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환갑 지나 부활한 대배우여 부디 건강하시길!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1-10-19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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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시절 그는 야만적인 열기를 내뿜었다. 잘생긴 얼굴 어딘가에서,
    • 늘 뻔뻔스럽고 야비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짐승 비린내가 났다.
    • 중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마초였다. 마누라와 자식을 패는 것 외엔
    • 자존을 확인할 길이 없는, 뒷골목 넝마 같은 사내의 삶을
    • 그보다 더 잘 표현하는 배우는 없었다. 성격파 연기자의 설 자리가 좁은
    • 한국 영화계에서 조로했지만 2006년 ‘사생결단’으로 다시 일어난,
    • 그리고 2010년 ‘시’를 통해 오직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감으로
    • 건재를 알린 배우 김희라의 젊음을 추억한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김희라에게 제13회 파나마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1975년 영화 ‘마지막 포옹’의 한 장면.

    남들은 다 일하고 있을 대낮에 극장에서 시간을 죽이는 아저씨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인디언들의 신호처럼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스크린에서는 복수를 맹세한 김희라의 등에 문신이 새겨지고 있었다. 한 송이 두 송이, 붉은 목련이 피어나 김희라의 넓은 등판을 가득 메우자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고3 때인지, 재수할 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느 날. 나는 어느 변두리의 재개봉 극장 안에 있었다. 관객은 나를 포함해 서너 명밖에 없었다. 수험생이 공부는 안 하고 밝은 대낮에 극장 안에 있다는 약간의 불안감과 꼬박꼬박 액션 영화를 챙겨 보는 열혈 액션 영화광이기는 했지만 해가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 한국 액션 영화를 보러 왔다는 약간의 창피함으로 김희라·박근형 주연, 김효천 감독의 ‘오사카의 외로운 별’(1980)을 보고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영화를 보던 나는 넓은 등판에 붉은 꽃이 만개한 김희라의 압도적인 분노를 느끼는 경험을 하고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 깡패 김희라는 단검을 들고 조총련계 야쿠자의 소굴로 홀로 향한다. 사랑하는 여인 이경실을 뒤로하고 추운 겨울의 이른 아침 거리를 나선 것이다. 그는 살아서 이 거리에 돌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김희라. 인기척을 느낀다. 남자의 기침 소리. 누군가 김희라를 기다리고 있다. 박근형이다. 김희라가 존경하는 선배였던 그는 폐병에 걸려 이미 은퇴한 몸이지만 김희라의 복수에 목숨 걸고 동반을 자청한 것이다. 김희라가 천천히 다가오자 박근형은 그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걷는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씨야.” 두 사내가 마주 보고 미소 짓는다. 하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오사카의 외로운 별’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쏟아져 나온 일본 임협(任俠)물, 즉 야쿠자 영화의 줄거리에 재일조선인 깡패 주인공과 조총련의 대결을 입힌 짝퉁 야쿠자 영화였다. 하지만 서울 극장가에 성룡의 쿵푸 영화, 복성 시리즈, 미스터 부 시리즈 같은 홍콩 코미디 액션 영화와, 홍콩 영화를 무조건 베끼거나 닮으려 했던 짝퉁 한국 무술 영화 일색이던 시기, 포악한 사내들의 땀과 피가 흐르고 비릿한 짐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액션 영화였다.

    쓸모없는 사내의 못난 자존심



    지독한 남근 숭배자이며 반공주의자인 김효천 감독이 1975년 ‘협객 김두한’을 만든 후 칩거하다 5년 만에 김희라를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영화가 바로 ‘오사카의 외로운 별’이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나는 김희라의 팬이 돼버렸다. 비슷한 시기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을 봤다.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중랑천의 뚝방 동네 빈민촌.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아내 김보연이 벌어오는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다, 제 성질에 못 이겨 애 패고, 마누라 패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꼬장질’과 ‘깽판’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사내로 김희라가 출연한다. 애틋한 김보연과 그의 옛사랑 안성기가 꼬방동네에서 재회한다. 아내 김보연을 매일 구박하고 머리채를 잡아 패는데 그녀를 안성기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두려워하는 김희라. 한 평이 채 못 되는 좁은 판잣집 안에서 빨간 빤스 하나 걸치고 빈둥거리는 김희라는 내가 살던 모래내 천변의 그 아저씨들이었다. 술에 얼큰히 취하면 기분을 내며 동네 사람들 걱정도 해주고 그 동안 깽판 친 일들을 사과도 해서 흐뭇한 풍경을 연출하다가도 무엇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졌는지 일순간 폭력적으로 변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싸움질을 하고, 옹색한 집안 살림을 부수고, 집안 살림만큼이나 옹색한 마누라와 아이들을 패고, 마지막에는 파출소에 끌려가거나 달을 보고 대성통곡하거나, 흙 묻은 속옷 바람으로 길바닥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던 그 아저씨들을 김희라가 영화 속에서 연기해냈다. 1980년대 초, 10대의 마지막을 보내던 나는 김희라를 통해 조악하지만 낭만적이던 1960년대 깡패 영화의 마지막 스타가 연기한 자기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남성 판타지의 세계를 봤고,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 남성의 애환과 분노를 봤던 것이다.

