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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바로세우기’ 나선 ‘진보당 조직부장’

‘태극기 바로세우기’ 나선 ‘진보당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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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든세 살의 전세룡 노인. 그는 역사에 묻힌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 뿐인 화석(化石)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혁신정치를 꿈꾸는 역동적인 청년(靑年)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지하철 7호선 청담역을 나와 영동대교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만만치 않은 세월을 이겨온 듯 보이는 남루한 외양의 4층짜리 타일건물 한 채가 들어앉아 있다. 그 건물 202호를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지키고 있는 이가 바로 건물 주인이자 서예가인 전세룡(全世龍)옹이다. 1918년생이니 금년으로 83세다.

‘그 연대기를 읽어서 지겨워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한 민초로 일관했다 해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여든 살을 넘게 살아왔다면 그가 누구든 ‘역사적인’ 인물이다. 식민시절, 광복 후의 혼란기,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극심한 가난, 동족 내부의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격변…. 그 공통의 환경으로 주어진 역사의 굽이굽이를, 그저 세월이 가자는 대로 등 떼밀려 흘러왔기로 어찌 순탄하기만 한 삶이었겠는가.v

진보당 사건에 연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원로 서예가의 서실(書室)답게 사위가 서예작품으로 빼곡히 둘러싸여 있는데, 책상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액자 속의 인물이 있다. 그 흑백사진의 주인공은 1959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이다. 전옹은 조봉암이 이끌었던 진보당의 중앙당 조직부장으로서, ‘간첩’ 혐의로 사형 당한 조봉암과 마지막까지 정치적 행로를 함께 했던 사람이다.

사건의 진실이야 어떻든 대한민국에서, ‘간첩이었던’ 사람의 사진을 반평생 동안 공개된 공간에 걸어두고도 여든이 넘게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옹은 참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왕년에 혁신정당 운동을 했던 사람답게 아직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는 (더러 발음이 엇갈려 알아 새기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으나), 무려 다섯 시간이 넘게 얘기를 쏟아놓고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에는 자리 파하기를 못내 아쉬워했다. 다만 진보당 사건 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해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것 빼고는 건강한 편이었다.



“여기다 이걸 매달아 놨어요. 화장실 갔다가 바지가 제때 안 열려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

바지 앞섶 지퍼 손잡이에 매달아서 바깥으로 꺼내 늘어뜨려 놓은 헝겊 끄나풀을 이상스레 여길까 봐 지레 먼저 설명을 하고 나섰다. 부인 정일례 여사(72)는 작심한 듯 42년 전, 남편이 유치장에 갇혔을 때 입었던 옥의(獄衣)와 감방에서 음식을 받아먹던 낡은 양철 밥그릇까지 가지고 나왔다. 이만하면 전옹의 고난의 삶을 증거해 줄 소품까지 갖춰진 셈이다.

“선생이 질문을 할 거요, 아니면 내가 알아서 얘기를 할까?”

나는 ‘둘 다 하자’고 했다. 우선 눈길 가는 쪽에 걸려 있는 휘호 한 점을 가리켰다.

―‘一民和通(일민화통)’이라는 저 작품에 담긴 속뜻을 설명해 주시죠.

“우리는 한 민족 아니오. 같은 민족끼리 전쟁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오가면서 서로 도와서 잘살자는 뜻입니다. 내가 97년부터 이 휘호를 써서 취지를 설명한 서한과 함께 국무총리, 대법원장, 통일부장관에게 보내왔어요. 얼마 전 임동원 장관이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더구먼.”

다른 말로 풀이하자면 평화통일을 하자는 얘긴데, 공공연히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관계자들을 잡아넣을 당시 적용한 혐의 중 하나가 바로 당 강령에 명시된 ‘평화통일론’이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정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정상이 악수를 하고 헤어진 가족들이 왕래하는 이 시기에도, 그에게 ‘평화통일’은 절절한 화두다.

―‘일필휘지’가 느껴지는데, 저런 서체를 뭐라고 부릅니까?

“비백체(飛白體)라는 거요. 종이에 붓을 대고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착 댔다 하면 그야말로 날아가듯 일필휘지를 하는 거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먹이 종이에 제대로 묻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글자에 흰 부분이 생겨나는 겁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칼을 휘두르듯 쓰는 필법이라 해서 비백체를 으뜸으로 치지요.”

―진보당 명예회복운동의 기초작업으로 진보당 동지회 결사사업을 추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보당이 해체된 지 40년이나 지났는데 왜 지금, 이제 와서, 그런 작업을 하십니까?

“후세를 위해서 역사를 옳게 세우자는 얘기요. 그때 대학생이던 사람들이 지금 환갑이 넘었어요. 더 머뭇거리다가는 진실을 얘기할 사람들이 사라져요. 왜 이제야 나섰냐고? 문민정부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고 있어서 운신을 할 수가 없었어요.”

―옛 당원 동지들이 얼마나 모였습니까?

“당시 각 도당(道黨) 당원이었던 사람들을 백방으로 탐지해보니 생존해 있는 사람이 70여 명 돼요. 연락이 닿아서 모인 사람들은 20명 남짓이고.”

―감회가 각별했겠습니다. 어떤 모습들을 하고 나타나던가요?

“슬픈 일이지. 내가 경비를 대줘야 서울 나들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들이 어려워요.”

―당시에 진보당이 지향했던 이념이나 노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민주적 방법으로 사회정의와 사회복지를 실현한다는, 바꿔 말해서 영국 노동당의 사촌쯤 되는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학적으로 ‘민주사회주의’ 정당입니다. 민주사회주의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는데 우리 진보당은 그중에서도 우파였어요.”

―생존해 있는 인사 중에, 진보당 시절에 지향했던 이념이나 정치철학에 비춰볼 때, 지금은 ‘동지’라고 부르기에 망설여지는 사람들도 있을 법한데요?

“나중에 독재 권력에 영합해서 세속적인 영화를 누린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그 어려운 때에 혁신운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포용해야 해요.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그 얘기 속에는 ‘적어도 나만은 혁신정당에 가담했던 당시의 순정(?)을 지켜왔다’는 자부가 배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연유로 진보당에 발을 들여놓았고 조봉암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을까? 그리고 우리 현대사에 아직까지 ‘상처’로 남아 있는 진보당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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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樂 <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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