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란한 역사와 지정학적 다양성 때문에 터키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지리적 상징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 터키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적 상징물이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Ataturk)다. 아타튀르크가 사랑했고, 아타튀르크만큼 터키 국민이 사랑하는 술이 ‘라키(raki)’다. 라키는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물과 섞어 마신다. 이때 화학반응으로 투명했던 술 색깔이 젖빛 흰색으로 변한다. 터키 사람들이 라키를 ‘사자의 젖(lion′s milk)’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동상.
오랜 이슬람 역사를 지닌 터키는 20세기 초 현재의 터키공화국으로 새 출발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 국가의 형태로 유럽식 제도를 채택했다. 물론 지금도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 신자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국교가 아니며 기독교 등 타 종교의 활동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다.
어쨌든 찬란했던 오랜 역사와 함께 그 지정학적 다양성 때문에 터키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지리적 상징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 터키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적 상징물이 하나 있다. 별칭인 아타튀르크(Ataturk)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바로 그 인물이다.
현대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는 그에 대해 전혀 몰랐던 일반 관광객들도 일단 터키에 발을 들이면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그 족적을 발견할 수 있다.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우선 터키의 ‘상징 도시’ 이스탄불의 관문인 국제공항 이름이 아타튀르크이며,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큰길 이름도 아타튀르크다. 이 길과 연결되어 골든혼(golden horn)을 가로질러 신시가지로 향하는 다리 이름 역시 아타튀르크다. 그런가 하면 신시가지 중심의 탁심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1938년 그가 사망한 장소였던 돌마바흐체 궁전에는 사망 시각인 9시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춘 시계가 걸려 있다. 이외에도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수도 앙카라의 아타튀르크 추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 여러 도시에서도 그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터키 국민이 자발적으로 아타튀르크라는 인물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끼고 있는 점이다. 이 때문에 터키 곳곳의 작은 상점에는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내걸려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타튀르크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쳐놓은 정도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이토록 광범위하게 터키 국민의 진심 어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아타튀르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1881~1938)는 1881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지금의 마케도니아 지역 살로니카에서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살로니카는 여러 인종이 같이 어울려 살던 번창한 도시였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국제 감각을 익힐 기회를 가졌다. 아타튀르크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 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에 그를 보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당시 터키의 관습대로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해 무스타파였다. 그런데 학교에서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그를 보고 담당 수학교사가 감탄해 완벽함을 뜻하는 터키어 ‘케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타튀르크 자신도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해 그 후부터는 무스타파 케말로 불렸다. 그런데 아들이 장사하기를 원하는 부모의 뜻과는 달리 군대에 관심이 있었던 아타튀르크는 이후 마케도니아의 군사 예비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있는 오토만 군사대학에 입학해 1905년 졸업했다.
그가 졸업할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한때 강성했던 위세를 잃고 유럽 변방의 힘 빠진 국가 취급을 받고 있을 때였다. 1453년 ‘정복왕’ 메흐멧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세계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그 후 2세기 이상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랍지역과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반도 국가들, 그리고 헝가리 지역까지 모두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그 기세를 몰아 1683년에는 서유럽의 관문인 오스트리아까지 진출해 일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이후에도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시대의 변혁에 뒤처지면서 점점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어쨌든 아타튀르크는 졸업과 함께 지금의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 제5군단에 초급장교로 배속된다. 이곳에서 그는 ‘조국과 자유’라는 이름의 개혁 성향 비밀 장교모임에 가입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전제왕정 제도에 대한 반감을 키운다. 1907년 마나스티르에 있는 제3군단으로 전속한 아타튀르크는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s)’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청년 투르크당은 당시 술탄이었던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정지된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체를 폐지하여 입헌군주제를 실현할 목적으로 1889년 대학과 사관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이었다. 이후 청년 투르크당은 1906년 통일진보위원회(CPU·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라는 공식적인 정당 단체를 만들어 실질적인 혁명 세력으로 등장했다. 1908년 술탄 정부가 발칸반도의 이권을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발칸반도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자, 청년 투르크당은 혁명을 일으켜 그해 6월24일 헌법을 부활시키며 의회제를 도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 혁명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는 중요 인물로서 점점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
‘청년 투르크당’ 가담해 술탄 전제왕정에 반기
이후 아타튀르크는 몇 군데 근무지를 옮겨 다닌 뒤 1911년 지금의 리비아 벵가지 지역(최근 리비아 사태에서 반군의 거점 도시로도 유명해진 곳)에 배속돼 이탈리아-터키 전쟁(Italo-Turkish War·1911~1912)에 참전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국내 통일을 이룬 힘을 바탕으로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그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리비아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아타튀르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활약을 보여 영관 장교로 진급한다. 그러나 터키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이탈리아의 위협과 함께 때마침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등 발칸 국가들이 동맹을 결성해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고 나서자 오스만 제국은 서둘러 이탈리아와 강화조약을 맺고 발칸반도 동맹국들과 대적하게 된다.