    배우 김승호의 아들 김희라는 1969년 임권택 감독의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데뷔한다. 문희, 박노식 같은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출연한 첫 영화에서 신인 김희라는 두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이다. 그의 배우 데뷔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김희라 본인 입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충무로를 떠도는 ‘믿거나 말거나’의 수많은 전설 중 하나다. 김희라는 인터뷰에서 아버지 김승호의 49재가 있던 날 임권택 감독을 처음 만났고, 그의 제의로 영화에 출연했고, 하다보니 영화배우란 것이 해볼 만해서 계속 한 것이란 말을 한다. 임권택 감독의 말에 의하면 김희라에게 연기자의 길을 열어준 것은 연민 때문이었지만, 연기를 시켜보니 그는 다듬지 않은 보석이었고,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잘난 아들을 방치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거친 삶을 살게 한 배우 김승호에게 분노까지 느꼈다고 한다.

    부리부리한 눈, 두툼한 입술

    다른 하나는 조금 과장되고 극적이다. 어린 나이에 재혼한 아버지 집에서 뛰쳐나와 거지왕 김춘삼 패거리와 어울리며 거친 삶을 살던 김희라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박노식을 찾아간다. 박노식의 집 마당에 엎드려 연기를 가르쳐달라고 읍소하고 그에 감동한 박노식이 그를 거두어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인데 믿거나 말거나. 하여튼 23세의 혈기방장한데다 거친 거리 생활에 물들어 있던 김희라는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을 만나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임권택 감독, 박노식과의 인연은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며 ‘사나이 삼대’ ‘황야의 독수리’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같은 한국 액션 영화의 걸작을 탄생시킨다.

    1970년대 초 김희라가 출연한 액션 영화 중 그의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다. 김희라는 데뷔 초기부터 박노식이 나오는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 박노식이 사랑하는 아우 또는 박노식과 갈등을 겪는 아우였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에서도 김희라와 박노식의 관계는 형과 아우다. 그들은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명동거리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생활을 하다 깡패 두목 장동휘가 거둬줘서 한가족이 된 사이. 젊고 거칠 것 없는 무뢰한 김희라는 아버지로 모시는 두목 장동휘의 사랑이 언제나 형뻘인 박노식에게로 향하는 게 불만이다. 자신도 형처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못 참겠는 것은 장동휘가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외동딸 최지희가 박노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김희라도 최지희를 사랑한다. 최지희에게 사랑을 받는 박노식에게는 사랑하는 여인(문희)이 따로 있다. 이 모든 것이 김희라를 화나게 한다.

