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김대중 살릴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 이흥환·정광호 미국 KISON 연구위원

    입력2006-11-15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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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2000년 1월호에 이어 이번 호에 공개하는 미국무부 비밀전문은 카터 당시 미대통령이 김대중 현 대통령의 석방과 구명을 위해 박정희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김대중 대통령의 과거 성향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외에도 이 비밀전문에는 김일성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대화 내용, 북한이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을 일으킨 후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수뇌부의 비밀 회의록 전문,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과 윌리엄 포터 주한 미대사의 극비 면담록,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 야망을 미국무부에 알린 사실 등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이번호에 실린 미국무부의 비밀전문은 미국의 정보공개법(FOIA, Freedom of Imformation Act)에 따라 올해초부터 비밀해제되기 시작한 방대한 비밀문건 가운데에서 한국 정치 지도자과 관련된 자료이다. 이 자료는 한국 현대사 자료 발굴을 하고 있는 워싱턴 소재 비영리재단 인터내셔널 센터의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팀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 김대중 석방 및 구명에 관련된 미국의 압력 ]

    다음은 카터 행정부 때인 1977년 4월26일 미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가 김대중씨 석방건 등 당시 한미간 현안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국무장관에 전한 비망록 형식의 1급 비밀(Top Secret/Sensitive) 문서 전문이다. ‘김대중 석방’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2쪽 짜리 1급 비밀 문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원하는 조건을 미국이 받아들일 경우 김대중씨를 석방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고, 이 부분(본문 가운데 명조체)에는 카터 대통령이 직접 쓴 ‘그렇게 되면 좋겠다(will be glad to do so)’라는 자필 의견(notation)이 기록되어 있다.

    TOP SECRET/SENSITIVE

    1977년 4월26일



    비망록 수신자: 국무부 장관

    제목: 김대중 석방

    대통령의 의견(notation)이 첨가된 다음 문건은, 석방 조건(김대중씨 석방: 역주)으로 박(박정희 대통령: 역주)의 면목을 세워주라는(credit) 대통령의 의지가 나타나 있음. 슈나이더(Sneider) 주한 미 대사에게도 통보하는 것이 적절할 것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첨부: 문안 2번

    1급 비밀-Sensitive 1977년 4월26일

    인권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태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최근 슈나이더 주한 미 대사에게 박 대통령의 심경을 전한 바 있음. 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인권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바꾸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움. 김(김종필: 역주)에 따르면, 박(박정희: 역주)은 명동 사건 관련 구속자를 석방하는 것이 미국 압력 때문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음. 그렇게 되면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을 한층 더 강화시켜 ‘심각한 결과’를 야기할지도 모름.

    그러나 최근에 박을 면담한 전직 대사 함(함병춘 주미 대사: 역주)은 대통령이 명동 사건 문제에 대해 훨씬 유연해졌다고 전했음. 함은 또, 김(김대중: 역주)의 석방이 단지 미국이 압력을 가한 결과가 아니라 박 정권의 강고함(stre ngth)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방법을 서울이 찾을 수 있도록 미국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박은 김대중을 석방할 것이라고 주장했음.


    다음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내란죄로 구속 수감된 김대중씨의 구명을 위해 카터 대통령이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전문(2급 비밀, Secret)이다. 머스키 국무장관(Edmund S. Mus kie)은 카터의 친서 초안을 작성해 11월25일 백악관에 보냈고, 카터 대통령은 12월1일 외교적 관례를 감안해 자극적인 표현을 자제한 국무부의 이 초안을 직접 수정했다.

    카터는 이 수정본에서 김대중씨에 대한 형 선고 취소나 감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군사 경제적 측면에서 한미 관계가 나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김대중씨에 대한 감형을 ‘강력하게 권한다(urge)’는 이례적인 표현(국무부 초안에는 ‘희망한다(hope)’로 되어 있음)을 동원할 정도로 김대중씨 구명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카터 대통령은 또한 국무부의 초안 표지 오른쪽 상단에 만년필 글씨로 ‘JC’라는 자신의 약명과 함께 ‘오늘 12월1일, 발송할 것’이라는 지시 사항을 따로 적어놓았다.

    친서 가운데, 명조체는 카터 대통령이 직접 첨가해 넣은 부분이며, 괄호 안 내용은 원래 국무부 초안 사본에는 있었으나 카터 대통령이 삭제 또는 수정한 부분을 표시한 것이다. 카터 대통령은 국무부 초안 중 12행 정도를 삭제했는데, 이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경애하는 대통령 각하

    11월10일자 각하의 친서를 잘 받았습니다. 양국간 우의와 동맹 관계가 앞으로도 더 강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머지 않아 각하께서는 김대중씨에 대해 형(사형)을 집행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재판이 결정한 형량을 감형하거나 또는 형 취소 결정을 내릴 것인지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리시게 되리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번 서신에는 저의 사적인 견해를 담았습니다.

    각하께서 주지하시는 대로,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가 귀 정부와 상의한 이후 미 정부는 본 사건이 최근 몇 달 간 재판에 계류중인 관계로 이에 대해 섣부르게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국제 관계에서 심각한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미 양국의 중요한 안보 관계에 대한 미 국민의 지지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이미 위험 수위에 달했습니다. 한국 야당 지도자들이 말 한마디 못한 채 투옥되거나 정상적인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차기 미 행정부가 (내 후임자가) 양국의 긍정적인 협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리라고는 믿고 있으나, 김대중씨 같은 주요 정치인을 처형하는 것은 한미 양국의 군사적·경제적 관계를 근본부터 크게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향후 수개월 간 경제와 안보 면에서 양국의 상호 관심사를 같이 추구할 기회가 있습니다. 이 중대한 시점에(워싱턴의 새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시점에) 각하께서도 이런 일들이 위협받지 않기를(손상되지 않기를) 희망하시리라 믿습니다. (중략)

    각하의 지도력은 오직 화해와 관용을 통해서만 공고해지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각하는 김대중씨가 각하의 경쟁자가 아니며 김대중씨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따라서 각하께서 김대중씨에 대해 감형 조치를 취하실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런 결정은 오직 각하만이 하실 수 있는 결정이라는 것을 저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 이익과 한미 양국의 상호 관계를 위해, 저는 군사재판의 형 선고 취소나 감형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희망합니다).

    지미 카터


    [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미 측에 밝힌 초기 이력(1970년) ]

    김대중 의원이 신민당의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1970년 9월이다. 같은 해 12월17일 포터 주한 대사가 국무부에 전송한 ‘김대중 이력’ 보고서에는 다음 해(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점을 분석해놓은 부분이 들어 있다.

    선거에서의 잠재 취약점

    a. 초기 좌익 연루: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직후 좌파 정치에 연루되었음. 그러나 자세하게 들어가면 언론마다 보도 내용이 다름. 한 보고서에 의하면, 김은 1940년대 후반, 한때 친(親)공산주의자였던, 멤버들이 조직한 보도연맹에 대해 반(反) 공산주의 연설을 행한 바 있음. 이 점을 볼 때 김은 초기 한때 좌파에 경도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동시에 반공산주의로 빨리 넘어왔다는 사실도 지적해둠.

    10일 전 김대중은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자신의 초기 활동에 대해 말해준 바 있음. 이에 따르면, 해방 후 그는 약 6개월 간 좌익 신민당에 관계했으나 내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에 반대해 당을 떠났음. 김은 또 자신이 1946년 10월 목포 파출소 습격 사건에 참가했던 것으로 비난을 받고 있으나, 그는 그 사건이 일어난 날 장남을 출산하는 부인 옆에 같이 있었다고 주장했음.

    김은 또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1950년 목포가 공산주의 점령하에 있을 때 공산당에 의해 감금되어 있었으며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했음. 그는 공산당 패주로 구출되

    었음. 미 육군 정보참모부가 한국 정보 계통 관리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한국 정보 계통 인사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틀림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상황을 종합해볼 때, 초기에 좌익에 기울었다는 주장은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에게 잠재적인 위해가 될 수 있음. 그러나 최소한 박 대통령도 똑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이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각시킬 것 같지는 않음.

    b. 병역 미필 문제: 김대중의 출생 신고서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 시 그는 24세였으나 군에 징집되지 않았음. 김은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단순히 소집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징집 기피로 분류될 수는 없다고 함. 그러나 당시 부유층이나 유지급 가족의 자제가 병역 면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대중의 참모들이 준비한 김의 이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10월에는 ‘공민 해안경비대 전남 지부 부사령관’으로 되어 있음. 조사에 따르면 공민 해안 경비대는 지역 방위와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비공식적인 자원 단체임.


    [ 정일권이 본 김대중의 두 가지 문제 ]

    1971년 1월15일자 미 국무부의 비밀 대화 비망록은 3개월 후에 치러질 한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국무부 고위 관리들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국과 미 의회의 관계, 정일권의 방문 일정 가운데 하나인 미국 농업용 관개수로 시찰 및 세미나 참석 등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일권은 김대중 후보를 명석하고 활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함. 그러나 김은 두 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함. 1950년 한국전 때 김은 20세였으나 군 복무를 하지 않았음. 한국의 안전은 군에 의지하고 있음. “김이 어떻게 그들(군부)을 컨트롤하겠는가?” 더구나 김은 학자 같아서 이론과 원칙에만 치중하고 실제에는 취약함. “임금은 올리고 세금은 낮추면서 예산을 짜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가?” 한국은 ‘실무에 밝은 사람,’ 즉 박 대통령 같은 사람이 필요함. 정이 생각하기에 박 대통령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

    박 대통령이 한번만 더 임기를 채우면 한국은 북한에 대해 우위에 설 것이며 통일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임. 박 대통령의 통일관이 김대중보다 훨씬 나음. 박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침투 행위를 중단하라, 그러면 교류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김은 반대로 지금 북한에 서신왕래, 인적 교류 등 모든 것을 열겠다는 것이다.’


