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이회창 총재, 침묵의 정치를 배우고 갔다”

  • 김기영 hades@donga.com

    입력2005-04-27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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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덕사(修德寺)하면 일반인들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애절한 가요를 먼저 떠올린다. 불교를 아는 사람은 수덕사를 선지종찰(禪之宗刹) 덕숭총림(德崇叢林)이라고 부른다.
    • 한국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을 계승해온 대표적 사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표현이다.
    • 그런데 최근 수덕사는 다른 이유로 유명해졌다. 지난 1월20일 늦은 오후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가 돌연 이 절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회창 총재가 충남 예산 수덕사를 찾기 전날, 조계종 정대(正大) 총무원장은 조계사를 방문한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 일행을 만난 자리에서 이총재를 가리켜 “그 사람(이회창 총재)이 집권하면 단군 이래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정대스님은 또 “야당이 입만 열면 총선 민의를 주장하나 97년 대선 민의도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5년 국정을 끌고 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나라의 운명을 맡겨놨으면 아끼고 감싸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총무원장의 발언은 그 날 밤 방송뉴스를 통해 곧바로 전 국민에게 전해졌다. 이총재와 한나라당이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이런 소동이 있은 다음날 이총재가 수덕사를 찾은 까닭에 그의 언행은 언론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산사에서 이총재를 맞은 사람은 수덕사 주지 법장(法長) 스님. “그날 아침에 연락이 왔어요. 오후에 들르시겠다구요. 그래서 나도 공인인데 몇 시쯤 올 건지 시간을 얘기해줘야 기다리지 않겠느냐 했더니 5시쯤 오신다고 그래요. 이총재를 만나 나눈 얘기는 신문에 다 났더라구요. 그대로예요. 차 마신 것 뿐, 별다른 얘기는 없었어요.”

    과연 그 것 뿐이었을까. 수덕사를 찾기 전까지 이총재는 전날 총무원장의 발언에 상당히 기분이 상해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관계자도 총무원장의 사회적 비중 탓에 공개적으로 비난도, 반발도 못한 채 애만 태우고 있었다.

    법장스님의 선물



    그런데 수덕사를 다녀온 뒤 이총재는 변했다. 맹렬하게 상대를 몰아붙이던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강경일변도 대북정책에서 벗어나 여당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는가 하면, 많은 권한을 부총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여유롭게 정국구상에 나섰다. 도대체 수덕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2월16일, 법장스님을 만나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수덕사를 방문한 이총재에게 법장스님은 선물로 그림 한점을 줬다고 한다. 선물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기기 마련. 그래서 그림 얘기부터 물어보았다.

    ―이총재에게 선물로 그림을 한 점 줬다고 하던데 어떤 그림이었나요.

    “통도사에 계신 수완스님이 그린 그림인데 산이 있고 해가 있는 그림이지요. 해인지 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빨간 게 있으니까 해라고 보는 거죠.”

    ―이총재가 수덕사를 찾은 게 처음이 아니라고 하던데.

    “많이 왔었죠. 잠시 들르기도 하고 몇 년 전에는 주무시고도 가고 그랬죠.”

    ―이총재가 수덕사를 찾은 것은 그 전날 정대스님의 말씀 때문에 속이 상해서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종교지도자가 특정정치인을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비판도 있는데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총무원장 스님이 일부러 누구를 깎아 내리거나 배척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장스님의 얘기를 가타부타 논하기는 별로 안좋은 것 같고, 설혹 잘못했다 쳐도 또 한 번 사회여론화 하는 것은 별로 환영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장스님 말씀 중 이총재가 공천을 주지 않았다고 예를 든 김광일 씨의 경우, 이총재가 공천을 줬는데 반납하지 않았습니까. ‘정치 보복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한나라당이나 이총재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현 정부가 재집권하더라도 보복은 하지 말아야한다는 일반론을 얘기한 것이지, 이름을 거명했다고 그분한테만 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생정치를 하라는 얘기였지요.”

    ―주무시고 갈 정도면 두 분이서 나눈 얘기도 많았을텐데요.

