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누가 후보돼도 이회창 이길 수 있다”

  • 안기석 <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 daum@donga.com

    입력2004-11-15 14: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인적 쇄신할 사람 더 이상 없다
    • 당직 인선 중립적으로 했다
    • 대통령은 권한을 위임했다
    • 최고위원회의와는 별도의 기구 구상했다
    • 민주당, 수직에서 수평 정당으로 이동중
    • 구당(救黨)에만 전념
    최근 인적 쇄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주당 사태를 결산하면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단순하게 대차대조표를 그려보면 당 총재에서 평당원으로 스스로 강등한 김대중 대통령이 최대 피해자, ‘당 총재가 없는 당 대표’를 계속해서 맡게 된 한광옥(韓光玉)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힘겨루기’를 하느라 당 대표를 ‘불편하게’ 했던 쟁쟁한 최고위원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한대표가 화장실에서 웃는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한대표는 민주당 내 각 계파들의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만큼 마냥 행복감에 젖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은 김대중 대통령이 신임하는 ‘관리형 대표’로서 청와대의 ‘지침’을 충실히 당에 전달하면 됐지만, 이제는 운신의 폭이 넓어진 만큼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고민도 많을 것이다.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이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겼던 한대표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민주당 내 각 계파의 이해를 조절하는 해결사로서 성공할 것인가.

    11월16일 오전 서울 여의도에 있는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실에서 한대표를 만났다. 막 당 4역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한대표는 표정이 밝아보였다. 바로 전날인 15일, 한대표는 청주 한씨 종친회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 초헌관(初獻官)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자리에는 대권 도전을 선언한 한화갑 민주당 상임고문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부인인 한희옥 여사도 참석했다. 자연스럽게 종친회 행사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청주 한씨 종친회 행사에서 초헌관을 맡았는데 한화갑 상임고문보다 항렬이 높습니까.

    “항렬은 내가 낮은데, 여당 대표라고 해서 종친회에서 배려한 겁니다.”



    -이번에 처음 갔습니까.

    “예전에 한번 갔어요.”

    -청주 한씨가 전국적으로 몇 명이나 됩니까.

    “한 80만명 된다고 해요. 단일 본이거든요. 한씨 기씨 선우씨가 한 본이라 서로 결혼을 안해요. 옛날 족보로 보면 이병도 선생이 얘기한 한씨조선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역사관이 바뀌어서 그렇지, 예전에는 기자조선, 한씨조선을 배웠어요. 기자조선이나 한씨조선은 마찬가지인데, 거기서 한씨 기씨 선우씨가 나온 거지요.”

    ‘역사 이야기’는 이 정도로 듣고 ‘현실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최근 당 안팎으로 복잡한 사정이 많은데 당 대표를 계속 맡게 되어 어깨가 무겁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여당의 대선 후보가 정해지기도 전에 총재직을 사퇴해서 당 안팎으로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 대표로서 이번 사태에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까.

    “사실 대통령께서 당 총재직을 사퇴하신 건 충격적인 사건이죠. 처음 있는 일이죠. 역대 대통령중 이처럼 긴 잔여임기를 남기고 떠난 예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를 비롯해 당 지도부는 책임을 느끼고 사표를 냈습니다. 저는 당 대표로서 재보궐선거가 끝나자 마자 바로 사표를 냈어요. 사실 제가 대표에 취임한 지는 40여일도 안되죠. 하지만 선거는 선거니까…. 그런데 대통령께서 당 총재직을 내놓으시면서 ‘당 대표최고위원이 당 총재 권한대행을 맡아달라’고 말씀하시니까, 대통령 뜻을 받들고 있는데, 어려움이 많죠. 그러나 모두가 자숙하면서 집권여당으로서 심기일전하는 모습이 다행스러워요.”

    -어쨌든 외형상으로는 10·25 재보궐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공방전에서 대통령이 책임지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고, 최고위원 사퇴 등 당 지도부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외에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까.

