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 한국 가요계의 ‘황폐화 시기’나 다름없던 1990년대 후반을 보내고 숨가쁘게 맞이한 21세기 초반에, 온국민의 영웅으로 떠오른 대중음악 스타가 록음악 진영에서 배출되리라고는.
- 2002년 붉은 악마 열풍과 함께 바람처럼 중원을 점령해버린 윤도현의 성공은 그래서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월드컵 기간 중 목청껏 질러댄 ‘오 필승 코리아’가 TV 광고를 통해 하루 종일 전국에 메아리치면서 그는 청춘의 가수를 넘어 단숨에 ‘할머니에서 어린이까지’ 이름을 아는 국민적 스타로 급부상했다. 너나할것없이 ‘오 필승 코리아’를 열창함에 따라 그 광고음악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윤도현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그는 월드컵을 전후로 서너 개의 CF에 겹치기로 출연하면서 광고모델 시장의 신성(新星)으로 떠올랐고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두 시의 데이트’ 진행자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에는 TV 프로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맡아 천정부지의 인기를 과시했다. 본인 스스로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당황했을 정도의 유례없는 독무대였다.
실제로 그 시점에는 온 세상에 가수라곤 윤도현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음반이 팔리지 않는 데다 일반의 관심이 온통 월드컵에 쏠리는 바람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던 가요계는 갑작스런 ‘윤도현 천하’에 부러움과 시기가 묘하게 섞인 시선을 보냈다. KBS TV 박해선 책임프로듀서는 “어떤 과정이었건 간에 윤도현은 뉴 밀레니엄 최초의 가요 스타가 됐다”며 그를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나이’로 일컬었다.
윤도현의 윤밴, 윤밴의 윤도현
그의 위상은 가요 서클에만 머물지 않았다. 월드컵에 바로 이어 열린 9월 평양공연을 비롯하여 연말 대통령선거와 촛불시위 등 정치적 의미의 행사들에 자진 등장,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톱 가수를 넘어선 ‘청춘의 아이콘’으로도 그 존재가 두드러졌다. 젊다는 점에서, 또 최고 인기 스타라는 점에서 그의 파괴력은 만만찮았다.
행동주의의 전통이 일천한 한국 음악계 풍토에서, 활동의 자유를 제약받는 스타인 그가, 현실참여적인 자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많은 젊은이들을 움직인 것이다. 윤도현은 그리하여 가요계에 대한 파워는 물론 사회적 파괴력도 동시에 발휘한 드문 사례로 평가받았다.
한차례 거대한 태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함처럼 이제는 그도 여유로운 시간을 찾았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윤도현은 새 앨범작업으로 정신이 없었다. 마주앉은 얼굴에는 고단한 기색이 완연했다.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녹음작업의 속성상 처음에 그는 인터뷰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윤도현 개인이 아닌 윤도현 밴드의 인터뷰로 해달라”는 전제조건을 단 뒤 “전 할 것은 합니다!”라며 예의 씩씩한 어투로 인터뷰에 응했다.
자리에는 박태희(베이스) 김진원(드럼) 허준(기타) 등 윤도현 밴드 멤버 전원이 참석했다. 윤도현은 개인이 부각되는 것을 피하려는 듯 밴드 이야기를 많이 꺼냈으며 ‘윤밴’이란 말이 입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윤밴 멤버들은 주로 간판인물인 윤도현에 관해 언급하는 보기 좋은 배려(?)를 아끼지 않아 인터뷰 자리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멤버들은 “윤도현의 ‘피곤지수’에 맞춰 우리들도 움직인다. 너무 힘들어 해서 옆에서 보기가 안쓰럽다”며 ‘리더 보호’에 애쓰는 모습이었다.
-먼저 얼마 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세계 평화 음악상을 수상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평화 메시지 전달에 노력한 공로로 받은 것으로 아는데요, 수상 턱은 많이 냈는지요?