    조직에 일이 생기면 박노식을 견제해 앞장서지만 결국에는 박노식이 뒤에서 그를 봐주면서 자신의 실수를 해결해주는 것에도 화가 난다. 김희라는 박노식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로 몸부림치는 동생이다. 마치 ‘에덴의 동쪽’의 제임스 딘처럼. 김희라의 열등감과 질투, 박노식의 문희에 대한 눈먼 사랑. 그리고 짝사랑하던 박노식에게 실연당한 최지희. 이 세 사람의 애증은 그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그들의 파멸에 기름을 붓는 것은 바로 김희라의 야비한 배신이다.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 두툼한 입술을 부르르 떨며 김희라는 박노식을 증오한다. 실연당한 최지희에게 억지로 사랑을 얻어내지만.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체념한 최지희의 육체만을 얻어낸 것일 뿐. 영화의 라스트. 모든 이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 김희라는 한 팔을 잃고 복수에 나선 박노식과 대결을 한다. 박노식을 찌르려던 칼날을 돌려 자신의 배에 꽂고 죽어버리는 김희라. 비극의 씨앗을 뿌린 죄를 죽음으로 사죄하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영화 ‘시’로 제4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김희라가 팬들의 환호 속에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김희라의 열기는 윗세대인 최무룡, 김진규가 데뷔 초기에 보여준 젊음의 열기와 달랐다. 물론 신성일과도 달랐다. 그가 내뿜는 열기는 짐승의 비린내가 나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것이었다. 젊고 잘 생겼는데, 뻔뻔스럽고 야비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이런 멋진 캐릭터를 가진 김희라를 충무로가 가만 내버려둘 리 없었다. 박노식 하면 용팔이, 장동휘 하면 검은 장갑처럼 김희라에게도 별명이 필요했다. 드디어 그에게 왼손잡이라는 별칭이 부여된 영화가 등장한다. 이른바 왼손잡이 시리즈. 김두한과 그의 형제들의 신화를 다룬 영화 ‘팔도 사나이’로 흥행 감독이 된 김효천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주먹세계 묘사에 일가견이 있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협객이었던 김효천과 김희라는 서로 배포가 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첫 영화 ‘떠나가는 왼손잡이’(1969)는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박노식이 연기한 ‘상하이 박’ 캐릭터를 가져왔고, ‘왼손잡이’ 역시 박노식과 임권택 감독이 1년 전 ‘돌아온 왼손잡이’(1968)에서 만들어 낸 캐릭터였다. 두 번째 왼손잡이 시리즈 ‘마지막 왼손잡이’(1969)에서도 역시 김희라는 박노식과 교도소에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김희라는 젊은 혈기로 악당들을 제압해나가는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액션 배우의 세대가 바뀌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명동 잔혹사’(1972)가 바로 그것. 세 명의 감독이 세 명의 배우를 데리고 세 편의 에피소드로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왕년의 전설적인 주먹 박노식과 그를 죽이고 명동에서 이름을 날리려는 애송이 깡패 송재호가 등장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4·19 혁명 시대. 최무룡과 윤양하가 등장해 윤정희를 놓고 피의 혈투를 벌이다 몰사하는 비극적 라스트의 영화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김희라가 등장한다. 월남전에 참전한 것이라 추측되는 김희라가 제대해 군복을 입고 명동거리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미 조국은 경제개발과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새 시대. 김희라는 과거 깡패 짓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과거는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그가 꿈꾸는 새로운 삶은 과거에 그가 일했던 깡패 조직들의 음모와 배신으로 갈가리 찢기고, 김희라는 복수를 하고 파멸에 이르고 만다.

    1970년대 초 이 영화가 만들어질 때까지 김희라는 새로운 세대의 액션 스타였고 유망주였다. 이제 더 이상 임권택 감독과 박노식의 그늘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시기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1970년대 중반. 더 이상 깡패가 등장하는 액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액션 스타의 자리는 김희라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지만 주목받지 못하던 이대근이 혜성처럼 나타나 차지해버렸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젊은 시절 야만적인 액션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김희라.

    197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유형의 한국 깡패 영화가 탄생했는데, 전설적인 주먹들의 실명을 다룬 영화였다. ‘김두한 시리즈’ ‘시라소니’ ‘거지왕 김춘삼’ 등. 이 모든 영화의 주인공은 이대근이었다. 액션 영화 팬들은 이대근에게 몰렸다. 이대근이 연기한 깡패 캐릭터에는 김희라에게는 없는 유머가 있었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로 연기하는 김희라보다는 밝고 유머러스한 이대근이 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이소룡 영화의 광풍 때문에 한국 액션 영화는 모두 무술 영화가 차지해버렸다. 김희라는 박노식 세대의 배우로 인식됐고, 박노식·최무룡 같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한 배우들의 사라짐과 함께 그의 존재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등장해 김희라가 가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영화가 ‘신풍객’(1976)이다. 시대물과 액션 영화 시나리오에 일가견이 있던 작가 윤삼육은 당시 쏟아져 나오던 국적 불명의 한국 액션 영화를 뛰어넘는, 한국 사내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통 액션 영화를 만들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홍명회의 ‘임꺽정’에서 볼 수 있는 영웅호걸풍의 조선 왈짜패 캐릭터를 영화에 담으려 했고, 주연 자리는 김희라에게 돌아갔다.