    “물러날 사람은 물러났고, 그 외에 특별히 책임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답은 시원하지만 모범답안형

    한대표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졌다. 서글서글하고 얼굴의 모든 선들이 뚜렷해 시원해보인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거침없이 나오는데 언제나 ‘모범답안형’이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DJ가 ‘메신저’나 ‘관리자’ 역할을 한대표에게 즐겨 맡기는 이유를 알 만했다.

    -‘대통령 입안의 혀’라는 박지원 전 정책기획수석도 사표를 냈는데, 아무래도 제일 큰 관심은 쇄신파들이 인적 쇄신의 핵심으로 지목한 권노갑 전최고위원의 거취문제가 아닐까요. 권 전최고위원은 앞으로 대선 후보 경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당 대표로서 신경쓰이지 않습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요. 본인이 시간을 갖고 처리할 문제이고…. 사실상 그분이 당직이나 직책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일부에서 정계를 은퇴하라는 얘기도 나오는데, 확실한 팩트가 없고요. 설(說) 같은 것을 갖고 무리하게 압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좀 더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봐요. 그분은 그분대로 입장이 있는 거잖아요. 그분의 공과도 있으니까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아야죠.”

    -정치는 팩트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여론의 흐름에 민감히 반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설사 권 전최고위원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대통령과 당에 부담이 된다면 스스로 판단하는 슬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 얘기는 그 정도로 해둡시다.”

    한광옥 대표는 권노갑 전최고위원을 정점으로 한 동교동 구파와 가까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던 때나 당 대표를 맡은 뒤에도 민주당 내에서 인적 쇄신을 주장하는 개혁파들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으로부터 총재권한 대행을 위임받은 후의 행보를 보면 나름대로 독자적인 탄력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 한대표의 첫 작품은 당내 어느 파로부터도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다. ‘첫 작품’이란 전당대회 시기와 성격 등을 규정하는 ‘당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인데, 조세형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의 인선에서 일단 ‘합격점’을 받은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푼다

    -그동안 쇄신파와 동교동 구파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십니까. 당직 인사와 관련해서 계속 이 문제가 불거져 나오지 않을까요.

    “큰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 당만의 저력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 당은 위기에 강합니다. 어제 오늘 이루어진 당이 아니거든요. 이름은 바뀌었지만, 30여년 동안 민주화세력이라든가 양심세력, 산업화세력이나 근대화세력이 그때 그때마다 수혈, 영입되면서 보완돼온 정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의견을 수용하면서 다시 당을 개혁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잖아요. 일례로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가장 중립적인 인사로 구성했어요. 그런 것을 보고 많은 당원들이 ‘한대표가 정말 공정하게 하려는구나’ 하는 의지를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 쇄신, 쇄신하는데 그런 것도 여기에서 다 걸러질 겁니다. 쇄신은 당 발전의 밑거름이 돼야지, 당에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돼서는 안됩니다.”

    -한국정치사에서 그동안 여당은 분파를 이루기보다 대통령이나 총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고, 오히려 야당은 분파가 많은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여당에 분파가 많은데, 아직까지 화학적 융합이 안돼서 그런 건가요.

    “당에 와서 보니까 분파라기보다도 모임이 많더라고요. 나는 그걸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나는 정당이 수직적인 형태에서 수평적인 형태로 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야당은 지금 일사분란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여당은 여러 목소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힘들어요. 만일 여당이 코디네이트하는 과정을 겪는다면, 여러가지 목소리가 나오는 게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게 당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거든요. 다만 그런 움직임이 당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죠.”

    -한대표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급한 것이 전당대회 개최시기와 성격 문제입니다. 각 진영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비법이 있습니까.

    “지금 전당대회를 언제 하느냐, 1월이냐 3~4월이냐, 지방선거 전에 하느냐 끝나고 하느냐, 당권과 대권 후보를 한꺼번에 뽑느냐 나누어서 뽑느냐 등 여러 주장이 있잖아요. 당 대표로서 개인 의견은 있지만, 현 시점에서 생각을 밝히는 건 별로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 바로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특별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뭐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거죠. 저는 특위에서 수렴된 의견을 수용해야 합니다. 저는 첫번째 회의에서 ‘당 대표로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겠다. 여러분의 의견이 당무회의를 통해서 당론이 되면 집행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참 어려운 문제를 쉽게 푸는군요.