    “글쎄 얘기할 시간이야 많지만 그야말로 자연스런 얘기죠. 나하고 무슨 정치 얘기를 하겠어요. 역사 얘기, 또 인간의 윤리 얘기, 그런 자연스러운 얘기죠 뭐.”

    ―이총재를 처음 봤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맑죠. 정치를 오래 하고 아니고를 떠나 사람이 참 맑아요. 그 양반 눈을 봐도 맑지 않습니까. 검은 동자는 검고 흰자는 하얘야 하는데 이총재 눈이 그렇습니다.”

    법장스님은 활발한 사회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연말까지는 티벳의 고승 달라이라마의 방한준비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아 일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우리정부는 돌연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막았다. 중국정부의 압력 때문이라는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달라이라마 방한이 좌절된 직후 법장스님은 상임대표 자리를 내놓았다.

    ―달라이라마 방한은 무산된 건가요.

    “나는 상임대표를 그만뒀거든요. 외교통상부에서 거부하면서 상임대표를 내놨어요. 달라이라마는 훌륭한 스님 아닙니까. 승려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한번 왔다 가면 ‘승려는 사회참여 안한다’는 항간의 오해를 풀 수 있겠다 생각했고, 또 김대통령의 남북화해와 협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정부가 중국 당국의 눈치를 봐 달라이라마의 입국을 거절했다고 하던데요.

    “중국 정부에서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반대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게 명분이었죠. 그러나 그런 자세는 ‘저자세 외교다, 굴욕적 외교다’라고 주장하고 장관을 만나 설득도 했습니다. 당국에서도 처음에는 잘될거라고 했고 우리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중국 부대사가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 “방한은 안된다”고 한 그 다음날부터 우리 정부도 “안된다”고 그런 거죠.”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 발대식 때 정치인들이 많이 왔더군요. 그 가운데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도 있었는데요, 이최고위원과는 잘 아는 사이인가요.

    “그럼요. 잘 아는 사이죠.”

    ―대권 주자로서 이최고위원을 평가한다면.

    “글쎄….”

    ―스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정치, 정치인상은 어떤 겁니까.

    “상대를 인정해야죠. 설령 시비를 걸더라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가 욕을 하고 시비를 걸더라도 인정해야지요.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포용입니다. 용서할 것만 용서하고 포용할 것만 포용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죠. 여당도 야당을 인정하고, 야당도 여당을 인정하고 그래야 상생의 정치가 됩니다.”

    장고 끝의 결론, ‘상생의 정치’

    ―1월20일 수덕사를 방문한 이총재에게도 그런 덕담을 했습니까.

    “이총재하고 한 얘기는 신문에 난대로입니다. 이총재도 그러시더군요. ‘발전하기 위한 용트림’ 아니겠느냐구요. 이총재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상대를 포용하고 이해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수덕사 방문 뒤 이총재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고들 합니다.

    “장고 끝에 상생의 정치를 하고 계신 거겠죠.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의 정기를 받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하하”

    ―조계종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얼마 전까지 국민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쳤는데.

    “좋아요. 바람이 불면 파도는 치는 거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파도도 가라앉는 것 아닙니까.”

    법장스님은 그러나 조계종 스님들의 다툼을 속세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스님들은 거짓이 없어요. 세상에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남이 욕하든 말든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들은 속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진솔하다는 거죠. 속인들 눈에는 분명 나쁜 짓입니다. ‘돈 때문에 싸운다’는 손가락질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스님들은 사상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남이 뭐라 하든 체면 차리지 않아요. 속세의 패거리들도 그렇게 싸우지는 않는데 남이 보건 말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잣대로 보니까 그렇게 보일 뿐 수행자의 안목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법장스님에게 우리 불교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 보는지를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법장스님은 조계종 분규의 원인인 총무원장 선출방식을 획기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화 측면에서 불교계는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종교에서는 숫자를 민주화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모든 결정을 성직자들이 표로 결정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로 인간을 저울질하면 벽이 만들어지고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죠. 물론 대중의 뜻을 수렴하는 민주적 사고는 계속 가져가야지요. 지금의 방법론에 찬성할 수만은 없습니다. 총무원장 선출방식이 승가에 필요한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여론으로 모아져야지 표로 판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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