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순원의 시대정신은 인간주의와 자유주의에 가깝다.
- 리영희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와 진보주의에 기울어 있다.
- 자유를 중시하되 황순원은 ‘개인적 책임’을, 리영희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그동안 다양한 지식인이 쓴 책들을 읽고 그들의 삶을 지켜봐왔다. 이번 호에서 다룰 지식인들을 선정하는 데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을 골랐다. 황순원과 리영희가 그들이다.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도 없지 않을 듯싶다. 무엇보다 황순원과 리영희는 뚜렷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없는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고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작가를 한 사람 다루고 싶었는데, 황순원, 최인훈, 김수영, 고은 가운데 황순원을 선택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황순원, 최인훈, 김수영, 고은은 그 기여가 사뭇 다르다. 최인훈이 중도주의를, 김수영이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라면, 고은은 전통주의와 현대주의를 결합한 작가인 데 반해 황순원은 인간주의라 부를 수 있는 흐름을 대표한다.
이상주의에 가까운 인간주의
시대정신에서 인간주의란 모호한 말이다.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인간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순원의 인간주의는 독특하다. 내가 보기에 황순원의 작품에는 두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현실의 격류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의 구속을 벗어난 보편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황순원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전자보다는 후자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가 펼치는 인간주의는 현실주의보다 오히려 이상주의에 가깝다. 바로 이 점이 황순원을 다루고자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전공이 사회학이지만 철들기 시작한 이래 소설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한때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같은 리얼리즘 작가에 심취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포스트모던 소설가에 경도되기도 했다. 리얼리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모두 인간 문제를 다루기는 매한가지지만, 황순원의 문학에는 이러한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그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는 어떤 사조와도 무관했으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그 속에서 한국인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해왔다. 바로 이 점이 황순원을 다루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다.
황순원과 비교해 리영희는 사뭇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기자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지냈지만, 그의 사실상 전공은 국제정치학이다. 오랜 외신 기자 경험이 반영돼 있는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리영희는 냉전(冷戰)과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왔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해 그가 발표한 책과 글들은 이른바 운동권의 필독서이자, 1970년대 유신세대와 80년대 486세대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나 역시 그러한 정신적 자장 안에서 성장해왔다.
당대의 사회적 환경과 지식의 관계를 중시하는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리영희는 이례적인 사회과학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성역이던 냉전과 반공주의에 도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냉전분단체제에 맞서는 게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이었다면, 리영희는 연구와 저술로 그 최전선에 서 있었다. 둘째, 실천적 지식인의 경우 흔히 운동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지만, 리영희는 사회운동보다는 글과 책으로 진보 세력에 기여했다.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말과 글이 사회변동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그보다 더 강렬하게 보여준 지식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영희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다. 그는 외세 의존적 사상과 외교에 맞서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주적인 대응을 요구했으며, 군사독재에 맞서 언론의 자유와 인권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모더니티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진정한 현대주의자였다. 이념적으로 리영희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지만, 그가 소중히 생각한 것은 자유·평화·민주·민족 등과 같은 현대적 가치들이었다. 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온 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동안 이 기획에서 나는 원효의 불교사상과 최치원의 유학사상 이래 우리 역사에서 등장한 다양한 시대정신을 살펴봤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생태주의 등의 의미와 위상에 대해 검토했다. 이제 마지막 호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번 호에서는 시대정신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태도를 주목하고자 한다.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내용 못지않게 그 사상에 접근하는 태도 혹은 방법 또한 지식인에게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순원과 리영희는 지식인의 태도에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

1953년 11월 ‘협동’지에 ‘소녀’라는 제목으로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
황순원은 처음에는 시를 썼으나 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했다. ‘황순원 전집’의 순서는 단편, 장편, 시, 그리고 연구논문들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소설가 황순원을 거의 모두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소나기’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황순원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반영된 어떤 정신 또는 사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이 꼽힌다. 이 작품들은 그 제재가 각기 다르다. ‘카인의 후예’가 북한의 토지개혁을 주목한다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룬다. ‘일월’은 백정을 통해 소수자 문제와 존재의 고뇌를, 그리고 ‘움직이는 성’은 우리 한국인의 심성 구조를 살펴본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카인의 후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광장’ 등과 함께 선정된 이 소설은 광복 직후 북한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한다. 지주 아들인 박훈과 마름 출신인 도섭영감의 갈등, 그리고 박훈과 도섭영감의 딸인 오작녀의 사랑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 토지개혁의 진행과정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다양한 인물의 대응과 고뇌, 그리고 사랑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편소설 못지않게 황순원의 문학세계가 잘 드러난 것은 단편소설이다. ‘국민 단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소나기’를 위시해 ‘별’ ‘목넘이마을의 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