    “그렇죠.”

    “한광옥이 그래도 공정하구나”

    -당 대표로서 고민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하하. 그 얘기가 맞네요. 대통령께서 당 총재를 사퇴한 뒤 당무회의에서 특별대책위원회가 구성될 수 있느냐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잘 논의해서 저한테 위임했잖아요. 저는 이제까지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겨왔어요. DJP 단일화를 해서 정권교체를 했고, IMF 위기 때 노사정위원장으로 타협안을 만들었고, 그 다음에 통일단체 136개를 민화협으로 묶었어요. 사람들은 그런 걸 어떻게 쉽게 풀었냐고 하는데, 나는 나름대로 그렇게 해왔어요. 이번에 특별대책위원회 인선하는 데도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이제까지 인선하면서 이렇게 고민한 건 처음이에요. 그랬더니 ‘한광옥이가 그래도 공정하게 했구나’는 얘기가 나왔잖아요. 그것 때문에 칭찬 많이 받았어요.”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 같은 한대표는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고무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은 어려운 문제를 쉽게 잘 푼다는 ‘칭찬’이라기 보다 당 대표로서 고민해야 할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힐난’인데도 한대표는 결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고민해야 할 일을 아랫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하도록 하는 것도 유능한 CEO의 덕목이 될 수 있다. 한 조직이나 나라의 수많은 고민을 혼자서 다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조세형 위원장에게 고민을 다 떠넘긴 셈입니다.

    “떠넘긴 건 아니고요. 그분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처음부터 조세형 위원장을 생각했습니까.

    “여러 차례 논의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조세형 상임고문을 위원장으로 인선한 거죠. 저는 거기서 나온 의견은 당무회의에서 존중될 것으로 봅니다. 굉장히 중립적인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잘 될 것으로 봐요.”

    -최근 당직 인선과 관련해서는 약간의 불만 섞인 소리들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당직을 배치할 때는 모임이나 계파를 의식할 수밖에 없죠?

    “나는 기본적으로 계파마다 자리를 나눠주는 건 당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일 이번에 특별대책위원회를 쉽게 만들려고 했으면, 최고위원들에게 한 명씩 추천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됐겠어요? 최고위원회의의 재판이 되는 거잖아요. 그건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표가 책임을 지고 양심에 비춰봐서 공정하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게 낫죠. 이건 정책 결정자가 아니라 실무 책임자를 뽑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정성 전문성 현실성을 중심으로 한 겁니다.”

    -한대표와 가까운 사람들과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썼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지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중립을 지켜야 하는 당대표로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민주당 사태를 지켜본 당내 인사들 중에는 쇄신파가 장악한 최고위원회의를 무력화하기 위해 한대표가 모종의 역할을 한 것 아니냐며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한대표가 ‘음모의 주체’라는 증거도 없고 한대표의 성격이나 위치가 그런 일을 꾸밀리도 만무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한대표가 최고위원 전원사퇴라는 ‘미스터리’의 한 가운데 있는 만큼 이 문제를 거론했다.

    -당 일각에서는 최고위원들이 총사퇴한 것을 두고 ‘한대표가 그동안 최고위원들로 인해 당을 운영하는 데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잘 얘기해서 총사퇴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는 식의 얘기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최고위원들이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사람들인데 한광옥의 말에 끌려다니겠어요? 당무회의에서 최고위원을 성토하는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 와중에 어떤 최고위원이 사퇴하겠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두 사표 쓰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당무회의가 끝났습니다. 그 상태에서 당 대표로서 의견조율도 없이 어떻게 청와대에 들어갑니까? 그래서 제가 조찬간담회를 열었던 겁니다. 그때 나는 최고위원들에게 사퇴보다는 유보 쪽으로 많이 얘기했어요. 내가 사퇴할 테니 최고위원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거지요. 그랬더니 어떤 분이 ‘왜 대표 혼자서 그만두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전원이 그만두는 쪽으로 간 거예요. 그 뒤에도 나는 ‘사의를 표하는’ 정도로 표현을 완화시켰다고요. 솔직히 말해서 당직자들은 안됐잖아요. 30여일 일하고 선거를 치렀으니까. 나는 만일 책임을 진다면 나하고 당4역 정도만 생각했어요.”