    영화가 시작되면 기생의 치마폭에 휩싸여 먹고 자고, 술 마시고, 섹스하는 일에만 열심인 한심한 왈짜패 사내 김희라가 등장한다. 화류계 계집 품에서 노는 것이 사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소일거리라 킬킬거리며 말하지만,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상도 어느 곳에서 힘쓸 일, 즉 싸움질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동안 싸움질 안 하고 어떻게 참았는지 가지 말라고 우는 계집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이번에는 어떤 놈을 늘씬하게 패주나 희희낙락 길을 떠난다. 여자도 안다.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놀 때 그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란 것을.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오기만 바랄 뿐. 뭐 이 장사 한 두 번 해보고. 저런 사내 한두 번 겪어봤나 하는 감정을 젊은 날의 박원숙은 아주 능청스럽게 표현해낸다. 왈짜패 김희라가 찾아간 곳은 저기 경상도 어느 마을. 이 마을에는 옛 왕조 즉 신라왕의 왕릉이 많이 있는데 일본인 부자와 순사, 야쿠자들, 조선인 도굴꾼들이 신라의 유물을 마구 약탈해간다. 무법천지를 참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신라의 유물을 지키려 하는데, 일본 순사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인 부자들이 고용한 일본 야쿠자들의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고, 그들의 안하무인 행패 역시 마을 사람들을 참담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마을 사람들은 조선의 협객을 수소문하고, 의기가 있는 내로라하는 조선 협객들이 일본인 야쿠자와 대결하지만, 그들의 유도에 꼼짝 못하고 줄행랑을 놓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희라가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임을 자처하던 왈짜패에게 많이 속은 터라 행색이 초라한 김희라에게 눈길 한 번 안 준다. 마을에 나타난 김희라는 자신의 힘을 쓸 일에 너무 기뻐 방심하다 첫판에서 무참하게 얻어터진다. 첫 싸움에 졌지만 김희라의 얼굴은 매우 밝다. 한번 붙어볼 만한 놈들을 만난 것이 기뻐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황토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태어나길 싸움만으로 먹고살게 태어났는데 도무지 힘쓸 일이 없는 사내들. ‘신풍객’에서의 김희라는 소설 ‘황토기’ 속의 사내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비록 당시 창궐하던 홍콩제 무술 영화와 한국 태권도 영화, 이대근 주연의 실명 깡패 영화의 기세에 밀려 소문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선의 영웅호걸이 지닌 유유자적과 호탕함이 넘쳐나고 게다가 이런 곳밖에는 힘을 쓸 수 없는 나라 잃은 뛰어난 사내의 비애까지 표현한다. 김희라의 연기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이대근의 유머러스함을 가뿐하게 뛰어 넘는다. 지금까지 액션 영화에서 젊음의 분노와 어둠만을 연기하던 그가 유머러스한 캐릭터 연기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였다.

    부전자전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김희라의 아버지로 1950~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연기파 배우 김승호.

    1970년대 중반 이후 액션 영화에서 김희라를 더는 볼 수 없었다. 소위 정극이라 할 만한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그의 연기는 더욱 농익고, 깊이와 넓이가 더해졌다. 그리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웃음을 받던 액션 영화를 더 이상 연출하지 않는 임권택 감독과 다시 조우했다. 임권택 감독의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에서 김희라는 아주 인상적인 인민군 장교 역을 해낸다. 소년병들의 자살적인 죽음을 묵묵히 바라보는 인민군 포로였다. 라스트에 자신과 함께했던 소년병들이 모두 인민군 탱크를 향해 자폭하며 죽어버린 후 마지막으로 죽은 소년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그의 모습에는 전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짙게 배어 있다. 나이가 서른에 접어든 김희라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주로 악당 역할을 해내는데 그것이 모두 훌륭했다. ‘바람 불어 좋은날’ ‘장남’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같은 영화에서 김희라는 포주, 기둥서방, 건달, 생선장수 등 도시 변두리 빈민촌과 우범지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30대 남자를 연기해낸다. 그의 아버지가 1950년대 서민을 연기했던 것과 비교된다.

    김승호가 1965년 출연한 영화 ‘마포 사는 황부자’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자린고비인 새우젓 장사 김승호는 점심값이 아까워 골목 귀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팔다 상해버린 새우젓을 한 움큼 집어 먹는다. 짜고 비린 새우젓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점심 한 끼를 때우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슬펐다. 그에 비견되는 김희라의 작품은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빨간 빤스 하나 달랑 걸치고 중랑천 판잣집 안방에 앉아 의붓 자식과 화상을 입은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하루벌이를 하는 가난한 아내를 앞에 두고 밥을 먹는 김희라. 그의 빨간 빤스 속에는 아내 김보연이 날품팔이로 벌어온 돈이 감춰져 있다. 하하하. 자격지심 때문인지, 아니면 아내 김보연의 옛사랑 안성기가 아내를 빼앗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하여튼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초라한 밥상을 뒤집어엎고 난리를 치는 장면이다. 김승호는 점심을 새우젓으로 때워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다 신장염으로 죽기에 이르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를 원망하고 경원시한다. 김희라 역시 아내를 패고, 의붓 자식을 패고, 그들의 돌린 등을 보며 김치 쪼가리 하나를 놓고 밥을 먹다 제 분에 못 이겨 밥상을 뒤엎는 것이다. 아버지가 서민 연기의 대가였다면 아들은 빈민 연기의 제왕이었다.