“감사하기는 한데요, 수상 턱을 내고말고 할 상은 아니었어요. 단지 영예로운 상일 뿐이었지요. (갑자기 밴드 멤버들에게) 참, 트로피 어디 있지? (원래 트로피가 없는 상이었다고 하자 한바탕 웃고 나서) 그냥 우리가 상을 받고 노래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그 시상식은 여러 국가에서 참여한 가수들이 함께 상을 받고 공연 무대를 갖는 자리로 마련됐어요. 우리말고도 글로리아 게이너, 맥스 프리스트, 인엑서스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나왔지요. 그런데 공연 하루 전날 기획책임자가 비용을 횡령하고 도주해버린 사건이 터졌어요. 공연 자체가 무산될 뻔했지요. 그런데 아티스트들이 ‘어차피 출연료 때문에 온 것도 아니니 팬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공연을 강행해 참 놀랐어요. 노래도 무척 열심히 하더군요. 저희도 최선을 다했고요.”
-새 앨범 작업중이라도 일이 무척 많을 텐데 스케줄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녹음 하느라고 다른 스케줄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후 2시에 모여서 다음날 새벽 2시나 3시까지 스튜디오에 박혀 있기 때문에 시간이 나질 않아요. 사실 이번 ‘신동아’ 인터뷰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월드컵 이후 첫 번째로 발표하는 신작이라서 저희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그래서 외부 일을 대폭 줄였어요. 방송도 거의 끊고 TV 방송인 ‘러브레터’ 진행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터뷰와 출연 요청이 쏟아져들어와서 죽을 지경이에요.”
“월드컵으로 욕도 많이 먹었다”
윤도현 하면 2002월드컵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녹음중에도 외부의 섭외가 쇄도하는 것은 월드컵 이후 그의 존재의 무게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가수 가운데 몸값이든 인기든 모든 점에서 윤도현이 최정상급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월드컵 덕을 봤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가수처럼 앨범이나 곡의 히트를 통해서 스타덤을 수확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다. 월드컵과 관련해 윤도현 본인의 기분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월드컵 이전과 이후 나의 위치는 말할 것도 없고, 나를 보는 눈길도 달라졌다. 그 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월드컵 이후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한마디로 유명해졌지요. 윤도현 밴드보다 개인 윤도현으로 알려진 게 아쉽긴 하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죠. 제가 사는 일산의 아파트를 지나가기만 해도 아직도 애들이 쫓아와서 ‘오 필승 코리아’ 합창을 해요. 할머니들도 ‘월드컵 청년이구만’ 하면서 알아보시고요. 다 전에는 없던 일이죠.”
-사전에 월드컵 기간이 윤도현씨 경력에 결정타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나요. 혹은 소속사 차원에서라도 그 기간을 잘 타야 한다는 일종의 ‘기획 마인드’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전혀요. 우리 축구 역사에 그런 경험이 없었잖아요. 지금은 충격이 줄어들었지만 그때는 16강도 얼마나 실현하기 힘든 꿈이었습니까? 가수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월드컵에 임했을 뿐이에요. 우리 윤밴도 한국 축구의 분발을 즐기고, 열광적으로 응원한 것뿐이었어요. 제가 잘될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사전 기획은 있을 수도 없었죠. 그런데 월드컵이 끝난 후에 우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얘기들이 계속 들려오더군요. 그 때문에 마음에 상처도 좀 받았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들려오던가요?
“한마디로 ‘월드컵을 잘 이용해먹었구나’ 하는 거였죠. 갑자기 너무나 유명해진 때문이라는 걸 잘 알지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잖아요. 가수로서 홍보든 마케팅이든 월드컵 기간을 이용한다는 게 사실 의도한다고 되나요? (윤도현 밴드가 잘된 건) 순전히 운이었어요. 그런데 한쪽에선 ‘가수가 음악만 열심히 하지, 완전히 돈에 미쳤구만’ 하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우린 그저 재미있게 즐겼을 뿐인데. 억울했죠.”
-하긴 비판이든 질시든 그런 시선이 이해도 되는 게, 윤도현씨가 월드컵 전후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이런저런 CF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까? CF는 바로 돈과 직결되잖아요.
“그것도 실은 모두 월드컵이 열리기 훨씬 전에 계약했던 것들이에요. 엄청 많은 것으로 알고들 계시지만 핸드폰 의류 맥주 등 4편밖에 안 돼요. 하루에도 수십 차례 동시다발로 방영되고 계속 내용을 바꿨기 때문에 많아 보였던 거죠. 그런데 그 CF들이 월드컵 시즌의 열기와 맞물려 한꺼번에 모두 떴지요. 그러니까 윤도현 밴드보다는 CF 제작사들이 싸게(?) 만들어 대박을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드컵 전에 계약해서 출연료가 비싸지 않았으니까요. 실제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습니다.”
