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솜같은 분위기, 칼같은 기질

  • 이수형 <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sooh@donga.com

    입력2005-05-20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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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건 원장 취임 후 국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국정원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남 출신인 그가 이끄는 국정원이 내년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국민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솜 속에 바늘이 있다.”

    중국의 마오쩌뚱(毛澤東)이 생전에 저우언라이(周恩來)를 가리켜 한 말이다. 온화한 겉모습, 하지만 강철 같은 내면을 간직한 저우언라이에 대한 함축적인 묘사다.

    법조인들은 지난 3월 국가정보원장에 오른 신건(辛建·60) 전법무부 차관에 대해서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법조계 인물 정보에 관한 한 가장 정확하고 방대한 규모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오세오닷컴’(www.oseo.com)의 인물정보란에는 신원장에 대해 ‘소탈하고 온화해 부하직원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한 추진력과 칼 같은 기질이 있어 한번 수사를 맡으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전한다. 국정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소탈하고 온화한 성격이나 단호함을 겸비하고 있다’고 소개돼 있다.

    ‘눈에 안 띄는’ 국정원장

    신원장의 국정원장 임명 소식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 곳은 한나라당이었다. 한나라당은 신원장 임명에 대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신건 국정원장을 통해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의 국내정치 정보활동을 강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한 민주계 출신 의원은 “신원장이 전 정권 때인 93년 슬롯머신사건으로 법무차관에서 중도 하차해 한나라당에 대한 적개심이 강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반응에 대해 신원장은 그냥 웃기만 했다고 한 법조계 인사는 전했다. 그에 따르면 신원장은 “야당 사람들 중에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잘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안심할 것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야당의 지인들도 자신의 합리적인 일처리 방식을 잘 알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염려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그의 국정원장 취임에 대해 법조인 출신 한나라당 의원들은 오히려 온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예리한 바늘은 부드러운 솜 속에 숨어 있는 법. 신원장의 국정원장 취임 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국정원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국정원장 취임 후 ‘음지’로 숨었다. 대통령 주례보고와 국회 정보위 출석 등 불가피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흔한 언론사 간부들과의 상견례 등 ‘통과의례’도 아직 안 거쳤다. 신원장 스스로 취임 직후 직원들 앞에서 “국회출석 등 법에 정해진 자리가 아니면 나서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장은 정보수집과 정세판단 등을 위한 외부인사와의 면담이나 약속도 거의 구내에서 해결한다. 신원장이 외부인사들을 만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은 국정원 내의 ‘국가정보관’이다. 이 건물은 98년 이종찬(李鍾贊) 원장 시절 신축한 것.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국정원 간부나 직원들은 대부분 자신의 사무실에서 외부 손님을 맞았고 그로 인해 자주 보안문제가 거론됐다. 이 전원장은 이런 논란에 따라 외부 인사들을 위한 면회소 또는 영빈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국가정보관을 지었다.

    “국정원장은 심부름꾼일 뿐”

    신원장 취임 전까지만 해도 이 건물을 이용하는 간부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나는 것 자체가 내부인사들에게 노출되는데다 음식도 구내식당처럼 단조롭기 때문이다. 음식은 민간 업체인 P사와 계약을 맺어 위탁운영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신원장은 취임 후 대부분의 약속을 이곳에서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중순경 자신의 고교(전주고) 은사와도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이곳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곳을 다녀간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24시간 국정원 내부에서 먹고 자고 일하기 때문에 외부로 나갈 수가 없다”는 신원장의 말을 들려줬다. 이 관계자는 “국가정보관에는 안보전시관 등이 설치돼 있어 외부인사들을 상대로 안보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교육 효과도 거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원장의 ‘음지론’은 그가 국정원 차장 시절부터 지녀온 소신이기도 하다. 신원장은 98년 7월경 후배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에 주인이 둘 있어서는 안 된다. 국정원의 주인은 대통령과 국민이어야 한다. 원장은 다만 심부름꾼일 뿐이다. 심부름꾼은 불필요하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자랑해서는 안 된다.”

