 그림자가 시꺼멓게 도깨비처럼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수지 둑길 밑으로 걸어갈 땐 저수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길다란 아버지의 회색 두루마기가 초겨울 바람에 날려 자꾸만 내 얼굴을 가렸다….]
읍에 와서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탔다. 짐과 사람이 뒤섞여 있는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심하게 멀미를 했다. 마침내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때는 마악 전깃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초저녁 무렵이었는데, 그때까지 시골의 호롱불만 보아온 나는 불꽃이 피어난 그 정경에 그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에 잠겼다. 정류장 어디선가 낮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느 단층집의 귀퉁이 방 하나를 얻었다. 우리방 쪽에는 늘 응달이 졌지만 마당에는 화단이 곱게 가꾸어져 있는 그런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나를 남겨두고는 하루 종일 나가 있다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고는 하셨다.
“아부지가 돈 많이 벌어올 테니까 잘 놀아야 된다, 알겠제? 우리 영현이도 이젠 다섯 살이니까 어른이지. 그리고 대문 밖에는 절대 나가서는 안 된다. 아이들 잡아가는 순사들이 득실거리니깐.”
“사나이 대장부가…”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늙은이처럼 혼자 웅얼거리면서 구슬을 치거나 돌멩이로 소꿉장난을 하면서 놀았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왱왱 소리가 나는 양철 팽이를 여남은 개나 사다주셨는데 그게 그때에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몸이 허약했던 나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팽이를 돌리며 혼자 상상에 빠지고는 하였으니 그 뒤에 내가 좀 이상주의자가 된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몇 달을 그렇게 지내다가 어머니와 여동생도 따라왔고 아버지도 남의 한의원에서 고용의사로 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건 그 무렵부터였다. 가족이 모이면서 딸기철에는 멀리 강가에 놀러가기도 했다. 구멍이 숭숭 난 철판다리를 건너갈 때에 나는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매달렸는데 아버지가 뿌리치고 끝까지 혼자 가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나이 대장부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다. 키를 넘는 수숫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석우석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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