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8일 인당 박동진(忍堂 朴東鎭) 명창이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박동진 명창은 ‘토막 소리’가 유행하던 우리 판소리계에 완창 판소리 바람을 일으키면서 사라져가는 소리의 맥을 다시 세웠고 국악 대중화에도 기여한 국악계의 거목이다.
영결식에서 이영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은 “선생만의 걸쭉한 재담의 아니리를 더 이상 선생의 육성으로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국악인들뿐 아니라 우리 소리의 멋을 아는 모든 이들의 애끓는 안타까움”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윤미용 국립국악원장은 “선생의 숭고하고 고귀한 소리정신은 허공에 메아리쳐 흩뿌려지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세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준다. 선생은 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 광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조사로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나 공적보다 그 자리에 참석한 국악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것은 생전 박동진 명창이 남긴 육성이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후학들이 듣고 배우라는 듯 덤덤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하고 싶어요. … 나는 종로 네거리에 벌거벗고 나가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요. 왜? 나는 우리 것을 해왔으니까. 조상들의 것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내 운명입니다.”
아마도 영결식에 참석한 원로 국악인들은 이 대목에서 그가 ‘흥보가 완창’에 도전하던 1968년의 국립국악원 강당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 공연은 우리 국악계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고, 박동진이라는 이름을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킨 무대였다.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박동진이라는 소리꾼이 다섯 시간에 걸쳐 흥보가를 완창한다고 나설 때만 해도 이를 곧이 믿는 사람은 없었다. 국악계에서도 “말이 안 된다”고 만류할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완창’이라는 개념조차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했다.
판소리는 1960년대 들어 쇠락기를 맞고 있었다. 1962년 국립창극단이 창설되고 1964년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긴 것은 몰락한 판소리를 정책적으로 부활시켜보려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1950년대 여성 국극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상대적으로 판소리는 대중에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인기 있는 소리꾼들도 박초월, 김소희, 조금영, 박귀희, 김경애 등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설 무대가 없으니 소리꾼들도 판소리를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10분, 20분씩 판소리의 재미있는 대목만 따다 부르는 이른바 ‘토막 소리’가 유행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한 자리에서 다섯 시간이나 쉬지도 않고 소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 그러나 박동진은 이 무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다섯 시간을 쉼 없이 이어나갔을 뿐 아니라, 재치 있고 익살맞은 아니리(소리꾼이 판소리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설을 엮어가는 것)와 흥을 돋구는 너름새(소리꾼이 판소리의 극적 내용에 맞춰 하는 몸짓)로 관객들을 판소리의 재미에 푹 빠뜨렸던 것. 출중한 소리 실력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이날 흥보가 완창 공연은 ‘미국의 소리’ 방송이 생중계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언론에서도 박동진을 대서특필했다.
다섯 시간 동안 흥보가 완창
쉰을 넘길 때까지 뭇 명창들의 그늘에 가려 무명이었던 소리꾼 박동진은 이날 공연으로 일약 국악계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박동진 개인의 성공보다도 더욱 큰 성과는 이날 공연으로 우리 국악계가 큰 자극을 받았다는 데 있다. 판소리의 흐름은 ‘토막 소리’에서 ‘완창’으로 넘어갔고, 박동진이라는 대중적 스타의 출현으로 스러져가던 판소리는 부흥을 맞게 됐다.
박동진 명창은 이듬해 명동 국립극장에서 여덟 시간에 걸쳐 ‘춘향가’를 완창했고, 그 이듬해인 1970년 ‘심청가’와 ‘변강쇠 타령’을 완창했다. 1972년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을 모두 완창한 후에도 박동진의 완창 무대는 매년 몇 차례씩 계속됐다. 특히 1973년 창작 판소리 ‘충무공 이순신전’을 9시간40분에 걸쳐 완창한 것은 국악계에서 여전히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국악계에서는 이를 기점으로 오정숙(吳貞淑) 명창이 ‘심청가’를 완창하는 등 완창 판소리를 시도하는 소리꾼들이 늘어났다. 1973년 박동진은 판소리 ‘적벽가’를 보유한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박동진 명창은 1916년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의 공주시 무릉동이 바로 그의 고향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제법 산다’는 지주였지만, 한일 합병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아버지 때에 와서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감나무골’로도 불렸던 그의 고향은 워낙 시골이었던 터라 그는 “어렸을 때 늑대나 너구리, 오소리가 개 돌아다니듯 하는 무서운 동네에서 살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박동진 명창의 할아버지는 ‘땅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재주를 잘 넘어 나라로부터 ‘참봉’이라는 벼슬도 받았다고 하니 ‘예인(藝人)’의 기질은 핏줄로 타고난 듯하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아버지(박재천)에게 재주를 물려주지 않고, 그저 농사만 짓고 살라고 당부해 박동진 자신은 평범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자랐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내 머릿속에는 판소리 18마당 350시간 분량이 정리돼 있다”고 말하곤 했던 것처럼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기억력이 뛰어나고 총명했다. 진잠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박동진 명창은 시험에서 충청남도 전체 1등을 한 적도 있다. 도지사와 군수가 그의 집을 직접 찾아와 부모에게 “1등 한 아이는 월사금 없이 도청에서 공부시킨다”고 일러주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가난한 처지였지만, 부모의 교육열과 남달리 공부를 잘했던 재주가 맞물려 대전공립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대전중은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학생 400명 중 한국인은 박동진 혼자였다. 일본인들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소년 박동진은 “이 학교에서 배워봤자 뭘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배짱 좋게도 그는 교무실을 찾아가 일본인 교사들 앞에서 “일본은 조선과 합병하면서 서로 평등하게 잘 지내자고 했으면서, 지금은 조선 사람을 개 취급한다. 더러워서 학교 못 다니겠다”며 일본어 교과서를 찢어버리고 뛰쳐나왔다. 대전중 생활은 1929년 이렇게 끝이 났다.