    신원장의 취임 후 첫 ‘작품’은 국정원 후속인사에서 나타났다. 4월9일 단행된 국정원 간부 인사에서는 해외파트를 총괄하는 1차장과 인사 예산을 담당하는 기조실장에 모두 내부 인사가 발탁됐다. 차관급인 1∼3차장과 기조실장 등 핵심 고위직 네 자리가 모두 내부 인사로 채워진 것은 국정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인사는 신원장 취임 직후 “국정원의 인사 예산에 대한 여권 핵심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조실장 등 요직에 정치권 인사를 진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 야당정보위원의 분석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이 인사에는 ‘실무 중심’과 ‘정치색채 탈색’을 내세운 신원장의 뜻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장이 국정원 내에서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원장은 99년 6월 국정원 2차장에서 물러난 지 1년 9개월 만에 다시 국정원장으로 복귀하면서 ‘자기 사람’을 단 한 명도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운전사나 수행비서조차 기존 국정원 인력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신원장을 잘 아는 법조계 인사들은 신원장의 강철 같은 단호함을 잘 나타내주는 면모라고 전한다.

    신원장은 특히 인사와 관련해서는 추상 같은 판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새 정권 출범 초기 그는 법무부장관 후보에 단골로 꼽혔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미리 보험을 들어두려는 검찰 관계자가 많았다. 이에 대해 신원장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그와 가까운 검찰 관계자가 전했다.

    “검사들이 수시로 나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한다. 대개 무슨 뜻인지 짐작한다. 물론 나는 정중히 사양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 ‘기억’으로 검찰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3월 개각에서 법무부장관 대신 국정원장으로 가는 바람에 그의 검찰개혁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대신 국정원 개혁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관심거리다. 일부에서는 신원장 취임 후 첫 인사가 국정원의 ‘소리 없는’ 개혁의 신호탄일지도 모른다고 본다.

    ‘바늘’은 예리하기도 하지만 곧기도 하다. 그는 국정원 2차장 시절인 99년 초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다. 이제 대통령에게 바른 말을 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자. 지금까지는 새 정부가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고 감싸주는 데 필요한 정보를 보고했다. 이제부터 민심을 그대로 전하도록 하자. 비판적인 이야기도 거르지 말고 보고하도록 하자. 정부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국정원이 그 정도도 안 하면 직무유기다.”

    비슷한 시기 국정원 일부에서 정치안정을 위해서는 여당인 민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전국적인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대해 당시 신차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정권이 바뀐 뒤에 안기부 국·실장들이 왜 구속되는지 아느냐. 97년 대통령 선거 전에 오익제 편지를 공개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발언한 것이 그들의 혐의내용이다. 국정원법을 봐라.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치에 개입하면 곧바로 법을 어긴 것이 된다.”

    신원장 취임 이후 정가에서는 ‘3신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나라당 권철현(權哲賢) 대변인은 5월6일 기자간담회에서 “현 정권이 신승남(愼承男) 차장을 검찰총장에 기용해 신건 국정원장, 신광옥(辛光玉) 민정수석 등과 함께 ‘신신신 체제’를 만들려 한다”며 ‘3신 체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신승남 차장은 5월 말 박순용(朴舜用) 전검찰총장 후임으로 새 총장에 임명됐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검사 출신이다. ‘친정’이 다 같다. 호남 출신인 점도 공통점. 그래서 ‘3신 시대’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성(姓)이 한글로 ‘신’자 발음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따라서 ‘3신’이라는 조어(造語) 자체가 난센스라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검찰의 한 고위간부는 “세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한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검찰 간부 출신의 중견 변호사는 “세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효용성은 세 사람이 전혀 비교대상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3신’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들은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 같은 신씨이면서도 ‘뿌리’가 다 다르다. 신(辛)원장은 본관이 영월(寧越)이고 신(愼)총장은 거창(居昌), 신(辛)수석은 영산(靈山)이다.

    집안도 각기 특성이 있다. 신원장은 ‘촛불’ 등 목가적인 서정시로 유명한 고 (故) 신석정(辛夕汀) 시인이 가까운 친척. 신시인은 대대로 가톨릭 집안인 신원장의 대부이기도 하며, 신원장의 부친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시인이다.

    신총장은 교보그룹 창업주인 신용호(愼鏞虎)전회장 가문과 가까운 집안 사이이며 조상호(曺相鎬) 전체육부장관이 장인이다. 신수석은 대전지법 마용주(馬鏞周)판사를 사위로 맞아 법조 가문을 이뤄가고 있다.

    ‘3신 시대론’의 허실

    고향도 같은 호남이기는 하지만 겹치는 곳이 없다. 신원장 집안은 대대로 전주의 유지였고 신총장은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랐다. 신수석은 전형적인 광주 토박이.