    정일권은 김대중 후보를 이렇게 평한 다음,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생각을 물어본다. 미국의 대답은 이렇다. “베스트 맨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다음은 1972년 11월3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대표간의 2차 회의에서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일성 수상이 만나 나눈 대화 내용 가운데 일부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같은 해 5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처음 김일성을 만났으며, 7월4일에는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사안을 협의하기 위한 11월2~4일의 평양 회담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외에 장기영 전부총리와 최규하 대통령특별보좌관이 동행했다.

    김일성-이후락 간의 이 대화 초록은 72년 11월9일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비밀 전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며, 이 비밀 전문은 최근 비밀 해제된 것을 KISON이 입수한 것이다. ‘11월 2~4일, 평양의 남북조절위원회 회동’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전문은 2급 비밀(Secret)로 분류되어 있으며 ‘배포 금지(NODIS, No Distribution)’라는 등급이 매겨져 있다.

    이 전문(A4 용지 5매 분량) 머리부분의 요약란에는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평양 조절위원회 회담 초록 사본을 주한 미 대사관에 제공해주었음”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후락과 북한 사람들의 회동, 특히 김일성과 회동은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기술되어 있음”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미 국무부의 이 전문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며, 평양 회의를 보는 하비브 주한 미 대사의 평가와 의견이 첨부되어 있다. 총 6개 항으로 되어 있는 이 전문은 첫번째 항에서 남북 대표들 간에 ‘연방제’를 놓고 현격한 의견 차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평양 회의의 본질적 측면은 토의에서 나타난 바 세 가지 단어(합작, 연방, 공동 보조: 역주)로 요약됨. 김일성과 북한 고위 관료들은 시종일관 연방(confed eration)으로 가기 위한 즉각적인 합작(협동 또는 합동 노력으로 번역될 수 있음)을 고집했으며, 이후락 일행은 공동 성명에 나타난 바 공동 보조(정치적 연합의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 공동 협조로 번역할 수 있음)라는 용어를 줄곧 주장했음.”

    11월3일 10시15분부터 13시50분까지 점심 식사를 겸해 이후락이 김일성을 만남

    A. 김일성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한국이 통일되리라고 믿지 않고 있으며 통일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면서 이후락에게 한국인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합작(coalition)을 위해 함께 뭉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인은 서로 다른 점을 조정해 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박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조절위원회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한다면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 지원을 받고 있지만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방위비 부담이 크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는 또 연방제가 되면 군사적인 노력과 군사 예산에 힘을 쏟는 대신 평화로운 산업 분야에서 협조해야 하며, 연방제 하에서는 양쪽이 있는 그대로의 사회 체제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락은 시종일관 양측은 서두르지 말아야 하며, ‘급격한 변화’보다는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락은 또 김일성의 연방제는 고려해볼 만하고 더 연구 검토해볼 만한 것이지만, 박 대통령의 제안은 통일로 가는 특정 단계가 성사되기 전에 ‘민족회의(national conference)’가 열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 이후락은 7·4 공동성명은 평화조약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B. 김일성은 단정지어 말하기를 북한이 분단 국가로 유엔에 가입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C. 김일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촉구했다. 이후락은 이에 대해 공동 협조가 잘 이행되고 조건이 성숙했을 때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대답했다. 대화중에 김일성은 박 대통령이 좋다면 자기 동생인 김영주를 12월이나 1월쯤 박 대통령에게 특사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대사관 노트: 한국 정부는 11월30일 아마도 김영주의 서울 방문과 관련된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음).

    D. 김일성은 국호를 ‘고려연방공화국’으로 새로 지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오래 전부터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를 개인적으로 제안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락이 박정희에게 그의 말을 전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E. 김일성은 또 오래 전부터 자신이 제안해온 10만명 수준의 상호 병력 감축을 되풀이 주장하면서 절감된 군비 예산은 경제와 정치 협력을 위한 공동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이 1980년의 통일을 제안했는데 그때가 되면 김일성은 70대가 되고 박 대통령은 67세나 68세가 되므로 두 사람은 나이가 너무 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후락은 박 대통령의 말은 늦어도 1980년까지는 통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응답했다.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은 김일성에게 통일이 얼마나 빨리 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은 만약 박 대통령이 동의만 하면 우리는 한 달 안에, 아니 하루만에라도 통일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북한의 동기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F. 김일성은 덧붙이기를, “솔직히 말해서 나는 통일된 조국의 수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내 철학 저술을 다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기는 누가 통치를 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통일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나는 통일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며 서두르지도 않는다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락은, 박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며, 공동의 노력이 통일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G. 이후락은 남쪽에서 공산주의자를 체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북에 와서 공산주의자와 협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이후락은 공산주의자와 제휴를 시도할 만큼 용감하기 때문에 그와 동행한 최규하나 장기영보다 더욱 믿음이 간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자신에게 영웅 칭호를 부여하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극구 사양했다.

    H. 김일성은, 남북조절위원회가 대화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공동의 노력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락은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의 철학도 김일성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김일성, 청와대 기습사건 사과

    다음은 1972년 11월20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하비브 주한 미 대사를 만나 당시 진행중이던 남북조절위원회의 진행 상황 및 향후 전망, 이후락 부장의 김일성에 대한 평가 등을 주제로 나눈 대화 내용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이후락과 하비브의 이 대화 내용은 1972년 11월22일 하비브 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2급 비밀(Secret) 전문(Telegram)에서 밝혀진 것이다.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토론(Discussion with ROK CIA Director Lee Hu-Rak on South/Nor th Developments)’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비밀 전문은 A4 용지 6장 분량이며 대통령, 국무장관, 임무 책임자 등 특수 인가자에게만 공급하도록 되어 있는 ‘배포 금지(NODIS, No Distribution),의 등급이 매겨져 있다.

    이 전문은 남북조절위원회의 평양 2차 회의(11월2~4일)가 끝나고 서울에서 열릴 3차 회의(11월30일)를 1주일 가량 앞둔 시점에 타전되었고, 남북한 정부가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한 정치 대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입을 통해 미국 측에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한 토론

    요약: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1월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기본 주장을 변경하거나 논의의 진행 속도를 가속하지도 않았다고 말했음. 소위원회가 열리게 되어 있긴 하지만 한국 정부가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가동하지 않을 것임. 그는 11월30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3차 남북조절위원회에서 특별한 진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음. 박 대통령과 김일성의 정상 회담은 가까운 시일 안에는 열리지 않을 것임. 평양은 남북 적십자 회담을 통한 인도적 분야의 진전에 진정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음.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지금 당장은 개정되지 않을 것임. 이후락은 남북 대화 및 외교 정책에 대한 한국 정부의 상황과 관련, 조율의 필요성을 인정했음.

    1. 1972년 11월20일, 한국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만나 한반도 내부 상황과 관련, 의견 교환에 따른 남북한 관계의 진전에 대해 토의했음.

    2. 이후락에게 11월2일부터 4일 사이에 열린 2차 남북조절위원회 기간에 북한을 방문하면서 느낀 일반적인 인상, 특히 김일성과 45분간에 걸쳐 개별 면담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음. 이후락은 이번 회담은 특별히 중요한 것은 없으며, 주로 이전의 토의 내용을 재검토했다고 했음. 김일성은 1968년 1월21일 발생한 청와대 습격 및 실패한 박 대통령 암살 기도를 설명하고 사과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 김일성은 재차 북한의 강경 분자들을 비난하고, 박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과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음.

    이후락은 평양 방문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을 아직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음. 그러나 그는 평양의 목표는 북한의 혁명 공작이 한국에 잘 먹혀드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 북한은 한국의 경계 태세가 늦춰지고 반공에 대한 수위가 약화되며 반공법이 개정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임.


    남북한 ‘시간 벌기’

    3. 김일성과 이후락은 경제 분야에 대해서도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음. 김일성은 특히 북한의 광물 자원에 대해 열을 올리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음. 이후락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본 북한 사람들에 따르면, 500만 명의 노동력 가운데 약 100만 명이 북한의 광물 자원 개발에 투입되어 있다는 것임. 이후락은 북한이 경제 자립을 시도하면서 노동력을 비경제적으로 분배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음. 이후락은 또 농업과 여러 방면의 제조업 분야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노동력이 전용되고 있다고 보았음. 김일성은 분명히 남북한의 경제 교류를 원하는 것 같았음.

    4. 한국이 남북조절위원회에 설치되어 있는 소위원회에서 경제 및 군사 교류를 추진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음. 북한은 남북한을 갈라놓고 있는 주요 현안들에 대해 토의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임. 이후락은 소위원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대답했음. 소위원회를 열기로 했지만 한국이 소위원회를 개최할 준비가 됐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가동되지 않을 것임. 한국은 북한이 재촉하는 현안들에 대해 토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주장을 완강하게 고수할 것임.