-CF 출연료가 어느 정도 됐나요?
“명목상으로 한 4억원 가량 됐을 거예요. 하지만 세금 제하고 소속사 지분을 포함해 이것저것 뗐더니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런 돈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세금이 정말 많은 것에 놀랐어요. 지금은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오 필승 코리아’는 어떻게 부르게 된 건가요.
“그것도 윤도현이나 윤밴의 창작물이 아니죠. ‘오 필승 코리아’는 원래 프로축구 부천SK의 서포터스 헤르메스가 구전가요처럼 부르던 응원가였고, CF로 방영된 것도 편곡이 이미 돼 있던 거였어요. 전 그저 노래를 해달라는 섭외가 들어와서 단순히 CM송 부르는 기분으로 부른 것뿐이었어요. 결과가 워낙 좋아서 제 노래처럼 인식되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윤도현의 말투는 꾸밈이 없이 직설적이다. 얘기하는 중간중간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라디오나 TV 진행자로서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고 싶은 대로 그냥 말을 토해낸다. 그래서 그와 대화를 나눌 때는 말을 빙빙 돌리거나 외교적인 표현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물어도 원하는 답변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솔직함’은 윤도현의 코드처럼 일반인들에게 인식돼 왔다.
-팬들은 윤도현이 실제로 만났을 때도 미디어에 비치는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고 담백한지 궁금증해합니다. 저한테도 팬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바로 이 점입니다. 그런 직선적인 언어태도 또한 혹시 방송용이나 공식석상용이 아니냐는 거죠. 밴드 동료들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참 순수해요. 사심이 없어요. 1996년 처음 윤도현씨를 만났을 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귀티’가 느껴졌어요. 조금 경계했죠. 그런데 그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윤도현씨가 후다닥 먹더니 주변에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아줌마, 여기 공기 밥 하나 더 줘요!’ 하는 거예요. 얼굴이 알려진 스타는 보통 그렇게 못 하잖아요. 굉장히 놀랐어요. 지금도 변함없이 그에겐 귀티와 촌스러움이 공존합니다.”(박태희)
“순수함을 뒷받침해주는 단순함이 있어요. 무식하다는 의미에서의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의외로 ‘그걸 왜 못해? 하면 되지’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어려운 일도 쉽게 풀어내요. 인기인 입장에서 까다로운 사회적·정치적인 일도 ‘내가 할 수 있으면 해야지’ ‘이런 말 하면 어때?’ 하고 앞뒤 안 보고 나섭니다. 정말로 솔직해요.”(김진원)
“정의감이 있어요. 불의를 보면 못 참아요. 또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마치 옆집 형 같은 모습이에요.”(허준)
-본인이 생각하기에 월드컵 이후 달라진 것은 없나요? 아무래도 ‘국민적인 스타’로 세인의 관심이 쏠리면 예전과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을 텐데요.
“저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해봐요. 혹시 달라진 게 없나 하고. 그런데 이전과 비교해서 별로 바뀐 건 없는 것 같아요. 우선 ‘국민적 스타’라는 말은, 글쎄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아요. 워낙 섭외도 많고 스케줄도 많으니까 피곤하고, 그래서 남 보기에는 변했는지 모르겠는데, 저로서는 예전과 같습니다. 아 참, 이런 건 달라졌어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렇게 하면 좋겠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 관객들이 흥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윤도현 하면 ‘월드컵 가수’를 곧장 떠올립니다. 가수로서 가수 아닌 것에 관련된다는 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점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질문은 윤도현한테 던졌지만 답변은 박태희가 했고 윤도현은 들으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월드컵 가수’라는 수식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런 관점은 ‘빙산의 꼭대기’만 봤기 때문에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얘기하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7년 동안 라이브 공연을 꾸준히, 많이 해왔어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적잖이 뿌린 셈이죠.
그게 입소문으로 전해져서 윤도현 밴드의 존재가 싹텄고 또 인터넷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우리 나름의 위치를 다졌습니다. 그런 축적된 힘이 월드컵에서 터져나온 거죠. 아무것도 없이 그냥 월드컵이란 호재에 힘입어 부상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한 달 했는데 두 달 못하겠어?’