    나이는 신원장이 41년생으로 가장 많고 신수석이 43년생, 신총장이 44년생이다. 대학은 신원장이 서울대 법대 59학번으로 같은 대학 62학번인 신총장의 3년 선배다. 신수석은 고려대 법대 61학번.

    법조계 입문은 신원장이 63년 대학 4학년 때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서 호남 검찰인맥의 길을 텄고 신총장은 68년 제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고등고시가 63년 제16회로 끝나고 그해 사법시험 1회가 치러졌기 때문에 시험 기수로는 신총장이 9기 후배다. 신수석은 그 신총장보다 2년 늦은 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찰에서의 뿌리는 더욱 다르다. 이들은 30년 가까이 검사생활을 했거나 하고 있지만 같이 일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신원장과 다른 두 사람 사이의 기수와 보직에 격차가 너무 크다. 업무 스타일이나 성격도 판이하다. 이 때문에 신총장과 신수석은 신원장을 버거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장은 검찰 재직시 대검 중수부 등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특수부 검사였다. 그는 82년 5월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 수사 당시 대검 중수부 4과장으로 큰손 장영자(張玲子)씨의 형부이면서 영부인 이순자(李順子)여사의 인척인 이규광(李圭光)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직접 조사해 하루 만에 자백을 받아내고 구속했다.

    신원장은 호남 출신이면서도 과거 영남정권에서 요직 중의 요직인 대검 중수부 1,3과장과 대검 중수부장, 법무부 교정국장과 차관을 지냈다. 검찰 출신의 한 원로 변호사는 “과거 영남정권하에서 호남 출신 검사들이 알게 모르게 인사차별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일부 호남검사들은 정권을 추종하면서 출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신원장은 그야말로 실력으로 중요 보직을 맡았다”고 말했다.

    93년 김영삼(金泳三)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원장은 광주고검장에서 법무부 차관으로 입성했다. 법무부 차관은 고검장 서열 1순위로 차기 검찰총장을 노릴 수 있는 요직.

    그러나 영광은 곧 좌절로 바뀌었다. 문민정부 내에서 아무도 돌봐주는 세력이 없던 그는 문민정부 초기 사정(司正)수사 때 ‘누명’을 쓰고 낙마했다.

    93년 초 시작된 슬롯머신 수사는 당시 박철언(朴哲彦) 의원과 이건개(李健介) 대전고검장 구속으로 이어지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파장이 신건 차관에게도 미쳤다. 당시 신차관이 사건의 주역인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鄭德珍)씨와 절친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신차관이 정씨의 비호 또는 유착세력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신차관은 결국 당시 고시 동기인 전재기(全在琪) 법무연수원장과 함께 후배검사들에게 불려가 정씨 형제를 알게 된 경위 등을 조사받았다.

    신차관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신차관은 70년대 중반 서울 영등포지청(지금의 남부지청) 근무 당시 토지사기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 고교 후배 신모씨를 통해 정씨를 알게 됐고 그 뒤 연락이 없다가 80년대 초 그 후배 신씨가 서울 강남에 장어구이집을 차리면서 신차관과 정씨 부부를 초청해 다시 만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경위야 어쨌든 언론에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공직자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신차관은 후배 검사들에게 조사를 받으러 가기 직전 사표를 냈다.

    그는 후에 “‘검사’로서 후배 검사에게 조사받는 수치만은 피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당시 검찰 고위 간부들의 태도. 당시 사건 수사를 보고받는 위치에 있던 검찰 고위간부는 신건차관과 전재기 연수원장 등의 이름이 나도는 것에 대해 기자들이 확인을 요구하자 “아 참, 이 사람들아, 뭐가 그리 급한가. 다 사실대로 밝혀질 텐데”라고 말했다.

    이 말은 아주 묘한 표현이었다. ‘천천히, 사실대로 다 밝혀진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지만 이 말을 듣는 기자들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소문을 사실로 확인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이 말에 ‘힘’을 얻은 기자들은 신차관 등이 연루됐다는 소문을 사실로 간주하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슬롯머신사건 수사가 마무리되고 재판이 지루하게 진행되던 무렵 한 일간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꽤 비중 있게 실렸다.