    한국이 진척시킬 수 있는 분야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후락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문화·스포츠·경제 교류가 가능하겠지만 소위원회 가동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답했음. 조절위원회가 적십자 회담의 진전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이후락은, 평양이 인도적 분야의 진척에 진정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음.

    5. 북한은 분단국으로는 유엔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김일성의 언급을 상기시키면서, 유엔 문제에 대한 많은 토의가 있었는지 물었음. 이후락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면서, 평양은 한국이 거부권 때문에 유엔에 가입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음. 이후락이 받은 인상으로는 김일성은 기본적으로 평화 공존의 기간, 즉 전쟁 없는 상태를 원한다는 것임.

    연방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이후락은, 연방제는 ‘생각할 수 없는(not thinkable)’ 것이라고 말했음. 김일성은 연합(federation)이나 연방(confederation)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백하게 공식화하지 못했음. 이후락은 김일성이 막중한 군사비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찾고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음.

    6. 평양이 촉구하는 큰 현안들을 한국이 회피하려 하기 때문에 남북 대화가 결렬될 가능성은 없느냐, 어떻게 대화를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했음. 이후락은 통일은 남북조절위원회라는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음. 이후락은 자유 사회와 공산 사회가 합쳐지기를 바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듭 말하면서, 그러나 남북한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다름아닌 시간벌기(buy time)라고 했음.

    한국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한 것임. 즉 서독이 동독의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남한이 북한의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임. 북한 역시 시간이 필요함.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 모순으로 남한이 취약해지고 혁명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임. 비록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남북 양측은 시간이 자기 편에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대화를 지속하게 될 것임. 하지만 한국은 평양이 채택하고자 하는 큰 현안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 한국 정부는 김일성 이후를 바라보고 있음.


    이후락 남북조절위원회 의장직 기대

    7. 2차 남북조절위원회는 진전 속도가 빨라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말하자 이에 대해 이후락은, 외견상 진전된 것 같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사실은 진척된 것이 없다고 말했음. 남북 양측은 자신들의 게임 계획(game plan)에 집착하고 있으며, 실제로는 어떠한 실질적인 양보도 하지 않고 있음. 이후락은 이전의 접근법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겉보기에 바뀐 듯 보이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전문가가 취하는 한 방편임.

    8. 이후락은 조절위원회가 1년에 최대한 5회 정도 개최될 것으로 생각하고 집행위원회는 좀더 자주 정기적으로 열릴 것으로 기대했음. 그는 남북조절위원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위원회는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가 북한의 ‘평화 공세(peace offensive)’를 무디게 만드는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임. 그는 조절위원회를 모든 남북 관계가 그쪽으로 통해야 하는 ‘통합된 창문(integrated window)’으로 묘사했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남북 관계 진전에 어떤 구실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조절위원회를 통해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음. 그는 11월30일의 3차 조절위원회는 평양의 2차 회의와 유사할 것으로 보고 특별한 진전은 기대하지 않았음. 11월23일부터 정홍진(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 역주)과 김덕현(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 역주)이 회의 의제와 합의서 초안 준비에 착수할 것임.

    박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되는 사안이긴 하지만, 이후락은 장기영이 3차 조절위원회의 의장 대행이 될 것으로 보았음. 그는 북한이 이 안에 반대해주고 결국에는 자신이 의장 자리를 유지하게 되기를 기대하고(expect) 있었음. 조절위의 다른 한국측 위원은 최규하, 정홍진, 강인록(전문에는 Kang In-Rok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강인덕의 잘못 표기인 것 같음: 역주)이 될 것임. 이후락은 평양이 소위원회 가동을 촉구할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할 의사가 없었음.

    9. 이후락은 박정희와 김일성 사이의 정상 회담은 가까운 장래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음. 그는 5년이나 10년 후 국제적 상황이 호전되거나, 한국 경제가 충분히 좋아졌을 때, 또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승인받는 것을 한국 정부가 막지 못할 경우에는 정상회담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음.

    약 5년 후에는 한국의 경제 상황이 북한 경제보다 우위를 점하게 될 것임. 그렇게 되면 김일성이나 그의 후계자는 남한을 접수하려는 그들의 희망을 포기할 것임. 현재 평양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심각한 퇴보를 겪게 될 것이며, 이 때문에 혁명적 상황이 야기될 것으로 믿고 있음. 따라서 현재는 정상회담에 적절한 시기가 아님.

    10. 한국 정부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개정할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음. 이후락은 자신이 개정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공개적으로 한 일이 있음을 상기시켰으나 지금 당장 시행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음. 한국 정부의 다른 지도자들도 개정에 호의적이지 않으며, 한국 국민도 자칫 이를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임. 국민들은 한국 정부가 북한에 너무 가깝게 접근하고 있으며 공산화가 가능할 정도로 개방하고 있다고 걱정할 것임. 이후락은 조심스럽게 나아갈 것이며 내부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음.

    그는 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두 가지 결의안이 통일을 위해 채택되기를 원했음. 첫째는 박 대통령에게 평화통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전권을 부여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북 교류에 생산적으로 종사하는 남한 국민들이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임.

    11. 이후락이 어려운 현안들에 대해 북한과 의견을 나누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현안들에 대한 토론은 이미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그에게 말해주었음. 본인은 한국 정부는 평양이 제기한 현안들을 놓고 계속 토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 아직까지는 한국 정부가 남북한 대화와 일반적인 외교 정책 간의 조율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이 여겨짐.

    예를 들면, 한국 정부의 대유엔 정책, 남북한 중 누가 국제적인 대표성을 갖느냐 하는 문제, 일본의 북한 접근에 대한 한국 정부의 견해 등임. 이후락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조율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음. 그는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가 북한을 승인하려는 것을 계속 저지할 것이라고 말했음. 그러나 이후락은 국제적 조류가 이런 노력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어려우리라는 것은 인정했음.

    12. 마지막으로 이후락은 북한의 강경파(har dliners)와 훨씬 현대화된 분파(more modern elements)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음. 그는 또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한국에 접근하는 자세에서 김일성은 좀더 온건한(more moderate)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반면에 북한 군부의 주류는 남북한 관계의 진전에 덜 호의적임.


    다음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8월18일, 판문점 사건이 보고된 후 최초로 미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의 비밀 회의록 전문이다. 이 회의록은 2급 비밀(Secret)로 분류되어 있으며, 국가안보회의의 지니 데이비스(Jeanne W. Davis)가 작성해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앞으로 보낸 비망록 형식으로 되어 있다.

    비밀: 1976년 8월18일

    수신: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주제: 1976년 8월18일 WSAG(Washington Special Actions Group) 회의록

    첨부 문건은 한국 사안 토의를 위해 1976년 8월18일 열린 워싱턴 특별대책반(WSAG)의 회의록임.

    워싱턴 특별대책반 회의

    1976년 8월18일

    시간 및 장소: 오후 3시47분/백악관 상황실

    주제: 한국

    참석자

    의장: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국무부: 찰스 로빈슨(Charles Robinson)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국방부: 윌리엄 클레멘츠(William Clements)

    모턴 아브라모위츠(Morton Abramowitz)

    합동참모부: 제임스 할러웨이 제독(Admiral James L. Holloway)

    윌리엄 스미스 중장(Lt. Gen. William Y. Smith)

    중앙정보국(CIA): ............................. (문서에서 삭제된 부분. CIA 국장 조지 부시를 포함해 CIA 간부 2명이 같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됨: 역주)

    국가안보회의:윌리엄 하일랜드(William G. Hyland)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

    마이클 혼블로우(Michael Hornblow)

    키신저: 실질적인 문제를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어젯밤 9시43분인데, 오늘 아침 9시까지도 보고를 받지 못했다.

    CIA: 우리 측 잘못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클레멘츠: CIA만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국방부와 국무부도 마찬가지로 이 채널을 통해 보고를 받지 못했다.

    하비브: 정보가 들어온 것은 어제 한밤중인데, 나도 오늘 아침에야 보고를 받았다.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늘 아침 8시30분이다.

    아브라모위츠: ISA도 오늘 아침 9시30분까지는 몰랐다.

    CIA: 작전 센터에서 상의가 있긴 했으나 아무도 상부에 경과 보고를 하지 않았다.

    키신저: 최근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또 있다. 마야구에즈 사건이다.

    하비브: 자정 12시1분에는 보고를 받았어야 한다. 보고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CIA: 작전 센터에서 서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긴 했으나 상부에는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키신저: CIA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각 부처가 상부에 보고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움직여줘야 한다. 브리핑을 시작하자. (CIA 브리핑 시작)

    키신저: 사진을 찍었는데, 왜 북한군 시체는 보이지 않는가?

    할러웨이: 스틸웰(미8군 사령관: 역주)은 북한군 사상자가 없다고 보고 있다.

    로빈슨: 북한이 이 사건에 대해 보도했는가?

    CIA: 그렇다. 그러나 사상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CIA 브리핑 마침)

    키신저: 남한의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CIA: 육군이 52만3000명, 제트 전투기가 280대, 순시정이 175대이고 잠수함은 없다. 우리 판단으로는 북한군의 군사 행동은 기습 공격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북한이 전면적인 공격을 할 마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본다.

    키신저: 누가 내게 남북 양쪽의 군사력을 비교 분석해줄 수 있겠는가?