발칸전쟁(Balkan Wars·1912~1913)이 시작된 뒤 오스만 제국 군대는 주변 열강의 예상을 뒤엎고 계속 패전한다. 아타튀르크의 고향인 살로니카 역시 그리스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타튀르크의 모든 가족은 이스탄불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리아군은 수도 이스탄불에서 100㎞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해 오스만 제국을 곤경에 몰아넣었으나, 때마침 유행한 전염병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패전의 위기를 겨우 넘겼다. 아타튀르크가 리비아를 떠나 터키로 되돌아온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까지 적군에 잃어버린 조국의 현실에 비통해하며 갈리폴리 반도 지역 방위 책임자로서 공훈을 세우기도 했으나, 전세(戰勢)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1913년 5월30일 양측 간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영토를 발칸동맹 국가들에 양도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타튀르크는 지금의 불가리아 소피아에 사무실을 둔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역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1914년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연합군과 맞선다. 아타튀르크는 대령 계급으로 갈리폴리 반도의 로도스토(지금의 테키르다) 지역에서 5군 예하 제19사단 지휘를 맡는다. 그리고 1915년 4월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 프랑스, 앤잭(ANZAC·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 등 연합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하는 것을 격전 끝에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다. 양측에서 무려 30만명 이상 사상자가 나온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이 참으로 오랜만에 거둔 값진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그는 훌륭한 군사지휘관으로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다. 이때 그가 얻은 칭호인 ‘파샤’(지휘자란 뜻)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이때부터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이름보다는 케말 파샤로 불리게 된다. 갈리폴리 전투 지역은 지금도 터키의 주요 전적지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연합군의 갈리폴리 상륙 저지… ‘국민 영웅’ 부상
터키 현지인들은 멜론과 페타치즈, 견과류를 안주 삼아 ‘라키’를 즐겨 마신다.
1918년 7월 새로운 술탄이 된 메메드 6세는 불리한 전세를 돌리기 위해 아타튀르크를 다시 현역으로 복직시켜 팔레스타인 지역 방위를 담당하는 7군 사령관직을 맡게 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군에 급격히 기울어진 전세는 아타튀르크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 측의 승리로 끝이 나자, 독일 측에서 싸웠던 오스만 제국은 비참한 결과를 맞는다. 먼저 수도 이스탄불에 연합군이 진주하고, 곧이어 1919년 5월에는 그리스군에 의해 당시 터키 제2의 도시인 이즈미르까지 점거되자, 터키 국민 사이에는 ‘터키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함께 민족주의 정신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바탕 속에 결국 아타튀르크의 주도 아래 1919년부터 터키 독립전쟁(Turkish War of Independence·1919~1922)이 벌어진다.
아타튀르크의 1차 목표는 연합군에 대항해 확실한 터키 민족 저항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록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터키의 국외 점령 영토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국의 고유 영토만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겠다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였다. 터키 독립운동 과정에서 무능한 술탄 정부를 제치고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아타튀르크는 현재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근거를 두고 지지 세력을 모아나갔다.
1920년 아타튀르크는 앙카라를 기반으로 선거에 의해 새로운 터키 의회를 개설할 것을 주창하고, 이에 따라 그해 4월 ‘대국민회의(GNA·Grand National Assembly)’가 출범하게 된다. 대국민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아타튀르크는 같은 해 8월 술탄 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기존의 영토를 대폭 양도하는 ‘세브르 조약’을 강요당하자 곧 대국민회의 소속 군대를 결성한다. 대국민회의 군대는 이미 연합군의 꼭두각시가 된 구 술탄군대를 제치고 본격적인 터키 독립전쟁에 나서면서 서부 전선에서는 이즈미르로부터 진격해 오는 그리스군과, 동부 전선에서는 아르메니아군과 맞선다.
결국 2년간에 걸친 일련의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그리스군을 격퇴시킨 아타튀르크는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1922년 11월 술탄 제도를 폐지했다. 이듬해인 1923년 7월에는 연합국과 ‘대국민회의를 터키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로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과거 세브르 조약에 의해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0월29일 앙카라를 수도로 한 터키공화국 출범이 정식으로 선포됐다.
