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프랜차이즈 업계의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윤홍근 제너시스 BBQ그룹 회장. 국내 프랜차이즈 기업 최초로 세계 시장에 진출한 그는 한발 앞선 스피드 경영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1995년 불혹(不惑)의 나이에 자본금 5억원으로 차린 회사를 연매출 8900억원의 대기업으로 키워낸 그가 공개한 경영 노하우와 성공 스토리.
윤 회장을 만나자마자 이 카페에 대해 물었다.
“외식업체, 제과업체 매장이 카페형으로 바뀌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2007년부터 BBQ 매장을 새롭게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처음엔 적잖이 곤란을 겪었어요. 33㎡(10평) 남짓한 기존의 배달 전문 매장을 66㎡(20평) 안팎의 카페형 매장으로 바꾸려다보니 추가 비용에 부담을 느낀 가맹점주가 상당수 이탈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기존 가맹점주들이 이탈한 지역에 모두 새 매장을 열어 상권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초반 우려와 달리 BBQ 카페의 매출이 늘어 이미 300여 개 가맹점을 바꿨고 빠른 시일 내에 BBQ 1850개 가맹점을 모두 BBQ 카페로 변경할 예정”이라며 “BBQ 카페에서 기존 치킨류 외에 다양한 가족 메뉴를 선보인 덕분인지 아이 생일파티, 친지 모임 장소 등 생활문화공간으로 활용돼 만족스럽다”고 덧붙였다.
활기찬 작업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사람처럼 점퍼 차림인 그는 이어 자신의 성공 스토리와 삶에 얽힌 얘기를 차근차근 끄집어냈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마다 위기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의 줄임말이라고 되뇌었지요. 위험한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고 역발상의 도전정신으로 극복해왔습니다.”
전셋집을 월세로 바꾸고 마흔에 창업
윤 회장이 닭고기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당시 미원(현 대상그룹)에서 근무하던 그는 미원이 인수한 닭고기 생산업체 천호마니커에 영업부장으로 긴급 투입됐다. 부도난 회사 마니커는 예상대로 열악한 상황. 판매 대리점이 무더기로 이탈해 부도 전 하루 5만마리에 달하던 닭고기 판매량이 1만마리로 뚝 떨어졌고, 사무실에는 신입 영업사원 3명만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우선 대리점 사정을 점검했더니 의외로 과거 마니커 대리점들이 튼튼하더군요. 영업정책만 잘 쓰면 이탈한 대리점들을 모두 되찾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영업조직을 정비해 5개월 내에 하루 판매량 5만마리를 회복하고 7개월에 7만마리, 3년 후에는 20만마리를 달성해 업계 1위가 되겠다는 야심 찬 판매 계획을 세웠죠.”
그는 1년 안에 판매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그런데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던 마니커의 닭고기 판매량이 12만마리를 고비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닭고기를 소비할 치킨 전문점 사업을 벌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사에 기획안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소형 치킨점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 데 반해 미원에서는 대형 패스트푸드점을 원했다. 대기업인 미원이 영세사업자가 하는 소형 치킨점 사업에 뛰어들면 그룹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소형 치킨점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당시 대형 치킨 패스트푸드점을 하나 여는 데 드는 비용은 20억원 정도였는데 거기서 파는 닭고기는 하루 200여 마리였어요. 반면 5000만원 정도 투자하는 소형 치킨점에서는 하루 30여 마리를 팔았죠. 둘을 비교하면 투자비용은 40배 차이 나지만 매출은 6~7배 차이에 그칩니다. 투자 대비 효율성에 큰 차이가 나는 거죠. 소형 치킨점이 포화상태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술을 팔면서 안주로 닭을 내놓는 호프집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치킨점은 아이와 주부를 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사업이었죠.”
‘닭 사랑’이 유난한 윤홍근 회장, 그의 집무실에는 1100여 점의 닭 그림과 닭 모형 장식품들이 빼곡하다.
“한때 마니커가 출자하는 자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던 재벌기업의 위장 계열사라는 비난에 처할 위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제가 독립해서 창업하기로 마음먹었죠. 마니커의 닭고기를 구입하는 대신 회사의 공장시설 및 자원을 지원 받기로 했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창업자금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회사에 사표를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아내 손에 이끌려 2개월간 매일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솔직히 전 이름뿐인 신자였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드렸어요. 차츰 확신이 들면서 제 인생 최고의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
최소 5억원의 창업자금이 필요했다. 아내와 상의해 먼저 전셋집을 월세로 바꾸고 저금한 돈과 은행대출을 모두 합쳐 1억원을 조달했다. 나머지는 10여 명의 지인이 2000만~5000만원씩 투자한 돈으로 마련했다.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었다. 당시 그 돈은 그들에게 거의 전 재산과 다름없을 정도로 큰돈이었다”고 회고했다.
“창업자금을 마련한 뒤 창업에 힘을 주셨던 목사님에게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세계 속의 기업이 되고 싶은 꿈이 담긴 이름’을 부탁드렸어요. 제너시스(Genesis)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창세기’를 뜻합니다.”