    할러웨이: 북한 지상군의 타격력은 훌륭하지만, 한국군은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미군이 뒷받침하고 있다. 공군력 규모는 북한이 우세하지만, 한국 공군은 훨씬 훈련이 잘 되어 있다. 자신감이라는 요소도 감안해야 한다. 한국군은 미군이 버티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북한군 잠수함은 성능이 좋지 못하다. 남북한 양쪽의 군사력은 자신의 전략과 위치를 잘 뒷받침하도록 훌륭하게 짜여 있다. 내 판단으로 이것은 군사적 대결이다. 지금 당장 북한이 실제로 군사적인 침공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CIA: 미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가?

    CIA: 그것이 핵심이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 미군이다. 만약 주한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북한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놓이게 된다.


    몹쓸 놈의 나무 잘라버려야

    키신저: 대응 병력이 현장에 늦게 투입된 이유는 무엇인가?

    할러웨이: 스틸웰 장군이 그 점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다.

    키신저: 그는 분명히 사진을 촬영했다고 말했다. 나무 가지치기를 꼭 할 이유가 있었는가?

    할러웨이: 관측소와 전망대 사이 관측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차트에는 한곳만 표시가 되어 있다.

    클레멘츠: 지역 내 장애물 제거는 통로 확보 작전 아닌가?

    키신저: 조금 전에 내가 받은 전문을 보니까, 이 문제를 놓고 수도 없이 공방전이 오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하일랜드: 북한 쪽에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할러웨이: 스틸웰 장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원래 계획은 나무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북한이 안 된다고 하니까 우리는 가지치기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한 증언자의 말에 의하면, 북한군 장교 한 사람이 현장에 다가와 무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가지치기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북한군 장교는 “좋다”라고 대답까지 했다.

    하비브: 그 부분에 대한 보고에 약간 다른 점이 있다.

    키신저: 우리가 나무를 자르거나 가지치기를 하는데 왜 북한군이 이의를 제기하는가? 그럴 권리가 있는가?

    하비브: 그 지역 전체는 공동 경비 구역이다.

    키신저: 그러면, 만약 북한군이 나뭇가지를 치기로 결정했으면, 우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하비브: 아니다.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공동경비구역 내에는 각 측이 전용으로 맡고 있는 지역이 있다.

    키신저: 한쪽이 다른 쪽에 명령할 수 있는가?

    하비브: 서로 강요를 할 수는 없고, 말싸움을 자주 한다.

    키신저: 좋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두 명의 미군 장교가 맞아 죽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진행 과정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첫째 문제에 대해 나는 CIA의 분석에 동의한다.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공격이다. 우리가 전지 작업을 못하도록 막고자 했다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스틸웰이 이 편지를 김(김일성: 역주)에게 보내고 싶어한다. 왜 스틸웰이 김에게 이 편지를 보내야만 되는가? 무슨 뜻이 있는가?

    하비브: 스틸웰은 유엔사 사령관이고, 김은 북한군 사령관이다. 또 김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키신저: 이미 백악관과 국무부를 통해 이 살인 사건에 유감을 표하는 성명이 나갔다. 스틸웰의 성명이 왜 또 필요한가? 스틸웰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아브라모위츠: 없다. 워싱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키신저: 그 건은 잠시 보류하자. 오늘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얘기해야 한다. 뭔가 강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대통령도 느끼고 있지만, 그게 뭐가 될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다. 몇 주 전에 우리는 중국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에 B-52 훈련을 취소했다. 그 훈련을 재개할 수 있다. 둘째는 한국의 모든 군대에 비상을 발동하는 것이다.

    할러웨이: 데프콘 4에서 데프콘 3으로 갈 수도 있다.

    키신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할러웨이: 우리가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북한이 느끼기에 우리가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한, 북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키신저: 그런 조건에서라면 위협은 없는 것이다.

    아브라모위츠: 스틸웰은 전지 작업을 마무리하자고 건의한다.

    클레멘츠: 나도 동의한다. 그 몹쓸 놈의(the God damm thing) 나무를 잘라버려야 한다.

    키신저: 나도 찬성이다. 하지만, 군 동원 문제를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그 나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본다. 데프콘 발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할러웨이: 5는 평시이고 1은 전쟁이다. 2단계는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고, 총격전이 시작되면 1단계다.

    CIA: 올해는 선거가 있는 해다. 3단계로 올라가면 언론과 미 국민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키신저: 아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두 명의 미국인을 죽였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CIA: 북한은 지금 미국 내에서 또 하나의 베트남 식 심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조짐을 찾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그런 망상을 깨게 하려면 언론과 여론 형성층으로부터 적절한 지지 의사를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키신저: B-52 연습을 재개하는 것은 어떤가? 국무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연습 반대를 철회하겠다. 지금이 연습을 재개할 가장 좋은 기회다.

    하비브: 그건 훈련 연습이다.

    아브라모위츠: 미국이나 한국 국민이 겁에 질리지 않을까?

    글라이스틴: 다른 연습도 계획되어 있다.

    키신저: 하지만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클레멘츠: 그 연습에서 B-52기들이 한국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이 사실인가?

    할러웨이 : 그렇다.

    키신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스미스: 72시간이면 된다. 그보다 덜 걸릴 수도 있다.



    “실폭탄은 투하하지 않나”

    키신저: 빠를수록 좋다.

    클레멘츠: 실제 폭탄을 투하할 것인가?

    키신저: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면 그렇게 하고, 아니면 하지 않는다.

    클레멘츠: 내가 악역이 돼 묻겠다. 왜 실폭탄을 투하하지 않는가?

    키신저: 계획에 실폭탄 투하가 들어 있으면 그렇게 한다.

    클레멘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브라모위츠: 악몽 수준보다는 낮은 것이고, 실제 폭탄 세례는 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하비브: 비행기는 북한을 가까운 사정권 안에 둘 것이다. 거리는 가깝다.

    키신저: 좋다. 그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자, 이제는 가능한 조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조치에 대해서 내일 아침 8시에 다시 토의하기로 하자. 대통령은 1차적 군사 조치의 가능성을 알아보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가? 오늘 밤에 그것을 생각해봤으면 한다. 우리가 뭘 하든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한다.

    할러웨이 :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뢰를 부설할 수도 있고, 북한기를 게양한 선박이나 어선을 나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선 나포는 위엄 있는 행동이 아니다. 북한기를 달고 운항하는 상선은 34척인데, 우리 항구나 동맹국 항에는 기항하지 않는다. 그중 위치 확인이 가능한 것은 9척뿐이며 나머지 선박들은 북한 영해에 있는 것 같다. 한국군과 합동 군사 훈련을 하는 방법도 있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는데 최소한 4일이 걸린다. 병력은 항공모함으로 수송할 수 있다. 미드웨이 호는 48~72시간 사이에 도착할 수 있다. 현재는 야쿠스카(Yakuska)에 있다. 해안에 미사일을 발사할 수도 있다.

    키신저: 나는 그 나무를 잘라버리는 아이디어가 좋다고 본다. 먼저 우리 병력에 준비 태세를 시키고 나서 나무를 잘라버려야 한다. 또한 좀더 높은 단계의 비상을 걸어야 한다. 오늘 밤에 데프콘 3을 발령하고, 스틸웰로부터 나무 절단에 대한 계획을 받자. (할러웨이 제독에게) B-52 발진 준비를 할 수 있는가?

    할러웨이 : 물론이다.

    키신저: 스틸웰이 나무를 잘라버리는데 병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싶다.

    할러웨이 :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첫째는, 어느 시점에 증원병 투입을 중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로 볼 때, 우리가 병력을 움직이면 저쪽에서도 똑같이 병력을 움직였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점에서 중단할 것인가? 다음은 화기(무기: 역주) 사용 여부다. 최근 사건에서 양쪽이 모두 화기를 가지고 대치했으나 사용하지는 않았다.

    키신저: 만일 내가 얻어맞아 죽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면, 화기를 쓸 것이다.

    하비브: 그들은 뒤에서 공격을 당했고 방어할기회도 없었다

    할러웨이 : 우리 병력 대부분은 베트남 전 참전 용사들이었다. 교전 규칙을 위반하지도 않았는데 죽었다.


    “서해 섬들이 취약하다”

    하비브: 동원 병력 수에 대해서는 스틸웰이 잘 알 것이고, (?: 역주, 문자 해독 불가)을 위반하지 않고는 병력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교전이 벌어진다면 그 지역(비무장 지대: 역주) 밖에서 증원병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하일랜드: 꼭 그 부대를 증강시켜야만 하는가?

    하비브: 그 지역의 주력 부대는 한국군이다. 무엇이 필요한지는 스틸웰이 우리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키신저: 누가 한국과 상의할 건가?

    하비브: 스틸웰이다.

    하일랜드: 더 이상 편지 전달할 생각은 하지 말고 나무를 잘라버리는 계획을 준비하라고 스틸웰에게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하비브: 병력을 사전에 미리 배치해놓았다가, 동원이 필요할 경우 투입하면 된다.

    키신저: 병력을 충분히 가동함으로써, 저 미친 미국 놈들이 뭘 하는 것이냐, 선거가 있는 해에 뭘 하겠다는 것이냐 하고 북한이 의아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아브라모위츠: 한국에 미군을 증강 배치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키신저: 그것도 바람직하겠다.