윤도현 밴드가 뿌린 씨앗은 현재 국내 음악계에 두드러지진 않지만 커다란 물밑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존재가 부각된 이후 변방에 머물던 록밴드들이 우후죽순 중앙무대에 진출하면서 ‘록 르네상스’가 움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근래 서울 신촌과 홍익대의 라이브클럽에서 활동하는 그룹이 500팀으로 늘어났다는 이야기, 전국적으로 따지면 3000여 팀은 될 것이라는 추산은 상당부분 이 ‘포스트 윤밴 현상’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밴드음악이 위축됐던 1990년대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폭증세다. 이들은 대부분 윤도현 밴드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일단 어떤 음악이 하나의 실체를 가지려면 그 분야에 열중하는 음악인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같은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힘입어 최근 가요계에는 ‘이제 방송중심의 댄스 키드들에서 라이브 밴드로 판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윤도현 밴드의 멤버들. 왼쪽부터 박태희(베이스), 허준(기타), 윤도현(보컬), 김진원(드럼)
그러나 그 와중에 윤도현은 라디오와 TV 프로 진행자로 발돋움했다. 록밴드는 통상 제도권 음악계와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런 행각은 여러 가지 뒷말을 낳았다. 밴드로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점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방송 진행자와는 전혀 다른 말투나 언행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은 프로들이 성공을 거두는 이유에 대해서도 물었다.
-라디오 DJ를 맡았다는 소식에 저도 처음에는 놀랐어요. ‘아니, 윤도현이 라디오 프로를 진행한단 말이야?’ 했죠. 록밴드의 리더로서 DJ를 맡는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나요?
“솔직히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룹과 별도로 개인 활동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고 멤버들도 반대했어요. 그래서 피해 다니기도 했죠. 하지만 매니저는 방송국에 자주 출입하면서 프로듀서들과 친분을 맺는 것이 일인데, 제가 그걸 통째로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는 담당 PD가 ‘기존 진행자인 이문세씨가 석 달을 쉬게 돼 대타 세 명을 구해 한 달씩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으니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 달은 못할 것 없잖아?’ 하는 생각으로 응했죠. 그랬더니 한 달 지난 후에 ‘다른 대타를 못 구했으니 더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한 달 했는데 두 달 못하겠어?’ 하고 또 했죠. 그러다 보니 어느새 2년6개월이 흐른 거예요. (DJ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걸 통해서 얻은 것도 많지만요.”
-윤도현씨가 말하는 방식이 좌충우돌이랄까, 상당히 자유분방해서 애초 방송국에서 섭외할 때 내부적으로 모험이라는 우려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하지만 맡은 프로는 예상 밖으로 최고 청취율을 기록했지요. 진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아주 많았어요. 방송프로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자’는 생각으로 임했는데 초기에는 비난의 글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저게 DJ냐’는 거죠. 하긴 뭐, 저같이 진행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그게 저로선 평생 처음으로 욕먹는 거였어요. ‘당장 때려치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가 죽었죠. 마구 얘기하지 않고 방송식으로 정리해서 얘기해야 하는 게 굉장한 스트레스였습니다.”
-라디오를 그만둘 때 텔레비전 진행도 함께 그만둘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왜 ‘러브레터’는 계속하게 된 건가요. 이 프로를 맡게 된 경위도 궁금합니다.
“그 프로를 진행하게 된 것도 라디오 프로 맡을 때처럼 대타였어요. 이전 진행자인 이소라씨가 그만두게 되면서 담당 프로듀서로부터 임시로 맡아달라는 섭외가 왔죠. 라디오도 그렇지만, TV는 더 자신이 없어서 처음엔 완강하게 거절했어요. 그런데 요청을 하면서 프로듀서가 ‘MC를 못 구하면 프로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나갈 음악프로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더라고요. 왜, 그럴 때 쓰는 말이 있잖아요, ‘총대를 멘다’고.
말씀하신 대로 두 프로 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러브레터’는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둔다는 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 윤도현 밴드의 평양 공연(위), 올해 3월 이라크전 파병반대 1인시위(오른쪽 아래), 지난해 12월 미군 장갑차 사고 여중생 추모 거리 콘서트(왼쪽 아래).
-1995년의 첫 앨범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거죠? 데모 테이프를 레코드사로 보내서 기회를 마련한 건가요?