    “유력 정치인 검찰 안기부 간부 등 고위공직자가 대거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켰던 슬롯머신 비리사건의 1심 재판이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일부 관련자들에 대한 1심 재판은 이미 끝나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으나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53) 덕일씨(45) 형제와 이들의 비호세력으로 지목된 박철언 의원(51) 이건개 전대전고검장(52) 등 주요 관련자들의 1심 공판은 갈수록 유무죄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박철언 의원의 경우 지금까지 다섯차례의 공판이 열려 정씨 형제 등 모두 7명의 증인이 출석했다.…(중략)

    한편 이 사건 수사과정에 정덕진씨와의 관계로 곤욕을 치른 신건 전법무차관은 당시 검찰 조사결과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신 전차관는 정씨에게서 17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제공받았다는 소문에 대해 검찰이 조사했다는 일부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억울한 피해를 보았다. 당시 검찰 수사결과 이 부분은 전혀 근거 없는 헛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쨌든 신차관에게는 슬롯머신사건이 검사로서의 생명을 끊은 치명타가 됐다.

    신원장의 시련은 그가 바라고 기여한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어졌다.

    신원장은 슬롯머신 사건에서 ‘누명’을 쓰고 퇴직한 직후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로 떠났다가 94년 귀국해 그해 12월 후배 변호사들과 함께 법무법인을 설립했다. 그 후 3년 가까이 야인생활을 하다 97년 10월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 총재의 법률특보를 맡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당시 정확한 정보수집과 상황판단으로 안기부 등의 북풍 공작을 차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장은 김대중 총재가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위원으로 일했고 이듬해 3월 국민의 정부가 정식 출범하면서 안기부 1차장(현 국정원 2차장)에 임명됐다.

    시련 끝에 국정원장에

    정권 교체 뒤 첫 조각에서 그는 법무부 장관에 사실상 내정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차관 시절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명예퇴진한 그는 법무부에 복귀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막판에 박상천(朴相千) 당시 국민회의 원내총무에게 자리를 내줬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슬롯머신사건의 ‘악령’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새 정부 출범 직전인 98년 2월19일 공직에 임명된 부패사건 관련자 104여 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신원장의 이름을 끼워 넣은 것이 화근이 됐다.

    당시 참여연대는 ‘새 정부 공직에 취임해서는 안 될 인물 104명’을 선정,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이 명단에는 신원장도 올라 있었다. 슬롯머신사건에 연루됐다고 의혹을 제기하며 ‘검증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 자료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전달됐다.

    신원장은 명단 발표 당일 심야에 참여연대 사무처장인 박원순 변호사를 박변호사의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당시 신원장은 박변호사에게 다음과 같이 따졌다.

    “당신들이 권력에 핍박받아온 나를 다시 핍박할 수 있소. 내가 어느 자리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주시오. 나는 검사 생활을 하면서 국가를 위해 한 달 동안 꼼짝도 안 해본 사람입니다. 이제 내 명예와 내 인생을 위해 이 자리에서 한 달간 꼼짝도 안 할 수 있습니다.”

    참여연대는 다음날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잘못을 인정하고 이례적으로 ‘정정보도’까지 해줬다.

    신원장은 법무부장관으로 가지 못하고 안기부(국정원) 차장에 임명됐다. 99년 6월 국정원 차장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변호사 사무실로 돌아갔다.

    야인으로 돌아간 그에게는 또 다른 누명이 씌워졌다. 99년 5월 불거진 김태정(金泰政)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延貞姬)씨 등의 ‘옷로비’ 의혹 사건이 한겨레신문을 통해 처음 보도됐는데 신원장이 관련 첩보를 흘렸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 소문은 그해 말 옷로비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의 수사와 사직동팀 최종 보고서 유출 등이 완전히 해명될 때까지 1년 넘게 신원장 주변을 맴돌았다.

    또 지난해 말 ‘진승현 게이트’ 사건조사 과정에서는 한나라당의 ‘권력형 비리진상조사특위’가 신원장이 배후일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했다. 신원장은 강력히 항의했고 한나라당은 한 달 후인 그해 12월 이례적으로 “조사 결과 신 전차장은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이를 정정한다”고 공식 사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원장은 지난 3월 제25대 국정원장에 임명됐다.

    신원장 체제의 국정원에 대해선 기대가 많은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내년 대선 등을 앞두고 국정원에 쏠리는 의혹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또 대북정책 이념논쟁도 골칫거리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정원이 정권의 국정원이냐, 아니면 국가와 국민의 국정원이냐 하는 문제다. 신원장을 잘 아는 법조계 인사들은 신원장이 남다른 지휘력과 조직 장악력, 통솔력으로 ‘국민의 정부’ 후반기에 중요한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신원장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그가 ‘정권’에 대한 충성자가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어려운 시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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