    하비브: 북서쪽 섬들(백령도 등 서해 섬: 역주) 문제도 있다. 아주 취약한 지역이다.


    키신저: 우리 병력은 어떤가? 오늘 밤에 비상을 발동해야 한다. 그리고 또 훈련 연습도 준비해야 한다. 내일 아침에는 한국으로 이동할 미군 리스트를 제출해달라. F-111과 F-4의 이동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금요일 아침에 나무를 절단하러 들어갈 수 있다. 아무래도 F-4를 이동시키려면 지금 결정해야만 할 것이고, 내일은 F-111의 이동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스미스: 착수 시점으로부터 12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비브: 일본과도 상의해야 한다.

    키신저: 그렇게 하자. 진행해라.

    아브라모위츠: 공군 병력을 임시로 이동하는 것은 일본과 상의하지 않아도 된다.

    하비브: 일본에 조언(advise)만 하면 될 것이다.

    키신저: 대책반(working group)을 가동했으면 한다. 이 정도면 되겠는가?

    하비브: 충분하다. 국무부, 국방부, 합참, CIA의 대표가 필요할 것이다.

    키신저: 박(박정희: 역주)에게는 누가 통보할 건가?

    CIA: 대사와 스틸웰이 같이 가야 한다.

    글라이스틴: 이 얘기가 곧 알려질 텐데.

    키신저: 그렇겠지. 언론 발표문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 다 드러내면 안 된다. 사전에 계획된 살인이기 때문에 데프콘 3으로 간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클레멘츠: 유엔에도 통보해야 하는가?

    하비브: 안 해도 된다. 전에도 유엔 통보 없이 데프콘 3으로 간 적이 있다.

    할러웨이: 스틸웰은 합참의 명령을 받지 유엔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하비브: 내가 알기로는 합참에서 유엔에 통보하는 절차가 있다.

    키신저: 내일 아침 모임에는 모두가 준비된 자료를 가지고 와야 한다.

    아브라모위츠: 비상대권(War Powers Act, 전쟁권법으로도 번역됨: 역주)은 어떻게 되는가?

    키신저: 좋은 지적이다. 의회와 상의하려면 통합 단일 계획이 있어야만 한다.

    할러웨이: 찾아보자. 내가 여기 가지고 있다.

    하비브: 변호사들이 검토하면 된다.

    키신저: 좋다. 오늘 초저녁까지 우리는 다음 일을 해야 한다.

    1. 비상대권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2. 언론 발표문 - “사전 계획에 의해 미국 군인이 살해됐고 북한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예방책을 취한다.”

    3. 한국 및 일본과 상의한다.

    아브라모위츠: 북한의 동맹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는가?

    키신저: 잠시 후 5시에 중국인(중국 대표: 역주)과 만나기로 되어 있다.

    하비브: 북한은 이미 그들의 견해를 들고 나왔다. 오늘 밤 회동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회의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

    하일랜드: 제안 성명문은 그리 강한 것이 아니다.

    하비브: 회동 때 편지를 제출하지 말라고 스틸웰에게 말해야 한다.

    키신저: 내일 아침 8시 회의 때는 상황도가 있으면 좋겠다. 이동 가능성을 감안해 기동 부대에도 비상을 걸어놓아야 한다. 내일 초점을 맞출 사안은 아래 4가지다.

    1. 한국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는 문제

    2. 어떤 군사 행동을 취할 것인가.

    3. 가능한 외교적 조치. 누구에게 통보하고 브리핑할 것인가.

    4. 의회 대응 조치.

    오후 4시43분 회의 종료


    [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 면담록 극비 전문 ]

    주한 미군 철수 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닉슨 미 대통령이 공표한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에 군사 물자는 지원할 수 있어도 더 이상의 병력 지원은 없다’는 내용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 발효된 것은 70년 2월이다. 닉슨은 이미 69년 7월 괌에서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의 기본 개념을 밝힌 바 있다.

    당장 문제된 것이 주한 미군의 철수였다. 닉슨 독트린이 나온 직후부터 한미간에는 주한 미군 철수를 위한 비밀 교섭이 시작된다. 주한 미 지상군 2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을 철수시킨다는 것이 골격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미군 철수에는 반대라고 강경하게 밝혔다. 미국도 좀체 물러설 태세가 아니었다. 마침내 주한 미군 철수 건은 양국간 갈등으로 번졌다.

    70년 8월3일. 윌리엄 포터 대사가 미8군 사령관 마이클리스(Michaelis) 장군과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찾아간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한미 양측 모두 긴장한 분위기였다. 오후 4시30분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약 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포터 대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박 대통령 면담 내용을 국무부에 전송한다. 8월4일 오전 1시56분과, 2시24분, 7시5분 등 세 차례에 걸쳐 보낸 이 극비 전문은 총 8쪽 분량. 국가 안보에 직결된 사안인만큼 박 대통령과 포터 대사 사이에는 열띤 논쟁과 서로 밀고당기는 한판 신경전이 펼쳐졌다.

    1. 요약: 미군 감축에 대한 협조나 감축에 대한 합동 계획을 계속 완강하게 거부하던 박 대통령은 우리가 점점 더 압력을 넣자, 현재 진행중인 한국군 현대화 작업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런 계획을 시행하지 말 것을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나중에는 결국, 아직 현대화 작업 그룹의 중간 보고를 받지 못했으니 보고를 받을 때까지는 합동 계획에 대한 견해를 유보할 것이며, 보고를 받은 다음에 우리를 다시 만나겠다고 함으로써 처음의 주장을 약간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철군 문제를 제기하자, 말투가 거칠고 결심을 못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의 협조가 있든 없든 간에 미국의 결정은 그대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그에게 분명히 전달했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반복해 거론하면서 자주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는 호놀룰루에서 타진된 미국의 의사 표시를 모르고 있었다. 사전에 국무총리가 우리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 배석할 것이라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인터뷰 자리에 장관들이 배석하지 못하게 했으며, 통역자를 포함해 청와대 참모 2명만 참석시켰다.


    미군 감축 통보에 박정희 무릎 떨어

    2. 우리의 입장을 점검하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협조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라고 내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한미간에 철군에 대한 합동 계획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미 의회에서 현대화 문제를 호의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좋으며, 괜스레 문제를 복잡하거나 위태롭게 만들 필요는 없으므로 공개적인 논쟁이나 문제점은 최소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호놀룰루에서 우리가 제공한 해명 자료대로 하면 이 문제들을 잘 처리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며. 현대화에 대한 대화가 진행중인 만큼 그에 필요한 유익한 밑그림이 그려지리라 확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는 미군 감축에 대한 합동 계획으로 진전시킬 만하지 않은가?

    3. 박 대통령은 대답하기를 한국측 주장에는 변동이 없다고 했다. 그의 견해는 호놀룰루에서 미국에 전달된 바 있다.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협의의 성과물이 없고 한국 국민에게 안보에 대한 ‘보장’이 있기 전까지는 병력 감축 계획에 관한 한 어떠한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일이 선행되고 나면 합동 협의가 시작될 것이다. 미국의 상황은 이해하나, 어렵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이 더 어렵다. 한국 국민 100%가 미군 감축을 반대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만약 감축하려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협정(agreement)이 없는 한 감축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토의가 일반 대중을 안심시킬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 가서는 미군 감축을 얘기할 수 있다. 그때 가서 협정에 따라 규모나 시간, 조치 등을 토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보장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한국 정부가 감축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3A. 박 대통령의 이런 답변에 대해 나는 우리와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유감을 전달하면서, 미군 감축 논의에 따른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우리 계획은 이렇다. 불행하게도 한국 정부가 참여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 측이 단독으로 마련한 안이다. 1970년 12월까지 5000명을 감축하고, 1971년 3월까지는 8500명을 추가 감축하며, 1971년 6월30일까지 4900명의 병력을 추가로 감축하는 것이다. 통역하는 동안에 박 대통령은 스트레스를 받는지 눈을 감고 앉아서 무릎을 떨다가 커피를 시켰다.

    4. 박 대통령은 거듭 말하기를, 의회를 포함해 미국이 어려워하는 점을 잘 알고는 있지만 한국군 현대화와 관련해 쌍방이 받아들일 만한 결론이 없는 한 한국 정부는 대화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미국이 감축을 진행한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협조할 수는 없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한국 정부가 비협조적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결정이 나기에 앞서 한국 정부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또 한번 강조했다.

    5. 나는 우리가 합동해서 계획을 세우자고 한국 정부에 제안했을 당시에는 미군 감축에 대해 결정된 사안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국민 감정, 정책, 예산, 인적 자원 등을 고려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정부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계획 입안 과정에는 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합동 계획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병력 감축을 한 직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군 장비의 처분 같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이런 문제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일반 국민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한국 정부가 우리와 같이 계획을 짜고 입안하는 작업을 거절함으로써 그 장비를 다른 곳에 보내게 된다면, 그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장비 목록은 아주 대단하다. 예를 들면 수백 대의 탱크와, 한국 공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다른 장비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6. 일방적으로 선언만 해대던 분위기에서 좀더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박 대통령은 목록에는 단위 부대 장비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7. 나는 또 말하기를, 한국측의 생각이 전혀 접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계획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의 생각은 아주 유익할 것이다. 하지만 참여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마이클리스 장군이 이 문제의 군사적인 측면에 대해 답변할 것이다.