“아닙니다. 1992년 방위복무를 하면서 ‘종이연’이란 이름의 무명 포크그룹으로 활동했어요. 한번은 종이연이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공연에 출연하게 됐죠. 제가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음악평론가인 강헌씨가 호감을 가졌고 방송음악을 하는 임준철씨에게 추천을 해서 첫 앨범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 ‘사랑 Two’와 ‘너를 보내고2’가 임준철씨 작품이지요.”
-지금도 윤도현 밴드 공연 때 최고의 반응을 얻는 곡인 ‘이 땅에 살기 위하여’는 박노해의 시에다 윤도현씨가 곡을 썼지요. 현재의 윤도현 음악이미지를 결정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곡인데요, 어떻게 박노해의 시로 곡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성균관대학 앞에 ‘시 문화회관’이라는 곳에서 관계자들이 모여 시에 노래를 붙이는 정례행사가 있었어요. 저도 자주 참여해서 시와 인연을 맺었어요. 박노해 시인의 시는 어느 날 ‘노찾사’ 선배 집에 놀러 갔다가 처음 보게 됐지요. 이전의 예쁜 시와는 너무도 달라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제 고향 파주에 큰 수해가 났어요. 인재(人災)로 여긴 주민들이 시위를 했고 당국은 시골 사람들이라 얕봤는지 시위하는 이들을 겁주는 거예요. 수재의연금도 나오지 않았고요. 그때 정말 열 받았죠. 예전부터 격한 상황에 부닥치면 노래로 제 기분을 옮기곤 했거든요. 그 순간 ‘이 땅에 살기 위하여’가 떠올랐어요.”
윤도현은 1972년 경기 파주에서 윤수길(62)씨와 심초득(56)씨 사이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시골 농부의 아들로 자랐다. 문산초등학교, 문산중학교, 문산고등학교 등 쭉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며 평범한 성장기를 보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군사분계선이 쳐진 그의 동네가 미군부대가 많은 ‘특수한 환경’이었다는 정도다.
탱크 보고 철책 보고 반공포스터 보고 ‘삐라’를 주우러 다닌 게 어린 시절 기억의 전부였고 청소년기에는 미군들과 싸우는 게 일이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북한이 바로 앞에 보이는 비무장지대 마을 ‘통일촌’에 친구들을 만나러 드나들면서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분단 상황’에 정서적으로 눈을 떴다는 이야기다.
그가 나중에 ‘임진강’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박하사탕’ 등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부르고, 반전통일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로서는 마땅히 밟아야 할 길이었는지 모른다. 인터뷰 한 달 전쯤 우연히 만났을 때에도 윤도현은 아직 진실이 온전히 규명되지 않은 한국전쟁 당시의 ‘노근리 사건’에 대해 무척이나 관심을 보였다.
-파주 지역에서 자라면서 록을 꿈꾸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어떤 이유로 록음악에 빠져들게 됐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미군부대가 많았고 무수히 많은 미군 대상 클럽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이 모두 록이었으니까요. 불법 팝송음반-‘빽판’이라고 불렀죠-도 지천에 널려 있었고요. 자연스럽게 록에 다가갈 수 있었죠. 무엇보다 힘껏 소리를 내지르는 게 체질에 맞았어요. 원래 학교 다닐 때부터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은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했고요. 그 시절 록은 저만의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때문에 록음악에 꿈을 싣게 된 거고요.”
가슴에 남은 평양 사람들
-지난해 9월에는 평양에서 공연했지요. 군사분계선을 지척에 끼고 자란 사람으로서 느낌이 남달랐으리라 생각합니다. TV로 볼 때는 관객들 반응이 남쪽과 비교하면 썰렁해 보이던데, 무대를 이끌어가는 데 애를 먹지는 않았나요.
“정말 설레는 기분이었죠. 떠나기 전에는 ‘설마 우리가 잘못돼서 아오지 갈 일 있겠어?’ 하며 농담도 했지만,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어요. 늘 상상 속에, 생각 속에만 있던 북한 땅을 직접 밟는다는 것, 더욱이 공연까지 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우리로선 편견을 씻는 계기가 됐죠.