    -한대표는 최고위원 전원 사퇴와 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얘기입니까.

    “못했지…. 생각을 안했다고요”

    -당 대표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서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사표를 내려고 했다니까. 다른 최고위원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거지….”

    -당시 출입기자들은 ‘한대표가 그동안 최고위원들 때문에 마음 고생이 컸는데, 속이 시원한 표정이다’고도 하던데요.

    “그건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고통받으니까 심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모양인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결과적으로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니까 좀 편하지 않으세요?

    “하하하. 특별대책위원회 구성문제도 최고위원회의에서 두 사람이 반대해 당무회의까지 가져왔어요. 나는 여러 의견을 물어서 문제를 풀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이겨나가는 것이 민주정당의 모습이라고 봐요.”

    -최고위원들이 사퇴하고 ‘쇄신위원회’를 만들려는 정도의 복안은 있지 않았나요?

    “최고위원회의는 그대로 두고, 거기서는 얘기가 잘 안되니까 별도의 기구를 만들자는 구상이었죠.”

    -청와대에는 이미 복안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대통령께서 브루나이에서 당내 문제를 보고받으면서 그곳 회의에 신경을 못 썼대요. 이러다가는 외교문제도 잘 안되겠고 하니까 결단을 내리신 거죠.”

    -대통령이 깊이 숙고한 게 아니고 최근 상황 때문에 결단을 내렸다면, 성급했던 것 아닙니까. 당 총재로서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있었는데요.

    “무책임이 아니라, 확실하게 책임을 지겠다는 거지. 국제문제, 민생문제, 경제문제, 남북문제를 잘 풀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겠다는 의지라고 봐요. 단 당 문제는 자생적으로 풀어가도록 맡기겠다는 거죠.”

    “당대표가 알아서 하시오”

    -국민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경제와 민생에 전념하겠다니까 좋을 수도 있지만, 당에 있는 사람들은 당 총재로부터 버림 받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지금 민주당에는 ‘우리 스스로 설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잖아요. 대통령께서 탈당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당을 버린 것도 아니고요. 대통령은 당의 자생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사퇴를 번복해달라고 건의한 것은 예의상 그런 겁니까.

    “대통령이 총재에서 물러난 것은 비통한 일이잖아요. 총재가 당을 떠났는데 우리가 뭐 그리 좋겠어요? 슬픔을 딛고 재기하자는 얘기지.”

    한대표는 앞으로 특별대책위원회가 당발전과 쇄신안을 가져오면 당무회의에 상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비록 ‘평당원’이라도 김대중 대통령의 위상과 의중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당대회 개최시기 문제와 관련해서 한대표는 대통령의 레임덕을 최소화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대통령에게는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정권 재창출에 더 역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개인의 생각은 있어요. 그런데 지금 특별대책위원회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처럼 민감한 문제를 대표가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비서실장을 지낸 한대표는 만일 특위에서 만들어놓은 의견이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누가 된다든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을 중간에서 코디네이트 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특위에서 안이 나오고 당무회의에 상정돼 결정되면, 그걸 집행하면 되는 겁니다.”

    -대통령의 뜻이 어디 있느냐에 연연해하지는 않습니까.

    “특위 문제로 정책기획수석을 통해 대통령께 보고를 하려 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전화를 드렸는데, 대통령께서 ‘당내 문제는 대표가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면 따르는 게 당연하죠.”

    -당 대표로서 권한이 주어진만큼 책임도 무겁겠습니다.

    “아주 무겁더라고요. 보통 머리가 아픈 게 아닙니다. 대통령께서 믿으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을 텐데, 그렇다고 일일이 상의드릴 수도 없고….”

    여야 당정협의체 제안

    -여야 당정협의체를 제안했는데 여당의 대표로서 앞으로 정국을 어떻게 끌고 가겠다는 구상이 있습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야당도 과거처럼 반대, 대립적 자세에서 국정에 협력하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통령께서 국정에 전념하기 위해 당 총재직을 떠난 만큼, 야당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경제, 외교, 민생문제 대해서는 우선 협조해주고, 여야관계는 새로운 패턴에 의해 서로 견제하고 협력해야죠.”