    8.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오히려 화를 내면서, 3월27일에 미국의 방침을 밝힌 최초의 공식 문건을 받고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는데도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은 유감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향후 몇 년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 문제를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내의 상황이 어려워 기다리기가 힘들다면 한국군이 침략을 저지할 만큼 강화되고 단독으로 안보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조건 하에서는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토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성실한 자세가 부족하고 한국의 요구 사항이 미국의 입장과 상충되어 절충점을 찾지 못하게 될까 봐 한국에서의 병력 감축을 반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계획대로 병력을 빼내간다면 주한 미군은 미국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했음.

    9. 이에 대해 나는 이런 모든 문제들이 결국은 신뢰의 문제에 귀착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한국군 현대화에 대해 최고위급에서 취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보장을 제공했으며, 한반도 안보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취한 것 이상의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의도와 언급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흥분한 박정희 대통령

    10. 박 대통령은 그때 내가 언급한 “불가능하다”는 단어를 딱 꼬집어냈는데, 내가 한국측의 추가적인 안보 보장을 미국이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만약 한국 정부가 조약(treaty) 이상의 어떤 언질(commitment)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조약의 한계를 넘어서는 언질은 불가능하다. 만약 한국 정부가 추가적 보장을 위해 조약의 재협상을 원한다면, 현 상황에는 그런 재협상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국의 견해다. 박 대통령은 그런 요구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국회 쪽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11. 박 대통령은 이어 말하기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믿음, 미국에 대한 한국의 믿음 등 양국 간에 신뢰와 믿음이 부족한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상호 방위 조약에 크게 의지하지는 않고 있다. 한국전이 터졌을 당시에 그런 방위 조약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적시에 아주 귀한 도움을 주었다. (이때 박 대통령은 약간 흥분했다.) 양측의 신뢰성 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은 1년 전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 을 할 때를 상기시켰다.

    1년 전 닉슨 대통령은 그의 독트린과 해외 미군 감축의 의도를 설명했다. 닉슨 대통령은 한국에는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미군이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언급은 실질적으로 공동 선언에 나타나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때에도 비치 장군(General Beach)은 서신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는 한 한국에서 미군이 빠져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때, 내가 뭔가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박 대통령을 바라보자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는 흥분한 상태였고, 나는 잠시 생각 끝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비서실장과 통역자가 있는 앞에서 박 대통령이 틀렸다고 고쳐주는 것보다는 일단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상대방이 잘못을 지적하려는 틈을 주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말이 빨라졌다. 이제 한국이 경제 발전과 자주 국방을 할 때가 왔다. 한국이 이제는 자립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략)

    15. 마이클리스 장군이 실질적인 장비와 자금 조달, 우선 순위, 훈련에 필요한 시간 등 한국군 현대화 위원회에서 토의하고 결정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설명했다.

    16. 마이클리스 장군과 나는 박 대통령이 지적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보장’을 충족시키기에는 정말 시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언급한 병력과 장비 감축은 곧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비를 싣고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우리는 다시 박 대통령에게 물었다.

    17. 박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다시 끼어들었다. 우리 얘기를 듣자니, 한국 대표는 감축 합동 계획에 가 앉아서 미국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라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한국 대표들은 우리와 만나야 하며, 부대와 장비 정렬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해야 하는데 한국 측의 아이디어를 알 수 없으니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18. 박 대통령은 감축에 대한 미 대변인 성명을 보니 미국 정부는 그대로 실시할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화 작업 토의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결과가 도출된다면 미군 감축에 대해 토론할 용의가 있으며 미국 측과도 만나겠다는 말이라고 했다. (중략)

    20. 박 대통령이 마이클리스 장군에게 자세한 감축 계획과 이미 승인된 사안의 윤곽을 알려달라면서, 부대 전체에 해당되는 것인지 부대 일부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마이클리스 장군은 차트를 보여주면서 주한 미군 철수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 설명했다.

    21. 그러자 박 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적인 계획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그때 내가 다시 나서서 한국 측이 우리와 같이 작업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유감스럽다, 불만스럽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박 대통령은, 미군이 비상시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그건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이번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면서 한국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중략)

    23. 나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박 대통령에게 우리의 견해를 밝힌 비공식 문건을 남겨놓았다.

    24. 박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 없이 한동안 앉아 있더니 입을 열었다.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중간보고를 아직 받지 못했다,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합동 계획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 보고를 받은 다음에 다시 만나자. 이에 대해 나는 곧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5. 박 대통령의 태도에서 느낀 것은 차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음. 인터뷰가 끝났을 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음. 작별 인사를 하고 대통령 집무실을 막 나서기 직전에 나는 다시 한번 돌아서서 박 대통령을 쳐다보았음. 박 대통령은 마이클리스 장군이 건넨 감축 승인 계획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음. 이상하기 짝이 없었음. 인터뷰 내내 박 대통령은 한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가 박정희의 승리로 돌아간 직후부터 정계에는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한 구상을 추진중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에도 총통제니 종신 대통령제니 하는 소리들이 공공연히 떠돌아다닌 탓이다. 오히려 영구 집권 구상 자체보다도 언제 어떤 방법을 동원해 그 구상을 실천에 옮기겠는가 하는 것이 화젯거리였다.

    시기는 예상보다 빨랐다. 4월 선거가 끝난 지 1년도 채 못된 그해 12월6일 박정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역시 명분은 국가의 안보, 즉 임박한 북한의 침략 위협에 대한 긴급 대처였다. 북한 위협론은 미국을 자극했다. 국무부는 그러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급박한 북한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은 비상사태 선포의 시기와 내용, 명분과 방법 등 시시콜콜한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비상사태 선포 나흘 전인 12월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하비브 대사에게 ‘박정희의 계획’을 일러준다.

    “박 대통령이 12월5일이 들어 있는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라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말해주었음. 이는 허둥거리며 말하길, 이 선언은 헌법상 법적인 의미에서의 비상 선언이라기보다는, 국가 안보에 대해서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훈계적인 선언이라고 함.”

    이후락은 비상사태 선포의 6가지 목적과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해가며 하비브 대사에게 설명을 해준다. 이후락의 설명을 듣고 난 하비브의 첫 질문은 “군대도 움직이느냐”는 것이었다.

    이: 군의 이동은 없다.

    하: 국민들이 꼭 필요한 조치라고 수긍하지 않으면 비상사태에 강하게 반발할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이번 비상사태 선포는 헌법상의 법적 조치가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해도 자동적으로 제한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계속되는 북한의 위협에 직면해 전면적인 비상사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자리에 위치시키려는 것이다.

    하: 이전에 내게 말하길, 가까운 장래에 북한이 침략해올 것이라는 조짐은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

    이: 변한 것은 없다. 침략 조짐은 없다.

    이후락은 비상사태 선포를 하비브에게 사전에 전달해주는 이 자리에서 남북간 비밀 접촉 사실도 통보한다.

    북한과 극비리에 진행중인 예비 비밀 접촉에 대해 통보해주고 싶다. 지금 진행중인 것은 고위급 접촉이 아니며, 북에서는 김덕현이 움직인다. 남한측 인사의 이름은 밝히고 싶지 않다.

    하비브가 이후락을 만난 이틀 후인 12월4일, 이번에는 김종필 국무총리의 특별보좌관인 한상국씨가 하비브를 찾아온다. 이를 하비브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어제(12월3일) 김종필 국무총리의 한상국 특별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호놀룰루로 떠나기 전에 김 총리와 점심을 같이 하거나 아니면 다른 시간에 만났으면 한다고 제안했음. 한이 오늘 아침 나를 만나러 왔음. 김 총리가 보내 왔다면서 한은 총리가 왜 나를 만날 수 없는지를 설명했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음.

    박 대통령이 12월5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예비 비상’이나 ‘준비상’ 사태를 선언할 계획인데, 헌법상 조치는 아님. 나의 질문에 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음. 비상 사태는 언론에 제한을 가하게 될 것인데, ‘규제’가 아닌 ‘설득’이 될 것임. 국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며, 군대 동원이나 군 이동도 없을 것임.

    김 총리는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에 호의적이지는 않으나 이런 비상 사태를 중지시키도록 대통령을 설득할 수도 없음. 그러나 가능한 한 이러한 상황이 빨리 종결되도록 노력할 것임.


    12월28일, 하비브 대사는 이후락 부장과 만나 점심을 같이 하면서 비상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 전인 12월27일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당이 단독으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는 법안을 처리한 날이었다. 야당은 비상사태 선언 철회와 국가보위법 무효화를 주장하면서 정치 공세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이었다. 하비브 대사는 이후락 부장을 만나자마자 박 대통령의 권한 남용 가능성을 거론한다. 이후락 부장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비상대권을 사용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비브는 또 국회와 언론, 개인의 자유 등에 관련된 문제점 등을 지적하면서 미국측의 우려를 전달하고, 이 비상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를 묻는다.

    “무한정이다.”

    이후락의 대답이었다.

    72년 1월. 이번에는 워싱턴에서 한국의 비상사태 문제가 쟁점이 된다. 국무부의 마샬 그린 차관보가 김동조 주미 대사를 만난다. 국무부는 1월3일 두 사람의 회동에서 논의된 내용을 비밀 전문에 담아 서울의 하비브 대사 앞으로 보낸다.