술탄 제도 없애고 1923년 터키공화국 출범 선포
아타튀르크는 같은 날 새로운 공화제 국가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193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5년 이상 이어진 재임 기간 아타튀르크는 신생 터키공화국을 기존의 이슬람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서구화된 국가로 변신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 경제 ,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당시 발전된 서구 사회를 모델로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일환으로 1925년에는 서양식 옷 착용이 권장되면서 이슬람 전통 복장이 폐지됐다. 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인 페즈(fez) 모자(터키 사람들이 애용하는 챙 없는 원통형 모자)를 봉건주의 상징물로 보고, 이 모자 착용을 금지하고 서양식 모자를 쓸 것을 권장했다. 그 자신도 스스로 유럽식 복장과 모자를 쓰고 다녔다. 여자들 역시 전통적 히잡 대신 서양식 옷을 입고 다니도록 했다. 1926년에는 새로운 민법이 제정되어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남녀평등권을 도입했고, 1930년에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1928년에는 종래의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를 약간 변형한 터키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고안됐다. 새로운 표기법 도입으로 일반 국민이 더 쉽게 터키어를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됐으며, 정부에서는 6~40세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교에 나가 새로운 알파벳을 익히게 했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 재임 기간에 터키 문맹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한편 아타튀르크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의 정책에 대한 반대 세력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신정부에서 일부 반대 인사들은 강제로 국외 추방되기도 했으며, 1925년에는 사회질서법을 발효시켜 체제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단체는 언제든지 폐쇄시킬 수 있도록 했다.
1937년 아타튀르크가 56세가 되던 해부터 그의 건강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해, 1938년 이스탄불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그의 병명은 간경변증이었다.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10일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5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 패배 후 풍전등화 신세인 터키를 국민의 단결된 지지를 바탕으로 살려낸 인물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그의 개혁 정책을 이슬람 정신을 손상하는 것으로 비난하기도 했지만, 국민 대부분은 이슬람이 민주주의와 공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그의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이 때문에 1934년 터키 국회는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란 경칭을 수여했다. 이후 이 이름은 그의 옛 이름과 함께 그를 상징하는 호칭이 되면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남았다.
그런데 아타튀르크 주도하에 현 터키공화국이 출범한 지 85주년이 된 2008년에는 터키에서 그의 일대기를 그린 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국민의 구설에 올랐다.
‘무스타파(Mustafa)’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는 터키의 유명 언론인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칸 뒨다르(Can Dundar·1961~)가 제작, 감독한 작품. 그런데 이 필름에서 뒨다르가 터키 국민으로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웅인 아타튀르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를 모독하는 것 자체를 범죄시하는 터키의 많은 사람은 이 필름을 보고 나서 뒨다르를 강력히 비난했다.
남녀평등권 도입, 터키어 표기법 도입…강력한 개혁 드라이브
이 필름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되었던 묘사는 그의 음주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아타튀르크는 앙카라의 집무실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매일 세 갑의 담배를 피우고, 병째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이 또한 아타튀르크를 호주가로 묘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 아타튀르크의 과도한 음주는 사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터키의 국민주로 불리는 ‘라키’라는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영화에서 마시는 술도 바로 이 술이다. 아타튀르크는 실제 종종 늦은 밤까지 그의 친한 친구들이나 각료들과 어울려 라키를 마시면서 세상사를 논하기도 했다. 개혁 정책 중 이슬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되어오던 금주법을 폐지한 것도 아타튀르크가 대단한 애주가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사망 원인인 간경변증도 음주와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정설로 알려져 있다. 아타튀르크가 즐겨 마신 술 라키는 알코올 도수가 매우 높은 독주로, 비록 물을 섞어 농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음용하면 그 자체로 몸에 상당히 부담이 될 수 있는 술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지만 터키의 국민주이자 아타튀르크가 즐겨 마셨던 라키는 어떤 술일까?
라키(raki·터키식 발음으로는 ‘라크’에 가깝다)는 포도주스를 1차 증류해 ‘수마’(suma)로 불리는 포도주정(grape alcohol)을 만들고, 이를 다시 아니스 열매(aniseed)와 함께 2차 증류해 만든 술이다. 포도주스는 건포도 또는 생포도에서 추출하는데, 아무래도 생포도로 만든 제품을 고급품으로 간주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포도주스를 짜고 난 포도 찌꺼기를 주로 이용했다. 당시 포도 찌꺼기 공급이 부족할 때는 외국에서 값싼 재료로 대량 생산한 주정을 수입해 라키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포도 대신 사탕무(sugar beet) 등으로 만든 주정을 사용하는 제품이 많다.