1995년 9월1일 마침내 제너시스 BBQ가 탄생했다. BBQ는 ‘Best Believable Quality(가장 믿을 수 있는 품질)’의 약자다.
“제 뜻대로 사업을 계획하며 운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이 났습니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많았어요. 아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마련해놓고 24시간 내내 일에 몰두했죠. 첫 사업설명회에 실패하는 등 어려움이 잇따랐지만 실망하지 않았고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숱한 위기를 극복한 역발상 전략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윤 회장의 도전정신과 남다른 전략,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면 일단 가맹점을 모집하는 것이 맨 처음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 가맹점을 지원할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핵심은 교육과 품질이라고 판단, 사무실 1개 층을 교육장으로 만들고 한켠에 닭 조리법을 연구할 실험실을 마련했다. 그런 다음 가맹점을 관리할 직원 30명을 뽑았다.
“슈퍼바이저로 불리는 이들은 가맹점 개설부터 조리, 영업, 경영까지 모든 문제를 지도하는 핵심요원입니다. 일반적으로 30명이면 500개 가맹점을 관리할 정도의 인력으로 당시 형편으로는 누가 봐도 과도한 인원이었죠. 하지만 다른 프랜차이즈와 질적인 차별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과감한 투자였습니다.”
재료도 국산 냉장 닭만을 고집했다. 창업 6개월 만에 BBQ 100호점이 문을 열었다. 국내 프랜차이즈 업계 사상 최단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부 가맹점주들이 맛과 신선도가 떨어져도 좋으니 원가를 낮춰달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술을 팔게 해달라고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비싼 원료를 쓸 수밖에 없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맞는 고급 치킨이라는 BBQ의 이미지가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까지 6개월만 기다려달라고 설득했어요. 신기하게도 6개월이 지나자 매출이 급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맹점 수도 급속도로 늘어 윤 회장은 창립 3년 만에 500개 가맹점을 내겠다던 당초 목표를 2년 만에 달성했다. 하지만 한숨 돌리고 나니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10월. 달러는 폭등했고 원화는 폭락했다. 수입 사료에 의존하는 양계업계는 사료 값이 치솟자 닭고기 값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물가가 오르며 튀김기름 값도 올랐다. 초대형 경제태풍 앞에서 소비자는 지갑을 닫았다. 비용 부담이 커지고 매출은 떨어지니 가맹점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불안감에 싸인 가맹점주들 앞으로 위기 돌파를 위해 함께 협력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서 환율 인상에 따른 원가 인상분 30%를 3자가 분담하자고 제안했다. BBQ 본사 10%, 가맹점 10%, 닭 공급업체인 마니커 10%, 각자가 이윤을 양보하자는 게 골자였다. 매달 부실 점포를 10개씩 선정해 100만원씩 본사가 지원해줬고, 1996년 잠시 하다 중단했던 TV 광고를 다시 시작했다.
“광고시장 또한 얼어붙어 광고 단가가 저렴했죠.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보면 96년 TV 광고보다 몇 십 배 큰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BBQ는 경쟁업체들을 확실하게 따돌리고 경쟁력을 확보했다. TV 광고로 가맹점의 매출이 늘었고 IMF 당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퇴직자들이 창업시장에서 BBQ를 선택하면서 가맹점 증가에 따른 본사의 수익도 늘었다. 그는 품질과 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더욱 늘렸고 가맹점과 본사의 신뢰관계 또한 더욱 두터워졌다. 최악의 경제상황에 BBQ는 위기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도약했다.
대박 터뜨린 ‘올리브 럭셔리 치킨’
윤 회장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2003년의 조류인플루엔자(AI) 파동이었다. 각종 매체에서 연일 수만마리의 닭이 폐사하는 장면을 보도하면서 닭고기 소비량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2주일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버텼지만, 어느 순간 소극적인 자세로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치킨외식업체 대표들을 모아 각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닭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는 사실을 보도해달라고 요구했다. 닭고기 섭취를 권장하는 프로그램과 기사가 적잖이 나갔지만 바로 매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는 닭고기의 안전성을 국민에게 빠르게 인식시킬 방법을 궁리하다 ‘닭고기를 먹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20억원을 배상하겠다’는 광고를 냈다. 치킨외식업체 회장 자격으로 소비자에게 내놓은 제안이었다. 이 광고는 닭고기 소비를 정상궤도에 올리는 데 큰 몫을 했다.
2005년 윤 회장은 BBQ신화를 만드는 결정적인 순간을 잡는다. 식용유로 튀기던 치킨을 올리브유, 그것도 최상급의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로 튀긴 ‘올리브 럭셔리 치킨’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BBQ가 세계 최초로 치킨대학을 설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치킨대학은 가맹점주들과 직원들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중앙연구소에 석·박사급 연구원들을 두어 닭고기 조리 실험과 연구를 했다.
