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경기 등 수도권 주민과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 무대에선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 충격이 한 달도 안 돼 거의 잊혀졌지만, 충청권 상황은 정반대다. 대전역 광장 등 충청권 도처에선 시민들이 모여 연일 격한 발언을 쏟아낸다. “서울이 수도면, 지방은 하수도냐”는 자조섞인 불만에서부터 “영·호남이었다면 벌써 폭동이 났을 것”이라는 분노, “고속도로와 철도를 점거하자”는 과격한 선동까지 마구 쏟아져나온다.
충청 3단체장 동반 탈당 시나리오
대전에서 활동하는 청와대 민정2비서관 출신 박범계 변호사는 “위헌결정 이후 거의 혁명 전야 분위기다. 행정수도 이전 원상회복 요구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고 지역 분위기를 전한다. 지방분권을 외쳐온 지역의 진보적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자유총연맹, 새마을회 등 보수 성향 단체까지 목청을 높이고 있다. 지방분권국민운동 대전·충남·충북본부와 지역 시민단체, 기초 광역의회 관계자 200명이 시작한 ‘신행정수도건설 비상시국회의’는 300여개 단체가 참여한 비상기구로 확대됐다.
[가능성 하나] ‘충청당(黨)’의 출현
“신당 문제는 (충청권의) 원로들이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심대평 충남지사). “현 시점에서 지역 여론은 대체로 여야 모두를 비판하는 양비론이다. 그러나 소수지만 강력한 의견 중 하나는 한나라당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내게도 탈당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염홍철 대전시장).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120명의 한나라당 동료 의원에게 2007년 대선에서 당이 정권을 잡으려면 충청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해왔다. 충청 민심은 (지난해) 신행정수도 특별법을 통과시켜주고 이제 와서 헌재 판결로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한나라당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홍문표 한나라당 의원).
충청권 정치인들은 행정수도 이전 원상회복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소속 정당 구분 없이 협력하는 분위기다. 헌재 결정 다음날인 10월22일 한나라당 소속 염홍철 대전시장과 이원종 충북지사, 자민련 소속 심대평 충남지사가 긴급 회동해 “신행정수도 건설은 철회되거나 백지화돼서는 안 된다”며 공조를 다짐했고, 지금까지 시·도지사와 여야 정치인의 교차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은밀한 거래’가 시도되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다름아닌 ‘충청권 독자 신당(新黨)론’이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수도이전 무산이 한나라당에 대한 충청권 민심의 이반을 재촉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사정이 다르다. 한나라당은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에 사실상 ‘태클’을 걸었다는 이미지 때문에, 자민련은 충청권을 위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정치적 한계상황 때문에 구성원들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염홍철 대전시장은 최근 소속당인 한나라당을 겨냥해 “한나라당은 신행정수도 특별법이 통과된 뒤에도 명확한 당론 없이 애매하게 처신하다가 헌재 결정을 맞았다”며 한나라당의 우왕좌왕 행보를 비판했다. “나에게 탈당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심대평 지사의 행보도 관심거리다. 심 지사는 2006년에 임기가 끝나면 ‘3선 상한제’에 걸려 더는 지사선거에 출마할 수 없는 상황. 신당을 만들어 정치적 활로를 개척할 것이란 추측이 나돌던 터에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이 나 심 지사의 행보에 탄력이 붙은 셈. 최근들어 정치권에선 심 지사가 이원종 충북지사, 염홍철 대전시장에게 동반 탈당과 함께 ‘무소속 연대’를 구축하자고 은밀히 제안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대전에 근거지를 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한 변호사는 “일부 여론 주도층에서 여야 공동책임론을 주장하며 독자 신당론을 부추기고 있는 만큼 여당이나 야당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충청권 신당이 실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