    나는 북한의 침략이 급박하다는 김 대사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국민에게 그런 위협을 자주 쓰게 되면 한국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도발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음. 더구나 이러한 상황은 미 국민과 의회의 한국 정부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킬 수도 있음. 존슨 차관도 김 대사에게 이와 유사한 언급을 했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국무부의 윌리엄 번디 차관보를 만나 박 정권의 대통령 간접 선거제를 언급하면서 10월유신의 정변을 시사한 4개월 후인 72년 8월. 당시 민주공화당의 신임 당 의장 정일권은 하비브 주한 미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번 임기 후에도 한국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으려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박 대통령의 영구집권 야망을 기정 사실화한다.

    하비브는 정일권에게서 들은 내용을 국무부에 타전한다. 역시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72년 8월22일자 비밀 전문인데, ‘국내 정치 상황’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8월22일 내게 전한 내용임. A. 박정희 대통령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현 임기가 끝난 후에도 대통령으로 있으려 한다. 이 점은 정이 박 대통령과의 비공식 대화를 통해 얻은 명백한 결론이다.

    B. 네 번째 임기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은 아직 아무런 지침도 내리지 않았으며 결정된 바도 없다. 당과 청와대 그룹들이 이 사안을 놓고 연구중이며 대안을 고려하고 있다. 정은 나름대로 국민의 동의를 얻는 선거나 국민투표 같은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은, 몇몇 자문가(이름은 밝히지 않음)의 반대 의견을 듣고는 있으나 박 대통령 자신은 선거 절차 유지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C. 정은 방법이나 과정에 대한 결정이 내년 초쯤에 내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은 8·3 경제조치의 성패 여부가 대통령의 권력 유지를 국민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보았다.


    정일권은 이 비밀 전문에서 10월 유신이 73년 초쯤 단행될 거라고 예견했으나 이는 정확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선거 절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거나 국민투표의 형태를 거쳐 네 번째 임기를 확보하려 한다는 분석은 적중했다.

    사실상 정일권은 유신 개헌 작업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의 10월 유신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72년 5월 초다. 유신 헌법의 제정과 개헌 방법, 발표 시기에서 발표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모든 작업은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별실에서 비밀리에 약 5개월간 진행되었다. 정일권이 ‘아직 박 대통령이 아무런 지침도 내리지 않았으며, 결정된 바도 없다’고 하비브에게 말한 것을 보면 당시 정일권이 철저하게 유신 작업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유신의 사전 작업을 추진한 사람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이었다. 홍성철, 유혁인, 김성진씨 등 청와대 비서관들과 신직수 법무장관이 실무 작업을 맡았고 한태현, 갈봉근 교수 등 헌법학자들도 극비리에 궁정동 별실을 드나들었다.

    [ 김종필, 하루 전에 하비브에게 10월유신 통보 ]

    주한 미 대사 하비브는 10월유신이 터지기 하루 전인 10월16일, 두 차례에 나누어 총 12장 분량인 장문의 비밀 전문을 국무부 장관에게 타전한다. ‘한국의 비상계엄령 선포와 정부 변화 계획’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비밀 전문은 서울에서 주일 미국 대사에게도 동시에 전송되었으며, 국무부는 전문 입수 후 즉각 미 국방장관과 하와이의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에게 전송했다. 다음은 이 전문의 앞머리이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10월16일 18:00시에 10월17일 19:00시를 기해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고 통보함. 동시에 한국 정부는 현행 헌법에 대한 주요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이며, 이를 통해 대대적인 정부 구조 개편 작업을 실시할 것임. 계엄령 발효와 더불어 국회는 해산될 것이며, 정치 활동도 중단됨. 10월27일 헌법 개정안이 공고되고, 이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11월17일 실시될 것임. 개정안의 아주 구체적인 사안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선거단 구성이 포함될 것임.’


    하비브 대사는 두 번째 전문에 김종필 총리로부터 계엄령 선포를 통보받는 과정을 간략하게 적었다.

    10월16일 18:00시에 김 총리 사무실을 방문했음.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면서, 계엄령 선포를 통보했음. 김 총리는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미국 측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라고 믿어 24시간 전에 통보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하비브 대사는 또한 같은 날 세 번째 전문에서 비상계엄 선포와 정부 조직 개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박이 선택한 것을 수시간 내에 되돌려놓는 일이 미국의 의무일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박은 대미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는 또 덧붙이기를 ‘우리는 벌어진 상황에 매우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며, 언론에는 한국의 비상계엄은 한국의 국내 문제이며 미국과는 사전 협의나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적었다.

    [ 김종필이 하비브에게 전달한 박정희의 영구집권 야망 ]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72년 10월17일자 비밀 전문은 박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에 대한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견해를 정리해 놓고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계엄령을 추진하는 과정에 김종필 국무총리 등 5·16 주체 세력과 정일권씨 등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핵심 측근들을 동원해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 비밀 전문에서도 그때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비밀 전문에 따르면 김종필 총리는 자신이 박 대통령의 조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개인 비서를 통해 미국에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박 대통령이 이미 영구집권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하비브 대사와 김 총리의 개인비서인 한상국씨 사이의 비밀 대화록 전문(全文)이다. 하비브 대사가 한상국씨와 11년 동안이나 접촉하고 있었다는 전문 내용으로 보아, 미 국무부는 이미 5·16 직후부터 줄곧 5·16의 핵심 주체인 김종필 총리와 대화 통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김종필 국무총리의 개인 비서인 한상국이 비상계엄령 선포에 관련된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한을 11년 동안 알고 지냈으며, 핵심을 묻는 내 질문에 늘 솔직하게 대답해 주곤 했다. 어제 저녁 김종필 총리가 내게 대충 (정부 개편에 대한) 계획을 말해주긴 했는데, 김 총리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은 내 앞으로 머리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김 총리는 비상계엄령에 반대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고 속삭였다. 한에 의하면, 김 총리가 이번 문제와 관련해 사임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번 일은 1971년의 3선 개헌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김 총리는 대통령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으로 믿으나 그로서는 중단시킬 방법이 없다.

    2. 국무총리나 다른 사람들이 대통령의 결정을 반대한다고 조언했느냐고 물었다. 한은, 모든 계획은 한 달 전쯤에 중앙정보부에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했다. 김 총리와 정일권이 통보를 받긴 했으나 대통령의 결심은 이미 굳은 상태였고 총리도 중요한 수정없이 그 안을 받아들였다. 김 총리는 자기 혼자로는 대세를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으로 이번 일이 내포하는 뜻은 대통령이 평생 동안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3. 한은 또 말하기를 김 총리는 오늘도 박 대통령에게 의견을 전했으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가 질문했던 점을 계엄령에 반영해 개정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4. 한은, 김 총리가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지만 박 대통령의 야망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미국이 이번 일을 반대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김 총리가 지금까지 일이 진척된 대로 계속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한은 김 총리는 찬성하지는 않지만 따라갈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5. 정보원의 신원을 밝히지 않길 바람.


    70년대 초는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도 획기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시기다. 남북 적십자 회담이 지지부진 진행되는 와중에 남북한의 밀사가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했고, 7·4남북공동 성명이 나왔으며, 박 대통령의 6·23선언이 한국 외교사에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특히 남북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이다.

    박정희 정권은 툭하면 북한의 남침 위협을 거론했고, 국내 정치에 유효 적절하게 써먹을 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곤 했다. 북한의 남침 위협이 있다는 것을 사실로 확인 또는 동의해주거나, 그렇게 못하겠으면 최소한 남침 위협이 없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때마다 곤혹스러워했다. 때로는 못 이기는 체 눈을 감기도 했고, 때로는 타일러가며 다독거렸고, 때로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10·26으로 박 정권이 종말을 맞기까지 18년 동안 미 국무부의 비밀 문건은 이런 문제를 수도 없이 거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도 역시 북한 위협론이 거론되어 있다. 미 국무부는 박 대통령의 이 친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또 북한 위협론을 과장하고 있음. 우리측 정보 판단으로는 현재 그런 조짐이 없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에 아무런 대꾸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됨. 그럼에도 박 대통령 쪽에서 반복해 이 문제를 거론할 경우, (미국) 언론 등을 통해 직접 (북한 위협론에 대한) 우리 측의 판단을 대중에게 알리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음.


    국무부 비밀 문건 끝에는, 김동조 대사가 국무장관을 만나기에 앞서 그린 차관보, 레너드 한국과장과 나눈 대화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면서 남북 관계를 주도해가는 국내 주요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을 지적해놓은 부분이 있다.

    국무장관 면담에 앞서 대기실에서 김동조 대사는 그린과 레너드에게 남북한 관계와 관련, 청와대에서 있었던 내부 토론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었음. 김에 의하면, 남북 문제를 주제로 한 청와대 참모들의 내부 회의(inner council)에는 이후락, 김종필, 김용식, 이동원, 최규하 등이 참석했음. 김은 참석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음. 매파: 이동원과 최규하. 비둘기파: 이후락과 김용식, 중간파이긴 하지만 매파에 가까운 사람: 김종필.