“한 가맹점주로부터 ‘주부들이 비만을 유발하는 튀김기름이 신경 쓰여 아이들이 치킨을 사달라고 조르면 세 번에 한 번만 시켜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엄마들이 안심하고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건강 치킨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꼽히는 올리브유를 튀김기름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지만 올리브유가 끓는점이 낮아 튀김기름으로 적합하지 않은 점과 올리브유로 튀긴 치킨이 식용유로 튀긴 것처럼 고소한 맛을 내지 못하는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치킨대학 중앙연구소 연구원들이 3년 넘게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맛있는 올리브유 치킨을 만들어냈다.
올리브유 치킨을 개발한 후 모든 치킨 메뉴에 올리브유를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50번쯤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올리브유 가격이 만만치 않아 아무리 싸게 공급받아도 회사의 비용 부담이 너무 컸고, 더욱이 불경기에 치킨 값을 올려 받아야 하는 위험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시장 개척에 승부수를 던졌고 마침 웰빙 열풍이 불면서 올리브 치킨은 예상외로 대박을 터뜨렸다.
“세계로 뻗은 치킨 로드 만들겠다”
제너시스 BBQ그룹은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 기업이다. 현재 BBQ 외에 BHC, 닭익는 마을, 오션스타, 델리아띠, BBQ참숯바비큐 등 10개 브랜드를 갖고 있으며 3750여 개의 가맹점이 있다.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로는 최초로 해외진출에 성공했다. 2003년 3월 중국에 진출했으며, 2004년 6월 스페인에 진출해 세계시장 개척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이후 프랜차이즈의 본고장인 미국과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 55개국에 진출해 35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BBQ의 해외진출은 대개 마스터 프랜차이즈(Master Franchise) 방식이다. 현지 기업을 파트너로 해 브랜드 사용권과 사업 노하우를 제공하고 수익의 일정 부분을 로열티로 받는 방식이다. 현지 기업이 투자와 운영을 맡아 책임지고 관리하므로 본사는 투자부담을 최소화하면서 각 지역에 가맹점을 동시다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21세기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본의 흐름 역시 유형의 산업에서 무형의 지식산업으로 이동하고 있지요. 후자의 대표적인 산업이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우리나라는 해외 프랜차이즈 기업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급하기에 바빴지만 이제는 우리가 해외로 진출해 국내로 외화를 벌어들여야지요. BBQ는 치킨을 파는 게 아니라, 치킨 브랜드와 사업 노하우를 파는 경쟁력을 갖게 됐습니다.”
윤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비전이었다”며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내 목표는 국내 1위 프랜차이즈 기업이 아니라 세계 1위 프랜차이즈 기업인 맥도날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BBQ는 맥도날드의 기록을 하나씩 깨나가고 있습니다. 200개 가맹점을 내는 데 맥도날드는 5년이 걸렸지만 우린 불과 1년에 해냈어요. 1000개 가맹점을 돌파하는데 걸린 시간도 맥도날드는 14년, 우린 4년이 걸렸죠. 세계시장에 진출하기까지 맥도날드는 15년, 우린 7년이 걸렸습니다. 제너시스 BBQ는 2020년까지 세계 196개국에 5만개 가맹점을 열어 맥도날드를 제치고 세계 최대 프랜차이즈 그룹이 되는 성장목표를 세워두고 있어요.”
이런 윤 회장도 BBQ 직원들이 고개를 저을 만큼 깐깐할 때가 있다. 바로 신제품을 개발할 때다. 직원들 사이에 그의 별명은 ‘맛과 품질의 편집광’이다. 요즘도 매일 닭요리를 먹는다는 그는 직원들이 새 메뉴를 개발할 때 반드시 시식을 하고 까다롭게 평가한다. 또한 1000명 단위로 20~30회의 소비자 테스트를 해서 전체 2만~3만명이 먹어보게 한다.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닭의 신선도를 알아보기 위해 생닭을 먹어보기도 한다”는 그는 가맹점에 신선한 닭을 공급하기 위해 지역별 냉장차량을 이용해 신속히 배달하는 ‘콜드 체인 시스템’을 갖춰놓았다. 가장 좋은 닭을 고르는 법부터 가장 맛있는 닭고기 숙성시간, 조리온도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그는 가맹점주들의 교육에 이를 철저히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윤 회장에게 2009년은 ‘상복이 많은 해’였다. 3월 상공의 날에 국내 프랜차이즈 기업 최초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은 데 이어 5월에는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하는 ‘2009 한국의 경영자상’을 받았다. 12월2일에는 한국표준협회가 선정한 ‘2009 창조경영인상’을 수상했다. 3회째를 맞은 창조경영인상은 경영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게 주는 상.
“프랜차이즈 사업에서는 맛이 최고의 무기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몸집을 가볍게 해서 고객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칭기즈 칸식 경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요. 칭기즈 칸의 병사들은 최대한 가볍게 만든 전투장비와 생활방식으로 정복을 해나갔죠. 경량화와 속도의 힘을 발판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 실크로드를 낸 그들처럼,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맛과 근성을 담아 세계로 가는 ‘치킨로드’를 닦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