    1980년, 배우 김희라는 인생 최고의 연기가 담긴 걸작에 출연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짝코’다. 처자식이 없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게다가 젊어서 함부로 굴린 몸뚱이가 비명을 지르는 비참한 인생들의 종착역. 노인 행려병자들이 수용된 갱생원에 젊어서 힘깨나 썼겠지만 지금은 당뇨를 비롯한 온갖 질병이 가득한 몸뚱이를 웅크리고 앉은 노인 김희라가 있다. 새로 들어온 신참 하나가 그를 유심히 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묻는다. “혹시 짝코 아냐?” 6·25전쟁 당시 악명 높던 공비 짝코와 그를 체포해 압송하다 놓쳐버린 전투경찰 최윤석의 만남이다. 짝코를 놓친 그날 이후, 전투경찰 최윤석의 인생은 망가져버렸다. 단란했던 가정도 짝코의 뒤를 쫓는 그의 집념 때문에 박살이 났다. 그는 아직도 짝코의 행방을 쫓아다니는 미친 노인네다. 짝코 김희라 역시 망가지기는 마찬가지. 공비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며 악귀처럼 굴었던 죄의 대가로 일생을 도망자의 신세로 어둠에 숨어서 살았던 것. 이 영화에서 짝코를 연기한 김희라는 구구절절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가 내뱉는 숨소리와 고통에 찬 한숨 하나하나가 최윤석의 손에서 도망친 이후 20여 년의 삶을 표현해낸다. 최윤석의 집념에 의해 다시 압송되는 짝코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화를 보는 나는 ‘인간이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조로와 부활

    1970년대 한국에는 영화 수입 쿼터제라는 이상한 악법이 있었다. 한국 영화를 몇 편 이상 만들거나 영화가 대종상을 수상하면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인데, 이 법은 영악한 영화제작자들이 한국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외국 영화 수입쿼터를 따기 위해 이미 촬영한 영화의 자투리 필름을 이용해 만든 ‘짝코’는 극장에 일주일도 걸리지 못하는 천대를 받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사이 한국 영화의 가장 드높은 경지 중 하나다. 김희라도 이 영화로 그의 연기 인생에 정점을 찍었지만, 역시 영화란 흥행이 돼야 하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야 권력과 영광을 얻는다. 세월이 지난 후 재평가돼 빛나는 별이 되었다 한들 이미 늦은 일이다. 이제 김희라는 더 이상 돈 되는 배우가 아니었다. 이후 그는 이런저런 영화에 조연 또는 단역으로 출연한다. 1980년대에 그가 출연한 영화는 거의 모두 인상적이지 않았다. ‘수탉’(1990)에서 달걀장수 김인문과 라이벌 관계이면서 그의 딸을 사모하는 중늙은이 달걀장수로 나온 김희라는 ‘역시 가난하고 볼품없는 도시 빈민 연기가 제격이야!’라는 감탄을 일으키지만, 그의 연기 인생은 이미 내리막이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사내의 슬픔과 분노 김희라
    오승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조소학 학사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 및 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


    1996년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실패한다. 그리고 허물어져 간다. 마치 영화 ‘짝코’의 주인공처럼. 2006년 그는 다시 일어선다. 영화 ‘사생결단’과 ‘시’에서 그의 연기는 말년의 말론 브랜도를 연상시키는 존재감이 있다. 대배우 김승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밥을 빌어먹는 거지와 양아치 생활을 거쳐 1960년대 말 영화배우로 데뷔하고, 대한민국의 배우 중 가난한 서민 역할을 제일 잘했던 아버지를 능가하는 빈민 사내 연기의 제왕이자 액션 배우였던 김희라. 60대에 들어선 김희라가 보여줄 또 다른 경지의 연기를 기대하는 것은 영화광의 입장에서 행복한 기다림이다. 부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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