관객의 반응은 남쪽과 차이가 있었지만, 그 사람들로서는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봅니다. 주관한 MBC의 요구도 있었고, 저희도 일부러 그 쪽과 접점을 찾으려고 레퍼토리로 ‘뱃노래’ ‘오 통일 코리아’를 고르는 등 꽤 신경을 썼죠. 지금 만드는 신보에도 평양공연 때의 느낌을 담은 곡을 수록할 계획입니다. 평양 고려호텔에서 묵을 때 남들과 같이 밖에 나가기가 싫어서 호텔에 혼자 남아 쓴 곡이죠.”
-윤도현씨는 작년 대선과 촛불시위 등에 참여하면서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했고, 이를 통해 이른바 2030세대 사이에서 솔직한 청년상으로 각인되면서 일약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대선의 경우 특정 후보의 지원 유세와 무대를 갖는 데 따른 심적 부담은 없었나요? (그는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공개 지원했다.)
“전혀 없었습니다. 아까 멤버들이 얘기했습니다만 저는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이렇게 하면 뭐 어때?’ ‘그걸 못할 이유가 뭐 있어?’ 하는 성격입니다. 소신이라고 하긴 뭣합니다만 가식이나 둘러대서 피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외부의 요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제가 하고 싶어서 만든 무대였어요. 소속사(다음기획) 대표도 같은 입장이어서 전혀 장애가 없었습니다. 결과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요. 그 일도 방송하듯 공연하듯 재미있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정규 앨범 5장에 라이브 앨범을 포함해서 7장의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가장 맘에 드는 앨범과 곡이 뭔지 말씀해주시죠.
“너무 조용한 스타일이라서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2001년 5집 앨범입니다. 그 앨범 만들기 전엔 모든 면에서 공격적이었죠. 머리 길다고 지적도 받고, 이런저런 이유로 주변과 다툼도 많았어요. 그래서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녹음에 임했지요. 멤버들과 ‘해피’한 기분으로 작업해서 맘에 들어요. 곡은 2집에 있는 ‘긴 여행’을 꼽겠습니다.”(박태희는 ‘박하사탕’, 김진원은 ‘바람’, 허준은 ‘하노이의 별’을 꼽았다.)
“갈증을 풀어주는 것은 진실함이다”
-신보는 주로 어떠한 음악으로 구성됩니까? 매니저한테 듣기로는 상당히 무거운 음악이 될 거라고 하던데요. ‘Fuck you!’ 같은 욕설이 포함된 곡도 있다는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그래요. 상당히 ‘헤비’하게 꾸몄어요. 나이 들기 전에 강하게 해보자고 멤버들 간에 의견이 자연스럽게 모아졌습니다. 사운드도 메시지도 모두 강해요. ‘삑’ 소리로 처리되긴 하지만 욕설을 구사한 것도 메시지 강화의 일환이죠. 무엇보다 발라드가 한 곡도 없습니다. (웃으며) 너무 강해서 소속사 사장도 걱정할 정도예요. 이번 앨범으로 아줌마 아저씨 팬들은 떠날지도 모르지만 저희는 담담해요. 우리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신보를 두고 하도 얘기를 많이 하니까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월드컵 이후 처음 나오는 신작이니까 다들 걱정하는 거겠지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인터뷰했던 가수들에게 했던 대로 ‘윤도현 밴드의 음악이 팬들에게 무슨 의미였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때까지 일절 머뭇거림 없이 즉답으로 일관해온 그도 이 대목에서는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다른 가수들의 예를 들어줬더니 “더 얘기하기 힘든데요” 하며 곤란해했다. 5분 정도 지나서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이들 중에 ‘다른 친구들은 댄스음악을 좋아하는데 난 윤도현 밴드가 좋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래요. 어른들도 젊었을 때의 감성을 다시 찾는 느낌이라고들 하시고요. 윤밴 음악은 그런 ‘갈증의 해소’ 아닐까요? 주류와 거리가 있는 저희 음악을 통해 쾌감을 맛보는 것이겠죠. 그 쾌감은 ‘진실함이 주는 만족감’이라고 봅니다.”
윤도현은 앞으로도 팬들에게 진실한 메시지로 감동을 주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신보에 욕설이 포함되는 것도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윤밴의 솔직한 메시지임을 이해해달라고 당부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곧 나올 새 앨범이 갖게 될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아직 갈 길이 먼 그들의 음악여정에서 한 과정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월드컵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밴드 본연의 창작 음악으로 독립하느냐 여부를 가늠케 해줄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한국 대중음악 스타 열전’은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