    [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이 마련한 덕소별장의 6인 극비 회동 ]

    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71년 7월9일, 서울의 포터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9장 짜리 비밀 전문은 여타 비밀 문서와는 달리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이 포터 대사의 이름으로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대중 이철승 김영삼씨 등을 덕소 별장으로 초대했을 때 일어난 일들을 포터 대사가 자신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다. 마치 한편의 수필 같은 포터 대사의 글솜씨가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이 비밀 전문을 옮긴 것이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고뇌에 대해 한번 언급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의 선거 보도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들과 중앙정보부가 동시에 동아일보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물론 학생들의 위협이 덜하긴 했지만, 동아일보 발행인 집안이 고려대학교에 지원금을 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학생들이 동아일보를 위협했던 것은 더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해달라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동아일보는 공정 보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언론이며, 따라서 발행인인 김상만씨가 선거 이후 중앙정보부와 빚게 될지도 모를 마찰을 예방해보려는 것은 수긍과 동정이 충분히 가는 일이다.

    선거가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발행인이 편집국장을 통해 그의 걱정거리를 내게 전해왔다. 정부는 편집국장을 교체하라고 자신에게 압력을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내가 의아해하자,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서 예를 들어주었다. 그의 메시지를 내게 전달해준 바로 그 편집국장이 사실은 이보다 덜 심각한 이유 때문으로 2년이나 런던에 쫓겨가 있었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이런 일로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가 꼭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선거도 끝나고 해서 서울 근교에 있는 발행인 별장에서 작은 모임을 하나 마련했는데 혹시 내가 참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상만 사장은 그 모임에 몇몇 정치인을 초대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내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편집국장이 명단을 꺼내놓았다.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대중, 이철승, 김영삼,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 2명

    아하,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다. 멋진 파티가 되겠는데. 당신 보스는 정말 기가 막힌 사람이다. 국회가 열리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서로 상대방 선거 운동을 비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 초대를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발행인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편집국장은 이해해 줄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손님들에게는 내가 초대하는 것으로 알리겠으며 각자에게 다른 손님들 명단도 다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한국인을 이해하신다면” 이 파티의 참석률은 분명히 100%일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씨는 자동차 사고 후에 아직도 병원에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편집국장은 그도 올 것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후락씨가 온다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중앙정보부의 부장님이신데.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나요? 그럼요. 편집국장의 대답이었다. 그러면, 이후락씨가 전에도 김 사장의 별장에 갔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올 겁니다. 그런 걸 좋아할 겁니다. 부인들도 초대하나요? 물론 아니지요. 한국 남자들은 부인들이 옆에 있으면 마음놓고 쉬지를 못합니다. 어-어? 그렇다면 이 소모임은 결국 ‘미국’ 대사가 만드는 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만약, 이후락씨가 참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선거 기간에 당신이 쓴 사설 때문에 동아일보가 매질을 당하지는 않게 된다는 걸 뜻하는군요. 사장님 생각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지요.

    나는 동아일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선 나는 김상만 발행인을 좋아했고 또 하나는 한국인의 심리전이 펼쳐지는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파티는 취소되는 것인가요? 전부 오겠다고 할 겁니다. 재미있을 거예요.

    편집국장은 이틀 후 내 사무실에 다시 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었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있는 김대중씨나 이후락씨도 다 참석한다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다른 참석자들의 명단을 보고 나더니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발행인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몇 시에 시작하나요? 오후 다섯 시부터입니다.

    자, 이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김상만 발행인이 이후락씨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짠 한국판 시나리오에 내가 출연하는 것이다. 결과?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좋다. 다들 참석하게만 된다면 흥미진진할 것이다.

    6월2일 편집국장과 나는 덕소로 갔다. 덕소는 발행인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5분 여 후 산자락을 따라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도착한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었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 시간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아담하면서 보석 같은 한국식 집도 정다웠으며 접대 또한 융숭했다. 박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을 비롯해 그곳에 참석한 김대중씨 등은 불과 얼마 전의 선거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자제해가며 술을 한잔씩 나누고 화기애애하게 한자리에서 어울렸다. 그런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 무척 유익한 기회였다. 그들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몇씩 모여 그룹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밤 9시, 김상만 발행인과 이후락씨는 서로 얼싸안았다.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본 다음 참석자들에게 이 전원의 목가적 풍경과 이별할 때가 되었으니 나는 이만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더니 참석자들은 모두 당황했다. 이 산 언덕 위 어둠 속에 자기들만 남겨놓겠다는 것이냐고 농을 하면서 가지 말라고 나를 붙들었다.

    정일권 전 총리가 한국식 해결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만약 대사가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 저녁을 즐기기가 정치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당 사람들도 모두 동의했다. 정일권 총리는 논리적이고 건전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 모두가 함께 유명한 요정인 청운각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같이 가자고 강권했다. 나는 결국 품위를 지키는 선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후락씨는 고맙다면서 “이후 진행될 파티는 포터의 평화 파티”라고 선언(?)했다.

    1시간 10분 후, 나는 요정에 와 있었다. 장소는 청운각이 아니라 이후락씨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다른 요정이었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고뇌에 대해 한번 언급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의 선거 보도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들과 중앙정보부가 동시에 동아일보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물론 학생들의 위협이 덜하긴 했지만, 동아일보 발행인 집안이 고려대학교에 지원금을 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학생들이 동아일보를 위협했던 것은 더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해달라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동아일보는 공정 보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언론이며, 따라서 발행인인 김상만씨가 선거 이후 중앙정보부와 빚게 될지도 모를 마찰을 예방해보려는 것은 수긍과 동정이 충분히 가는 일이다.

    선거가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발행인이 편집국장을 통해 그의 걱정거리를 내게 전해왔다. 정부는 편집국장을 교체하라고 자신에게 압력을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내가 의아해하자,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서 예를 들어주었다. 그의 메시지를 내게 전달해준 바로 그 편집국장이 사실은 이보다 덜 심각한 이유 때문으로 2년이나 런던에 쫓겨가 있었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이런 일로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가 꼭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선거도 끝나고 해서 서울 근교에 있는 발행인 별장에서 작은 모임을 하나 마련했는데 혹시 내가 참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김상만 사장은 그 모임에 몇몇 정치인을 초대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내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편집국장이 명단을 꺼내놓았다.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대중, 이철승, 김영삼,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 2명

    아하,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다. 멋진 파티가 되겠는데. 당신 보스는 정말 기가 막힌 사람이다. 국회가 열리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서로 상대방 선거 운동을 비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 초대를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발행인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편집국장은 이해해 줄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손님들에게는 내가 초대하는 것으로 알리겠으며 각자에게 다른 손님들 명단도 다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한국인을 이해하신다면” 이 파티의 참석률은 분명히 100%일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씨는 자동차 사고 후에 아직도 병원에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편집국장은 그도 올 것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이후락씨가 온다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중앙정보부의 부장님이신데.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나요? 그럼요. 편집국장의 대답이었다. 그러면, 이후락씨가 전에도 김 사장의 별장에 갔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올 겁니다. 그런 걸 좋아할 겁니다. 부인들도 초대하나요? 물론 아니지요. 한국 남자들은 부인들이 옆에 있으면 마음놓고 쉬지를 못합니다. 어-어? 그렇다면 이 소모임은 결국 ‘미국’ 대사가 만드는 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만약, 이후락씨가 참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선거 기간에 당신이 쓴 사설 때문에 동아일보가 매질을 당하지는 않게 된다는 걸 뜻하는군요. 사장님 생각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지요.

    나는 동아일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선 나는 김상만 발행인을 좋아했고 또 하나는 한국인의 심리전이 펼쳐지는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파티는 취소되는 것인가요? 전부 오겠다고 할 겁니다. 재미있을 거예요.

    편집국장은 이틀 후 내 사무실에 다시 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었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있는 김대중씨나 이후락씨도 다 참석한다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다른 참석자들의 명단을 보고 나더니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발행인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몇 시에 시작하나요? 오후 다섯 시부터입니다.

    자, 이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김상만 발행인이 이후락씨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짠 한국판 시나리오에 내가 출연하는 것이다. 결과?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좋다. 다들 참석하게만 된다면 흥미진진할 것이다.

    6월2일 편집국장과 나는 덕소로 갔다. 덕소는 발행인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5분 여 후 산자락을 따라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도착한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었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 시간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아담하면서 보석 같은 한국식 집도 정다웠으며 접대 또한 융숭했다. 박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을 비롯해 그곳에 참석한 김대중씨 등은 불과 얼마 전의 선거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자제해가며 술을 한잔씩 나누고 화기애애하게 한자리에서 어울렸다. 그런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 무척 유익한 기회였다. 그들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몇씩 모여 그룹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밤 9시, 김상만 발행인과 이후락씨는 서로 얼싸안았다.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본 다음 참석자들에게 이 전원의 목가적 풍경과 이별할 때가 되었으니 나는 이만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더니 참석자들은 모두 당황했다. 이 산 언덕 위 어둠 속에 자기들만 남겨놓겠다는 것이냐고 농을 하면서 가지 말라고 나를 붙들었다.

    정일권 전 총리가 한국식 해결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만약 대사가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 저녁을 즐기기가 정치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당 사람들도 모두 동의했다. 정일권 총리는 논리적이고 건전하며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 모두가 함께 유명한 요정인 청운각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같이 가자고 강권했다. 나는 결국 품위를 지키는 선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후락씨는 고맙다면서 “이후 진행될 파티는 포터의 평화 파티”라고 선언(?)했다.

    1시간 10분 후, 나는 요정에 와 있었다. 장소는 청운각이 아니라 이후락씨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다른 요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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