16세 때 판소리 매력에 빠져들어
학교를 그만두고 잠시 방황하던 16세의 박동진은 그의 일생을 결정할 일생일대의 계기를 맞게 된다. 현재의 대전극장 자리에 무대를 차린 협률사(協律社, 구한말부터 유행한 음악 예술 공연 단체로 전국을 순회하며 판소리, 민요, 재주 등 전통 예술을 공연했다)의 공연을 보게 된 것. 입장료 5전이 없었던 그는 협률사의 깃대를 들고 대전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며 ‘홍보 활동’을 해주고 공연을 보게 된다. 그 자리에서 심청가를 들은 그는 단박에 판소리의 매력에 빠져버렸고 이후 소리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집에 와서도 판소리 가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소년 박동진은 ‘귀신에 홀린 듯’ 협률사 단원들이 묵고 있던 숙소를 찾아간다. 그를 맞았던 것은 당대의 명창 장판개(張判介)였다. 장판개 명창은 어린 박동진을 시큰둥하게 대했을 뿐 소리를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장판개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우려면 먹는 것, 자는 것은 물론 차비까지 부담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좌절을 맛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판소리를 향한 박동진의 불타는 마음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늘 “어디에 가서 소리를 배우나”만을 생각하던 그는 명창 이동백(李東伯)의 고수인 지동근이라는 사람이 충남 연기군에 산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찾아갔다. 지동근으로부터 “청양 땅에 사는 손병두(孫炳斗)라는 사람이 재주가 있으니 찾아가보라”는 말을 듣고는 곧장 길을 나섰다.
“너는 國唱이 될 재목이니…”
박동진 명창이 소리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화 한 토막이 이때 나왔다. 대전에서 청양을 가려면 금강을 건너야 했다. 뱃삯 몇 전을 내야 나룻배를 탈 수 있었는데, 배짱 좋은 소년 박동진은 돈 한푼 없이 냉큼 배에 올라탔다. 배가 강 중간쯤 이르렀을 때 마침 술이 거나하게 취한 선원 세 사람이 “뱃삯이 없으니 던져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박동진은 “뱃삯 대신 소리라도 할 테니 들어보라”고 맞섰다. 소리를 배운 적은 없지만 그는 협률사 공연에서 본 대로 심청가 한 마디를 멋들어지게 불렀고, 소리를 들은 손님들이 “잘 배운 소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 그 자리에서 당시로서는 큰 돈인 1원40여전을 걷어주기까지 했다. 박동진은 이 돈으로 선물까지 사들고 손병두를 찾았다.
학채(學債)가 없었던 박동진은 머슴살이 같은 생활을 하며 1년4개월여를 손병두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손병두는 그리 뛰어난 소리꾼은 아니었던 듯하다. 어느 날 손병두가 장에 가서 ‘춘향전’을 사오는 것을 본 박동진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떠날 결심을 한다. 판소리라는 것이 이야기인 ‘사설’을 기본으로 하는 것인데, 손병두가 춘향전을 새로 사는 것은 이미 그가 아는 판소리를 모두 가르쳤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때 박동진은 인근 부자인 윤씨라는 사람을 만나 소리를 들려줄 기회가 있었다. 그의 소리를 들은 윤씨는 “너는 국창(國唱)이 될 재목이니, 민요나 부르는 손병두에게 배우지 말고 정정렬(丁貞烈) 같은 명창을 찾아가라”고 일러줬다.
박동진 명창은 정정렬에게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았으나, 바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년 정도 시골의 뜨내기 공연 단체에서 공연을 하면서 살아가다가 대구의 박상근(朴相根)과 인연이 닿아 ‘흥보가’를 배우게 된다.