아니스 열매와 함께 2차 증류를 했기 때문에 강한 아니스 향이 나며 입안을 상큼하게 만드는 듯한 정갈한 맛으로 주로 식전주로 이용된다. 출시된 제품의 알코올 농도가 보통 45% 전후인 강한 술이다. 아니스는 이집트가 원산지인 미나리과의 한해살이풀로 유럽, 터키, 인도, 남미 등에 널리 분포, 재배되고 있는데, 지중해산이 특히 품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스의 열매는 독특한 향 때문에 향료로 사용되거나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빵이나 술의 재료로도 사용된다. 아니스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해 만든 술 라키는 더욱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 취항하고 있는 터키항공에서는 안내책자에 이 술을 라키라는 본명과 더불어 ‘터키 소주’라는 재미있는 별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포도주정과 아니스 열매 함께 증류한 ‘터키 소주’
역사적으로 보면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에서는 술에 대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9세기까지는 그리스인이나 알바니아인 등이 운용하던 메이한(meyhane·터키나 발칸반도 지역의 전통 식당 또는 바)에서 약간의 안주와 함께 와인을 제공한 정도였다. 이슬람 신자들도 이곳을 방문해 술을 마실 수는 있었지만, 간혹 단속에 적발되면 회교율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았다. 그러다가 탄자미트 개혁 시기(1839~1876)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비공식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키 같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 등장하며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19세기 말경에는 와인 소비량을 넘어서게 됐다.
사실 라키와 같이 아니스를 이용한 술은 인근 국가인 그리스의 우조(ouzo), 이탈리아의 삼부카(sambuca), 프랑스의 파스티스(pastis)와 같이 지중해 주변에서는 오래 전부터 광범위하게 제조해오던 술이다. 라키도 결국 이들 계열에 속하는 술로 이들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혹자는 라키라는 술 이름의 어원이 아랍에서 만들어진 술인 아락(araki, araka, ariki)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최초 라키는 아랍 쪽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고 새로운 터키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는 라키 생산을 국가에서 전매화했다. 1944년 이즈미르에 세운 공장에서 처음 제품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포도만을 원료로 사용했으나 사탕무 생산이 늘자 이것으로 만들어진 주정으로 라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라키 제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예니(Yeni) 라키’다. 이 제품은 현재 터키 내에서 가장 판매량이 많은 브랜드로, 웬만한 관광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주정을 사용했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예니(new)라고 붙였다. 알코올 농도는 45%.
‘라키’ 전매회사 민영화로 다양한 제품 쏟아져
라키 생산 전매회사인 테켈(Tekel)이 2004년 민영화되면서 라키 생산도 다변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출시되고 있는 제품도 점점 다양화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크통에서 일정 기간 숙성시킨 제품까지 생산되고 있다. 터키 국내외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인 예니 라키는 2004년 테켈의 민영화와 함께 다른 민간 회사(Mey Akol)로 넘어가 생산되고 있다. 또 같은 회사 제품으로 이스탄불의 인근 도시인 테키르다그(Tekirdag)의 지하수를 사용해 만드는 ‘테키르다그 라키’는 100% 생포도를 원료로 해 보다 격조 있는 향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제품은 현재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 면세점에서 최고급 라키로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라키 자체가 원래 비싼 술이 아니기 때문에 비싼 위스키나 코냑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이다.
라키는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도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음용 방법은 물과 직접 혼합해 마시는 것이다. 얼음을 같이 넣기도 한다. 이때 일종의 화학반응으로 알코올에 용해되어 있던 아니스의 ‘에센셜 오일(essential oils)’이 물과 반응해 침전되어 나오면서 투명했던 술 색깔이 젖빛 흰색으로 변한다. 이러한 현상에서 이 술의 유명한 별칭인 ‘사자의 젖(lion′s milk)’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윳빛 술을 사자의 젖으로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에서 용맹했던 옛 투르크족 전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자의 젖’을 시각적으로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도 길이가 긴 잔을 사용하는 게 좋다. 훨씬 운치가 있다.
터키 현지인들은 라키를 보통 메제(meze)라고 부르는 안주와 함께 즐긴다. 메제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빵과 함께 나오는 멜론과 흰색의 페타 치즈다. 그러나 요즈음은 서양식으로 특별한 안주 없이 물만 놓고 라키를 즐기거나 약간의 견과류와 함께 마시는 방법도 일반화되어 있다. 혹시 터키에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사자의 젖’을 맛보면서 터키를 이해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