    -경제·민생분야에서는 여야가 협조한다 하더라도, 내년부터 본격적인 대선국면에 들어서는데, 여야간에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겠죠?

    “협력할 분야가 따로 있고, 정치적 라이벌로서 경쟁할 분야가 따로 있죠. 지금 가장 협조해야 할 분야는 경제문제와 남북문제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야당이 정권을 바꾸려는 입장이고, 우리는 재창출을 원하니까 경쟁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대표가 대통령으로부터 총재권한 대행을 위임받은 것은 행복한 일일 수 있지만, 민주당의 지지도가 가장 떨어진 시기에 ‘볼품없는 여당’을 위임받은 것은 불행한 일이다. 지지도가 바닥에 떨어진 민주당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어떤 방안을 가지고 있을까.

    -지난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는 민심이반 때문이라고 보는데, 민주당이 민심을 잃은 이유가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밑바닥 서민들을 만나보니까 경제문제가 심각하더라고요. 물론 정부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문제점이 있었고요. 정치권의 불신은 여야가 똑같은 거 같아요.”

    “일반 서민은 인사문제 관심없어”

    -인사문제가 민심이반을 가속화했다고 보지는 않으세요?

    “신문에서는 인사문제가 많이 나오는데, 일반 서민들은 인사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중산층 이상이나 관심이 있어요. 나는 이 정권이 인사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여론에서 꼬집어서 나오는 것을 보니까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선거를 보니까 여러가지 ‘비리게이트’가 민주당에 악재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사실처럼 알려지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고 봅니다. 여러 의혹들이 정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죠.”

    -군사정권 때는 정보를 통제했기 때문에 유언비어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언로도 개방되고, 또 검증하려면 할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각종 비리의혹이 난무한다고 보십니까. 정부가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오늘 당 4역회의에서도 얘기했는데, 기본적으로 민주당은 개혁정당입니다. 그래서 비리나 의혹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는 게 우리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입장에 맞게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죠. 이제는 언로가 많이 터져서 군사정권 시대에 비하면 요순시대죠. 그런데 언로의 개방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르는 유언비어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증권가의 루머 같은 게 아주 성행하더라고요. 거기서는 아주 말을 만들던데요. 그건 정말 이해가 잘 안돼요. 언로가 개방됐으면 정론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옷로비 사건 때부터 시작해서 자꾸 의혹이 증폭되는 것은 대통령이 뭔가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뜸을 들인 데서 기인한 것 아닙니까.

    “대통령은 아주 자상한 분이에요. 어떻게 보면 인본주의 철학이 강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하나도 귀하게 생각하죠. 사람을 한번 쓰면 상당히 오랫동안 관찰해요. 밖에서 뭐라 해도 확증이 없으면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아요. 대통령이 물증도 없이 사람을 마구 자르고 그럴 수는 없잖아요. 이걸 두고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요.”

    -김은성 국정원 차장 건은 예전과 달리 신속히 처리한 것인가요?

    “오늘 처리했나요…?”

    -국민의 정부 들어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정부 및 정치인과 언론사간에 각종 명예훼손과 관련된 소송이 많아진 것입니다. 정부기관에서도 단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겠다는 분위기입니다. 한 개인이면 몰라도 정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민심에는 좋지 않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일이 없어야죠. 정치인들이 언론에 피해를 당하니까 법에 호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언론기관과 정치인 사이에는 서로 신뢰관계가 있어야 돼요. 서로 신중해야죠. 정치인 중에 언론과 싸우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한대표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계셨으니 여권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현 정권은 언론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 청와대가 그런 지침을 내려보낸 것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 언론하고 전쟁을 해요? 대통령께서는 언론의 자유는 확보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 택시를 타고 오는데, 택시기사가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위치를 잘 몰라요. 민주당사 벽에 ‘경제를 살리는 민주당, 미래를 만드는 민주당’이라는 현수막을 보고서야 위치를 파악했는데 그 택시기사는 승객더러 들으라는 듯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혼자말을 하더라고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민주당이 집권한지 4년이 됐는데도 집권여당으로서의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게 바로 경제가 안 좋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당이 선거에 실패하고 내적인 갈등도 있어서 국민에게 실망을 준 게 사실이거든요. 우리가 겸허히 반성하고 다시 추스리면, 민심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회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당 시스템으로 보면 최고위원제는 의욕적으로 도입했지만, 실패한 것 아닙니까. 아니면 시행과정으로 봐야 합니까.