대구에서는 술집 기생들의 소리 선생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이른바 ‘스캔들’도 많이 일으켰다. 박동진은 얼굴도 잘생긴 데다 소리도 잘해서 여성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조카인 일본 여대생과 연애하다가 들켜 경찰들로부터 모진 매를 맞고 경주로 쫓겨났고, 경주에서는 기생들의 짝사랑에 말려들기도 했다.
1970년 변강쇠 타령을 열창하고 있는 박동진 명창.
박동진은 이때부터 25세때까지 유성준(劉聖俊)으로부터 ‘수궁가’를, 조학진(曺學珍)으로부터 ‘적벽가’를, 박지홍(朴枝洪)으로부터 ‘흥보가’를 각각 전수받았다. 김창룡의 동생인 김창진(金昌鎭)으로부터는 ‘심청가’를 배웠다. 어쩌면 이 시기가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셈.
박동진은 당대 명창으로부터 여러 소리를 두루 섭렵했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배운 탓에 모든 소리를 세세하게 익혔다기보다는 그들 소리의 특징만을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오히려 훗날 어느 유파에도 기울지 않고 ‘박동진제’로 불릴 만한 스스로의 경지를 터득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판소리는 좋은 스승으로부터 세밀하게 배우지 못하고서는 ‘예술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구전 예술. 박동진 명창이 이런 짧은 가르침을 딛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소리 위해 똥물 60그릇 마셔
1969년 자신이 복원한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숙영낭자전을 완창하고 있는 박동진 명창(왼쪽). 고수는 김두수씨다.
“못된 짓을 많이 해 목을 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별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효험이 없자 방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두 달을 앓는 것으로 그쳤다. 박동진은 전국을 떠돌며 소리 공부를 했지만 한번 잃은 목은 찾기 어려웠다. 전도양양하던 젊은 소리꾼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래도 소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30대의 박동진은 고향집으로 내려가 뒷산에 토굴을 파고 살면서 소리를 깨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말고는 소리만 지르는데, 침이 마르고 이가 솟으며 뼈마디가 모두 풀려 늘어졌다고 한다. 매일같이 소리만 질러대니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데도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전신이 붓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가 보고 기겁을 할 정도였다. “소리도 좋지만 내려가자”고 잡아끄는 아버지께 인분(人糞)을 퍼다 달라고 부탁했다. 소리하다 죽게 된 데는 똥물이 최고라는 말이 생각났던 것. 그는 양재기로 똥물을 60그릇 이상 마셨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박동진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리 공부 100일을 채우고서야 산을 내려왔다.
소리꾼이 ‘득음(得音)’을 한다는 것은, 더구나 한번 상했던 목으로 득음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소리 독학은 훗날 명실상부한 명창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박동진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젊은 시절 그의 방황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한국전쟁 직후 만난 두 번째 부인 변기 여사와는 평생을 함께 했다. 변여사는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박동진이 마음을 잡고 차분하게 소리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변여사의 내조 덕분이었다.
박동진은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로 들어갔다. 이후 6년 동안 아침 여섯시부터 정오까지 혼자서 소리 공부를 했다. 마침내 1968년 ‘흥보가’를 완창할 즈음에는 당대 최고의 소리를 가진 명창으로 거듭나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하고 1973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재주꾼’ 박동진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활발한 활동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전통 판소리를 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강쇠 타령’처럼 사설만 남은 판소리를 재현했고,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예수전’ ‘모세전’ 등의 창작 판소리 공연으로 기독교 선교 활동에도 힘썼다.
그가 하도 많이 ‘예수전’ 공연을 했기 때문에 ‘예수전’ 전체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사실 예수전의 1·2부는 그가 작창(作唱)만 한 것이고 3부만 그가 대본도 쓰고 곡도 붙인 것이다.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전’을 연습하다가 기독교 신자가 됐다. ‘춘향가’를 완창하고 난 뒤 조향록 목사(현 초동교회 원로목사)와 극작가 주태익씨가 찾아왔는데, 이들은 ‘예수전’ 대본을 함께 가지고 왔다. 대본에 곡을 붙여 방송에서 소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방송 출연 욕심에 승낙을 하고 연습을 하다 결국 예수에 빠져들어 기독교 신자가 됐다.
박동진 명창은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소리로 세태를 풍자하는 ‘시사 판소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고정으로 맡기도 했고(1988년), TV 광고에 출연해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를 구성지게 불러젖히며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1992년). 74세 때인 1990년까지도 ‘변강쇠 타령’ 완창 발표회를 가지는 등 늘 남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건강을 위해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나이를 먹어도 ‘목’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새벽 빼놓지 않고 소리 공부를 해온 그의 규칙적인 생활은 유명하다.
전국을 누비며 바쁜 무대를 가졌던 그는 1997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공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박동진 판소리전수관’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그를 부르는 무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서슴지 않고 달려갔다.
나이를 잊고 활발한 활동을 했던 박동진 명창은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하고 싶다”고 말해왔던 그의 바람대로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북채를 잡고 소리를 연습하다 7월8일 아침 조용히 천상의 무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