    “최고위원제는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는 건데, 지금은 어정쩡한 체제가 됐어요. 심의기구가 아니라 자문기구잖아요. 그래서 집단지도체제의 구실을 못한 측면이 있어요. 또 운영에도 미숙한 점이 있었고요. 하지만 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지는 않아요.”

    -취지는 좋았는데, 최고위원들이 당 운영보다는 대권 도전에 더 관심이 많아 어긋난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부분도 있죠. 하지만 그게 전체는 아니고요. 아무래도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전체 입장보다 개인 주장을 얘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보다는 제도 자체의 미묘함이 크지 않았나 생각해요. 최고위원들 다 참 훌륭하잖아요.”

    -이런 지적이 있습니다. 최고위원들이 사표를 내고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어느 최고위원이 ‘나는 최고위원이 아니라 참석하지 않겠다’고 해서 회의 명칭을 바꾸었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의 반발 때문에 청와대나 당이 끌려다니는 모습은 청와대나 집권 여당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거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끌려다닌 게 아니거든요. 최고위원들이 사표를 냈을 때 ‘나는 최고위원이 아니다’는 의견과,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하기 전까지는 최고위원이다’는 주장이 분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그냥 지도부회의라고 붙이는 게 어떠냐. 그건 뭐 대단한 건 아니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온 거죠.”

    -앞으로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조건이 필요하다고 봅니까.

    “국민의 정부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최초의 정권입니다. IMF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인권 시대를 열었습니다. 남북화해를 이루고 한국을 정보통신시대의 선두주자로 도약시켰습니다. 이런 것들이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경제가 살아나고 민생이 안정되면 그러한 업적이 잘 알려질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대통령, 성공한 정부, 성공한 집권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가 상수로 굳어지고 있는데, 여당은 아직 변수가 많습니다. 여당에 후보가 많은 것이 도움이 된다고 봅니까, 아니면 지리멸렬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봅니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을 표하는 게 나쁘다고 보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여러 의견을 절차에 따라 수렴해서 후보를 내는 거죠. 많은 사람이 하겠다는 것은 힘이 될 수도 있어요.”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가 되면 누구라도 이회창 총재를 이길 수 있다고 봅니까.

    “물론이죠. 저는 자신있다고 봐요.”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자신 있습니까.

    “우리 당이 아까 얘기했던 조건을 충족시키면, 국민은 민주당에게 정권을 줘야만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남북화해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정권재창출이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일부 후보는 ‘본선 경쟁력’을 강조하고 있는데, 한대표는 누구라도 공정한 경선절차를 밟으면 본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우리 대의원들이 현명합니다. 본선에서 이길 사람을 뽑지, 본선에서 질 사람을 뽑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할일은 救黨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본선 경쟁력은 어떻게 봅니까.

    “남의 당 얘기를 할 수는 없고, 우리 스스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을 거라고 봅니다.”

    -한대표도 정치인으로서 비전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밖에서는 ‘관리형’ 정치인이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앞으로 전당대회가 열리면 총재 경선에 출마할 겁니까.

    “나는 정치적 지위 못지않게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은 구당(救黨)입니다. 당이 집권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는 모태를 갖추는 데 온 정열을 쏟고, 그 이후의 개인문제는 그때 가서 결정할 겁니다.”

    -당권에 도전할 생각이 있는데 지금 발표를 하지 않는 겁니까.

    “지금은 할 일이 많고 바빠요.”

    -당권에 도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전혀 없다는 게 아니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과묵한 한대표는 계속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빙그레 웃는 그의 표정 속에서 ‘구당작업 완수 후 당권 도전’이라는 시간표를 읽을 수 있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